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중 처음으로 읽는 소설이었다. 인물 재등장 등의 기법으로 파리를 배경으로한 하나의 세계관을 집필한 발자크의 소설 중 얼마나 읽어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 걸음을 떼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사교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는 등장인물의 수가 많고 초반부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후반부에 큰 변수를 주는 인물로 등장하는 등 전체적인 큰 맥락 이외에 집중해야 할 부분적인 요소들이 많다. 나는 단순한 인물가계도를 선호하는 만큼 사교계의 배경은 소설을 읽는데 큰 부담을 준다.
또 고전소설인 만큼 문체는 현대의 일상적인 문체와는 다르고, 심지어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의 격차도 있어 익숙하지 않다. 고전은 시대적인 사고도 차이가 나며, 지명, 장소에 대한 구도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특히나 소설을 상상하는 힘이 발동하지 못해 나 자신의 이해력을 의심하고 좌절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재미를 놓칠 수는 없다. 상황이 다르고 생각은 다르지만 인물들의 감정(마음)은 현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부성애라던지, 욕망이라던지, 이기심이라던지 인간의 보편적인 감수성은 비슷하니까....

출세에 대한 욕망은 비판받을 일은 아니지만 맹목적인 갈망은 비판을 받을 일이 주변에서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순수한 목적이라도 의도치 않게 안좋은 상황을 만들기도 하는게 일상 다반사인데 맹목적인 갈망은 얼마나 큰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가.
으젠의 출세에 대한 욕망은 다른 발자크의 소설에서 큰 성공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보트랭씨의 말대로 출세는 노력보다는 기회와 운이라고 했는데 으젠이 고리오영감의 후원과 델핀의 정부가 된 것을 발판삼아 어떤 야망을 펼치며 성공가도를 누릴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다만 으젠이 고향집에서 부모나 누이들로부터 지원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도 고리오영감의 두 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고리오영감은 으젠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헌신을 비참함 보다는 숭고함으로 표현을 하며, 으젠은 그러한 대화를 통해 고향의 부모와 누이에게 받는 지원에 대한 정당함을 가져갔다는 느낌이랄까.
소설의 분량은 으젠의 몫이 더 많지만 작품을 리드하는 입체성이 강한 캐릭터는 고리오 영감이고 이 또한 이 소설의 제목이 고리오 영감이어야 함을 설명해주고 있다. 고리오 영감과 으젠의 연결고리는 고리오의 두 딸들과의 관계 뿐 아니라 그의 출세를 위한 부모나 누이의 지원을 받는 모습 등이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고리오 영감의 모습을 통해 현시대의 모습을 같이 비교해 봤을 때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부모의 자식을 통한 대리만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성공의 모습을 자식을 통해 그리고서 열성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점에서 대단히 섬뜩한 일이다. 자식을 위한 희생이라기 보다는 본인 욕망에 대한 투자에 가깝다.
고리오 영감도 사교계에 화려한 삶의 대한 욕망을 딸들 통해 실현시키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어렸을 적 순수했던 레스토부인, 뉘싱겐부인은 고리오영감의 욕망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일깨웠을 것이고 결국 사교계의 향락에 깊숙이 빠져버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라면 고리오 영감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으젠에게 파티준비로 관심을 주지 않는 뉘싱겐 부인에 대한 으젠의 생각(아버지 시체를 밟고서라도 무도회에 갈 여자라는 문장)이 인상깊었다. 소설을 한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나.
그리고 고리오 영감이 사망하고 나서 보케르부인 하숙집에서 영감의 죽음을 애도하기는커녕 밥맛 떨어지는 일, 혹은 다행한 일이라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 허망한 부성애와 사교계는 물론 평민들의 인간관계까지 이기적이고 고독한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다음 발자크의 소설을 또 기대해 본다.

결국 이 하숙집이 그녀의 전부를 상징하듯이, 그녀의 모 든 모습이 이 하숙집을 설명해 준다. 간수 없는 감옥이란 있을 수 없듯이, 독자들은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빼놓고 다른 하나를 상상할 수 없다.(15p)

인간들은 악덕은 용서하면서도 어떤 인간의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짓은 용서하지 않는 법이다.(26p)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힘을 증 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27p)

그녀도 여느 사람들처럼 가까운 사람은 못 믿으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여는 그런 여자였다. 이상하지만 사실인 이 정신 상태의원인을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 면서도 자신들의 허점을 그들에게 보인다. 그런 다음에는 그들이 당연히 받을 벌을 받는다고 남몰래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아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느낀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지니지 못한 장점을 지닌 듯이 보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자기들과 관계가 없는 존경과 사 랑을 불시에 얻고 싶어한다. 심지어 언젠가는 그들이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위험조차 무릅쓰고 말이다. 결국 친구나이웃 사람들에게 아무런 선행을 베풀지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이익에 골똘하는 부류들이 있다.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어서 자존심을 만족시키는사람들도 있다. 즉 애정의 원(圓)이 자기들과 가까워지면 가까 워질수록 덜 사랑하게 되고, 멀어질수록 더욱 친절해진다. 보 케르 부인은 근본적으로 치사하고 잘못된, 밉살스러운 이 두 가지 성격을 함께 지녔다.(33p)

인간의 마음이 애정의 꼭대기에 오르면서 휴식을 얻을 수 있다면, 그와 반대로 증오의 가파른 비탈에서는 거의 발을 멈추지 않는 법이다.(34p)

이러한 고리오 씨의 변화는 그의 재산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데다 주인인 자기를 괴롭히려는 생각에서 비롯했다고 그녀는 짐작했다. 속좁은 인간들이 지닌 가장 밉살스러운 버릇 중의 하나는 자신이 째째하니까 남도 째째할 것이라고 억측하는 것이다.(35p)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 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사람들은 천재의 위력에 굴복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비방하려고 들지. 왜냐하면 천재는 분배하지 않고 독점하니까 말일세. (148p)

불안정한 처지 때문에 받은 괴로운 타격 아래에서도 그는 이런 생활이 주는 지나친 향락을 단념할 수 없다고 느꼈다. 어떤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계속해 가려고 마음먹었다. 일확천금의 요행수도 이젠 거품처럼 사라졌고 현실적 장애가 늘어갔다. 뉘싱겐 부부의 가정 비밀을 잘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연애를 출세의 방편으로 삼으려면 온갖 수치를 무시하고 청춘의 과오를 속죄하는 고상한 관념을 포기할 필요가 있었다. 겉으로는 아주 화려하지만 속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온통 좀먹어 있었으며, 그러한 삶의 덧없는 쾌락에 대한 죄과는 끝없는 고뇌로써 치러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택한 이 인생 속에서 그는 라 브뤼에르의 「방심자」처럼 진흙 속에 잠자리를 만들어서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방심자」처럼 아직은 자기 의복만을 망치고 있었다.(212p)

보케르 부인은 식탁 주위에 열여덟 명 대신에 열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한마디도 얘기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지 만 모두들 이 여주인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식사만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보트랭과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곧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에 끌려들어서 결투와 도형장과 재판소와 개정해야 할 법률과 감옥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크 콜랭이나 빅토린이나 그녀 오빠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열 명뿐이었는데도 마치 스무 명이나 되는 듯이 떠들어댔다. 그 때문에 보통 때보다 더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 점이 이번 식사 와 전날 식사 사이에 있었던 차이점의 전부였다. 파리에서 매일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또 다른 먹이를 구하는 이 이기적인 사회의 습관적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보케르 부인 자신도 뚱뚱보 실비의 얘기를 듣고서야 희망에 가득 차서 마음을 가라앉혔다.(287p)

나도 모르겠어요. 나의 모든 생명은 당신에게 있어요. 아버지는 나에게 심장을 주셨지만 당신은 내 심장을 뛰게 했지요.
세상 전부가 나를 비난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죠! 어쩔 수없는 이 사랑 때문에 내가 죄를 저지를 때 당신은 나를 받아주시기만 하면 돼요. 나를 원망해서는 안 돼요. 당신은 나를 불효자식으로 생각하시겠지요? 오,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말미암아 어떻게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왜 우리들의 결혼을 막지 않았을까요? 우리들에대해 깊이 생각하셨어야 했을 텐데? 이제 와서야 알았어요. 아버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괴로워하고 계세요. 그렇지만 우린들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아버지를 위로하라고 하시겠지요! 결코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없을 거예요. 우리들의 비난이나하소연이 아버지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체념은 아버지에게 고통을 줄 거예요.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것이쓰라린 경우가 있어요(338p)

기민한 그는 델핀의 본성을 꿰뚫어보았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자기 아버지 시체라도 밟고 무도회에 갈 수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예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에 대해서 이치를 따져주는 역할을 할 힘과 그녀 마음을 언짢게 할 용기와그녀와 헤어질 만한 덕성도 없었다.(350p)

「밥맛 떨어지겠소. 한 시간 전부터 영감에 대해서 온갖 얘기를 다하지 않았소? 파리라는 좋은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하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수있다는 것이오. 그러니 이러한 문명의 혜택을 누립시다. 오늘도죽은 사람이 육십 명이나 되는데, 파리에서 죽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애도의 뜻을 표하겠다는 말이오? 고리오 영감이 뻗었다면, 본인으로서는 차라리 다행한 일이지! 영감을 좋아한다면 가서 보살피시지.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식사나 하 게 해주시오」
「오! 맞았어요. 영감이 죽은 것은 본인에게는 참 다행한 일이에요! 불쌍한 영감은 일생 동안 줄곧 불행했을 테니까요.」과부가 말했다.
으젠이 보기에는 부성애의 상징이었던 이 영감에 대한 유일 한 추도사란 이런 것이었다. 열다섯 명의 하숙인들은 보통 때처념 잡담을 시작했다. 으젠과 비앙숑이 식사를 끝냈을 때 포크와손가락 소리, 대화하다가 웃는 소리, 무관심하고 식충이들인 이들 얼굴에 나타난 가지가지 표정들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두 사람은 소름이 끼쳤다.(3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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