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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갚는 기술 - 돈 한 푼 안 들이고 채권자 만족시키기 ㅣ 고전으로 오늘 읽기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선주 옮김 / 헤이북스 / 2023년 3월
평점 :
책의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고 작가의 이름을 보고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가 맞나 싶었다. 거대한 문학작품만을 접해왔기 때문에 이런 해학적인 제목의 책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 나서 부채는 더 쌓여만 가는 현실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고전 문학인만큼 우리가 실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라는 점.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참신한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낸다. 책을 읽다 보면 몇 번이나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되는지 모른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채권자 만족시키기>라는 부재에 딱 맞는 내용들인데 심지어 읽는 동안 설득 당한다는 게 더 신기하다.
역자 후기를 보면 발자크는 그의 문학적 명성에 못지않게 평생 빚더미에 앉아 있던 작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20대 후반부터 벌써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왜 평생을 빚지고 살았을까? 보들레르의 짧은 글에서 조금 짐작이 된다고 한다.
(기후도 안 맞는 파리에서) 파인애플이 주렁주렁 달린 정원, (철에 안 맞는) 장식의 별장 등 발자크는 취향도 독창적이라 괴이한 발상으로 일상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모든 걸 갖고 갖추어 살다 보니 채권자들로부터 많은 빚을 지게 된 모양이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 하루에 커피를 물 마시듯 들이키면서 잠을 쫓아 글을 써야 할 정도로 말이다.
이 책은 인간이 갈망하고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60년 평생 향유하고 나서, 평소 자신의 남다른 재능과 자질을 높이 평가해 주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멋들어지게 삶을 마감한 지은이의 삼촌에 대한 글이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를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소비자가 물건을 사지 않으면 생산자가 망하게 되듯이 채무자가 빚을 지지 않으면 채권자가 살아갈 수 없다는 논리이다. 삼촌의 명언을 몇 가지 읽어보면 채무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삼촌의 명언]
- 갚을 빚이 많아질수록 신용은 늘어난다. 감당해야 할 채권자들이 적어질수록 돈 생길 곳은 줄어든다.
- 어떤 왕국이나 제국도 두 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생산자와 소비자. 생산자는 곧 채권자이고, 소비자는 채무자이다. 만일 소비자들이 없다면 생산자들이 무용해진다. 따라서 생산자들을 생존하게 만드는 이들이 곧 소비자들이다. 결국 생산자(채권자)는 소비자(채무자)가 그들에게 갚아야 할 것을 못 갚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소비자들이 생산자들에게 갚을게 하나도 없게 되면 생산자들은 굶어죽을 테니 말이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고 싶지만 갚을 도리가 없어서 자살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채권자들에게 갚아야 할 게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그래서도 살아야지 죽으면 안 된다.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았을 경우에 나라마다 다양한 처벌들이 나오는데 끔찍한 방법들이다. 유태인들은 해당 채무자나 그의 아내, 자식들을 가두거나 팔아넘겼다. 튀르키에서는 뾰족한 창으로 몸을 관통시킬 권한이 있었다. 로마에서는 채무자의 신체를 갈가리 찢어서 채권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처벌 방법도 나와서 신기했다.
조선에서는 정해진 기한에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매일 15회씩 종아리에 세찬 매질(곤장)을 할 수 있었고, 자식이 진 빚을 부모가 갚아야 했다.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부모들은 아무리 아끼는 자식이 진 빚이라도 부인하며 안 갚으려 했다.
채권자에게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나오는데 정말 유머러스하다. 건강해서 만일 70이나 80세 아니 더 나아가 90세까지 살아남는다고 치자. 이 경우 평균 나이는 45세가 되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1년에 하나로 정산해서, 여러분의 44번째 혹은 45번째 채권자를 땅에 묻는 셈이 되는 것이다. 채권자의 사망은 부채를 자연스럽게 상각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다.
채권자가 어떤 집을 얻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채권자를 지치게 만드는 거리는 정확히 6킬로미터에다가 보태지는 걸음으로 138보. 아파트에 오르다고 138보를 걷다 보면 지쳐서 기진맥진해질 뿐 아니라 화를 낼 기운도 없어진다고 했다. 그런 상태로 여러분의 집에 도착하면 잔뜩 지쳐버려 돈이고 뭐고 일단 어디 앉아서 물 한 잔 들이켜는 게 급선무가 된다.
아시다시피 돈을 갚는 것보다 의자와 물을 대령하기는 쉬운 법이다. 삼촌이 딱 한 번 감옥에 갈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사는 곳 때문이었다. 방심한 채, 앞길이 보이지 않는, 뒤편에 있는 건물의 1층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은이가 결론을 내리면서 한 마디 한다.
[삼촌에게는 죄송하지만....]
그의 글을 편집하는 동안 나는 삼촌의 비도덕성에 불만했고, 빚을 내지 않을 수 없을 때뿐 아니라 돈을 갚아서 더 이상 빚을 내지 않아도 되는 때에도 빚을 갚지 않도록 조언하면서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한 농담들이 다소 씁쓸했다.
어떻게 빚을 졌든 간에 일단 빚들은 타인과 연관된 진지한 약속인지라, 거기에 존중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작성한 솔직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