아주 천천히 몰입이 되었다. 초반부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중년의 직업관이 다소 답답해 보였고, 건물주이기까지 한 모습에 내가 무슨 연민을 가져야 하길래 주인공을 이렇게 불쌍하게 그리나 싶었다. 그냥 그렇게, 다소 빚이 좀 많은 건물주가, 회사에서 버티는 중간관리자가 느끼는 나름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독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황여사의 등장부터 조금 가슴이 찔려 먹먹해지는 순간이 오고 말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황여사와 똑같은 위치에 회사와 맞서본 적이 있었다. 급하게 오라고 채용했던 그 회사는 채용당시엔 나에게 최소한의 인수인계 기한만을 주고 빨리 오라며 난리였다. 이제 막 시작한 신규브랜드의 문어발식 팽창을 위한 채용이었는데, 어느 보잘 것 없는 브랜드들의 레퍼토리가 그러하듯이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날개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추락하기 시작했고, 팀 해체를 비롯해 전공과 무관한 인사발령 등등의 수순이 이어졌다. 나는 생전 처음 해보는 브랜드 영업팀으로 발령이 났는데 디자인을 전공하던 나에겐 영업팀 신입사원도 아는 기본적인 용어자체도 생소할 정도로 영업에 무능했다. 그땐 주인공처럼 나를 조금이라도 적응하게 도와주려는 동료도 없었던 것 같다.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회사가 원하는 자진 퇴사를 실행해 주었다. 당시 회사는 기안이 재가되려면 기본 일주일은 걸렸는데 나의 사직서 기안은 2시간만에 재가 됐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봐요. 나도 내 일은 잘하는 사람이에요. 상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고요. 표창장을 몇 개나 받았는지 셀 수도 없어. 나도 노하우라는 게 있고 기술이라는 게 있어요. 근데 여기 와서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는 바보 천치 등신이 됐어요. 그게 왜 내 탓이야? 그게 내 잘못이에요? 바보 천치 등신이 되라고 사람을 이런 곳에다 처넣은 인간들 잘못 아니에요?’
퇴사할 때 이렇게 전체메일이라도 날리고 왔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그때의 내 기억은 참담함, 좌절감, 막막함 등 세상 모든 공포와 실망의 감정을 섞어 놓은 진흙탕 같은 암흑뿐이다.

‘9번의 일’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주인공이 9번 보직이 변경되는 건가 싶었는데 9번은 마지막 주인공 보직의 번호였다.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것, 남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지만 나의 입장만큼은 누군가 시킨 일이라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우기는 것, 이러한 사고하지 않는 직업 정신, 생각하려 하지 않는 삶이 점점 나에게도 들어오고 있는 것이 주인공을 통해 느껴졌다.
나도 순수했던 사회 초년생의 시절, 저런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했던 그 괴물이 점점 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갈 때가 요즘 들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점점 이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 그렇게 주인공이 내가 되고 내가 주인공처럼 소설속에, 세상속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지옥에서 버티면 괴물이 된다.

도로는 푸르스름한 새벽의 고요와 적막으로 가득했다. 아침은 그것들을 흐트러트리고 무너뜨리며천천히 돌진해왔다. 가끔은 아침이 오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침 쪽으로 달려간다는 착각이 들었다.(36p)

그는 영업이라는것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뭔가를 판매하려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고 그동안 쌓인 시간과 신뢰할 만한 관계라는 것을.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보여준 친절과 호의에 대한 대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81p)

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스로를 마주해야 하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120p)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들 틈에서 너무나 쉽게 갈등을 만들 고, 무엇이 미움과 불만을 부풀리는지 아는 영악하고 지능 적인 회사의 실체를 비로소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159p)

그는 지금껏 해온 이 일이 자신의 일이고 그 외에다른 일은 할 마음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시 처음처럼어떤 일에 매달릴 자신은 없었다. 새로 뭔가를 배우고 익히며 시간과 노력을 쏟을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 나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168p)

밤마다 내가 여기 와서 얼마나 불을 지르고 싶었는지알아? 그냥 확 불 지르고 다 같이 죽어버리는 건데, 너희가그러고도 인간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 너희들은 회사보다 더 나빠. 짐승보다 못한 새끼들.
.......
이봐요. 나도 내 일은 잘하는 사람이에요. 상담 하나는기가 막히게 잘했다고요. 표창장을 몇 개나 받았는지 셀 수도 없어. 나도 노하우라는 게 있고 기술이라는 게 있어요. 근데 여기 와서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는 바보 천치 등신이됐어요. 그게 왜 내 탓이야? 그게 내 잘못이에요? 바보 천치등신이 되라고 사람을 이런 곳에다 처넣은 인간들 잘못 아니에요?
이후 황 여사의 그 말은 수시로 떠올랐다. 단어나 문장은 조금씩 달라져도 그때 여자의 표정과 말투 같은 것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러면 처음부터 아무 생각 없이 황 여사를 도왔던 게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만들고 자신과 여자 모두를 곤경에 빠뜨린 게 자신 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170p)

오냐. 그래 말 한번 잘했다. 그럼 일 시키는 놈을 데려와라. 그놈 낯짝 한번 보자. 여기 끌고 와. 이놈들아! 무조건위에서 시켰다고 하면 그만이지. 위에서 시켰다, 누가 시켰다. 네놈들은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등신들이야? 왜 시키는대로만 해. (197p)

차라리 기운이 다할 때까지 밀고 당기고 대거리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과 그걸 지켜보는 자신과 자신이 아닐 거라 여겼던 자신의 모습 같은 것들을 잠시 잊게 될지도몰랐다. 기운을 다 쓰고 맥이 빠지면 잠시나마 편안해질지도 몰랐다.(199p)

그래 봐야 서로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뿐이었다.(202p)

생각해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들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놓아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신을 막아서 기만 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 하나쯤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두 가지 마음이 들끓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흘러가도록 내버려둔 걸지도 몰랐다.(224p)

아니지. 아니야. 확실히 해야지.
노인은 스스로에게 다짐을 두듯 그 말을 여러 번 중얼 거린 뒤 그를 따라 집 밖까지 나왔다. 그런 후엔 그의 조끼주머니에 지폐 몇 장을 욱여넣다시피 했다. 그러고는 그가보는 앞에서 대문을 닫아버렸다. 그는 대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돌아섰다.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다지 장이 나왔다. 사택으로 걸어오는 동안 그의 기분은 계속맞고 더 가라앉았다. 무엇이 이토록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사택 앞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것의 정체가 불쾌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이 자신이 베푼 선의와 친절에 값어치를 매기고 그것을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한 돈으로 지불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그는 그 돈을 쓰지 않고 내내 지갑에 넣어두었다.(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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