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원고를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그들에게서 숱하게 보아왔더 누구에게나 호감과 신뢰를 줄 만한 여유롭고 자신감 있는 미소가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진 것을 보았고, 그들이 긴장한 채, 어떤 간절함을 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그제야 그들이 나를 찾은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오직 둘만이 존재했던 세계에 이제는 그들에게 동의해줄 타인이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그게 그들의 세계가 지속될 수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떤 유적도 역사도 없는 그들의 애처로울 정도로 빈약한 세계를 증언해줄 목격자를 원했고, 최후의 순간에 그들의 편에 서줄 동조자를 원했으며, 점점 커져가는 그들의 죄책감을 함께 나눌 공범을 원했다.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다음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다음의 다음, 또 다음의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리고 우리는 그날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이다.
이후 잠시 동안, 결코 길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정적이 흘렀다. 매해 여름이란, 이런 아름다운 계절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이 지속될 여름이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아득하고 눈부신 말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종종 나누기도 했던 조금은 과장된 약속들과 달리 그건우리 모두를 미몽에서 깨울 만큼 강력한 주문이었다. 물론 그 짧은 정적 이후에 우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문학과 삶에 대해 목소 리를 높였지만 그뒤로는 모든 게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주 문이 내게 준 실감은 언젠가 우리가 서로를 잃을 거라는 것이었고,
그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큼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때 느낀 공허함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분명 나의다. 그 공허함은 정은의 것이고 현수의 것이었지만, 그만큼이나 나의 것이기도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가 현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던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사과를 받으려던 것도 아니고 그에게 글을 이어 쓰라고 강요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를 만나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기다리기 위함이라기보다는그저 어떤 시기를 연장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걸 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 꽤 오랫동안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돌이켜보았지만, 그건 옳은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무엇이, 그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했는지가 더 나은 질문이었다.

소설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어떠한 사건을 겪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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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가 그 이후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말할 수 있다. 누군가가 내 몸을 보고 흥분하고 발기하는 일을 선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첫이 아닌 것들의 의미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이 되었다. 사랑에서 애걸로 되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조금은덜 실패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도 영화도 내가 선택한 잘못 찾아들 어간 길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3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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