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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월
평점 :
아파트에 살던 후배가 땅 집으로 이사 간다고 하길래 덮어놓고 잘했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정작 어디다 집을 샀는지 동네 이름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무심한 것도 일종의 버릇인가 보다. 내 노쇠 현상의 특징이 이름이나 숫자에 대한 현저한 기억력 감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그런 것들은 아예 건성으로 듣게 된 게 버릇이 된 듯싶다.
p.11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후배가 이사 간 동네는 작가가 50년 전에 살던 동네였다. (1인칭 시점으로 작가를 '나'로 대신한다.)
그 순간 나는 '그 남자네 집'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첫사랑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무려 50년이다. 모든 게 다 바뀐 모습이고 나의 아련한 기억에 일치하는 모습이라고는 그놈의 목욕탕뿐이다.
모든 것이 바뀌어도 '그 남자네 집'만은 남아있을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당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세간살이를 줄여 이사를 왔고, 한 달도 안 되어 그 남자네 집이 이사를 왔다. 이삿짐의 규모만 봐도 그 집의 살림이 어떤지는 알 수 있기에 충분하다.
화려한 장롱, 고풍스러운 문갑, 몇천 권의 책.
그보다도 나는 훤칠한 그의 외모에 반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고 그 남자는 상이군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연애하는 남녀는 다들 이쁘고 멋지게만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고, 온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하루라도 그 사람 없이는 안될 것 같은 날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한 사람에게만 몰두하는 데 지쳐 자연스레 각자의 집안일을 우선으로 멀어지게 된다.
혼기가 차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같은 부대에서 일하는 민호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민호 씨'가 되고 결혼 상대자가 된다.
전민호는 이미 전부터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행원이었던 그는 엄마가 원하는 신랑감 1위였다.
민호의 친척은 아니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의 춘희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고, 민호 집에서 저녁을 대접받게 된다.
p.104
만일 춘희가 잘못된다면 내 책임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착한 사람들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착한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만 착해야 된다고 믿기 때문에 도덕적인 책임은 으레 남한테 덮어씌우려 드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민호하고 결혼을 한다면 춘희네 와 추녀를 나란히 하고 살게 될 게 아닌가. 두 집 사이는 보통 친한 이웃 이상으로 보였고, 그것도 부담스러웠다.
p.108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러 나오면서 외등도 없는 어두운 모퉁이에서 그가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았다. 어찌나 가만히 조심스럽게 잡는지 그가 얼마나 소심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뿌리치지도 맞잡지도 않았지만 속으로는 너는 이제부터 내 손안에 있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청첩장을 찍고 나자 그 남자에게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혼 준비 진행 중에도 그 남자가 만나자고 하면 죄의식 없이 만났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가끔 그 남자를 만났다.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은 그날까지.
나중에서야 친정에 갔다가 친정엄마한테 듣게 되었다.
그 남자가 뇌 수술로 실명이 되었다고 했다. 그 남자의 누나에게 연락해 병원을 알게 되어 찾아간 그곳에 그 남자는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었다.
그 후로 나는 줄줄이 애도 낳고 세간 살림을 늘려 이사도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5명 중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신랑이 박수무당 덕분이라고 정기적으로 치성을 드리러 다니셨다.
빳빳한 새 돈을 갖다 바치는 시어머니가 좀체 이해가 가지도 않고 시집의 이상한 풍습으로 여겨졌다.
아침 신문 부고란에 그 남자의 부음이 나 있었다.
유족으로는 대안학교 교감 선생님인 부인과 1남 2녀를 두고 있다고 했다.
그 남자에게 나는 첫사랑이었다. 결혼을 앞둔 나를 잊기 위해 불편한 다리로 운동도 해 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를 잊기 위해서 얼마나 몸을 혹사시켰을까.
머리에 벌레가 들어가 눈이 돌아갈 정도로 고통스러움에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고통으로도 나를 못 잊었나 보다.
볼 수 없는 것 밖에는 날 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듯이, 그는 뇌 수술 후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최선을 다한 당시 의사의 실수였을까, 그 남자의 의도치 않은 의도였을까.
그렇게 그를 버리고 간 나에 대한 그의 복수였을까.
평생을 무거운 추억 속에 나를 매몰시킬 그의 의도였을까.
그것도 부족하였던지 그는 나보다 먼저 떠나버렸다. 이 세상에 남게 된 나는 10년을 더 살아야 할지,
얼마나 더 살아내야 할지, 봐도 볼 수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