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책들을 보려 처음 시도한 책은 보르헤스의 ‘픽션들’이었다. 그리고 ‘픽션들’을 읽은 소감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고전을 읽어보았다는 만족감 외에는 재미도, 감동도 없었고 나중에 누군가 책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면 주절거릴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될까도 의문이다.
두 번째 도전한 ‘백년의 고독’은 ‘픽션들’에 비해 내용도, 문장도 지루하지 않고 환상적인 스토리에 유머러스한 풍자와 해학까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무려 완독하는데 2달이 넘는 기간이 걸리긴 했지만(안나 카레리나는 1년 가까이 봤다), 꿈을 그리는 듯한 스토리와 요절복통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리는 서사, 선형적 세계관이 아닌 순환적 세계관으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며 성찰하게끔 하는 책의 포괄적인 주제까지, 남미문학에 대한 견해를 조금이라도 갖게 해준 독서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다만 멜키아데스의 영혼이 돌아올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아 다시 처음부터 등장인물 가계도를 그리면서 봤는데, 부엔디아 가문과 연관되어 언급되는 인물이 무려 26명이 넘었고(책 앞부분의 가계도는 너무 간략하다. 부엔디아 대령의 17명의 이복 자식들 이름이 언급되며 등장 할때는 심지어 좀 짜증이 났다), 주변의 인물이 40여명이 넘어가는 등, 완독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복잡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이 책의 최대 난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등장인물 수만큼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다소 코믹한)활약이 소설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한다.

마술같은 배경속에서도 인류의 보편성은 존재한다. 우르술라와 같은 모성을 대변할 수 있는 여성과, 대를 이어가며 방탕한 성향을 대표하는 ‘아르까디오’와 역마살 낀 모험가 성향의 ‘아우렐리아노’, 사랑에 얽힌 질투, 음모, 멜키아데스의 주술적인 예언, 현자의 캐릭터,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바나나공장과 대학살 등 픽션이 가질 수 있는 환상성에 현실적인 리얼리즘이 교차된, 재미까지 가미된 멋진 고전이었다.
과거 우리의 몇몇 환상이 실재가 되어가는 요즘, 마르케스의 환상도 꿈을 꾸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세상사는 그녀의 피부에서만 머물렀을 뿐, 그녀의 내 면은 모든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114p)

‘시간은 흐르게 마련인데, 제가 뭘 바랐겠어요’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지만, 그토록 빨리 흐르진 않아’ 우르술라가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사형수 감방에 있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으로부터 들었던 것과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세월이 방금 전에 수긍했던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원을 그리며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한번 더 몸서리를 쳤다. (1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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