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 ㅣ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6년 9월
평점 :
추천도서, 임승수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정치인에게 국민이 개돼지요 자본가에게 노동자가 개돼지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와... 이렇게 와닿는구나! 난방비 폭탄 사태는 왜 일어난 거지?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임승수 지음, 시대의창 펴냄
법정근로 시간을 주52시간으로 단축한 근로제도가 이제야 조금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이번 정부에서 그 정책을 다시 뒤집고자 한다. 52시간 전이었던 68시간도 아니고 69시간으로 회귀하고자 함이다. 이리되면 뭐가 좋을까? 기업, 자본가들은 어깨춤이 절로 날 일이겠다. 노동자의 시간, 즉 노동력을 사는 데 지불되는 비용보다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해 훨씬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를 부리는 것이 합법인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소유자가 이윤을 취하는 것은 합법이다만!
우리가 돈으로 구입하는 모든 상품은
누군가가 노동한 결과물입니다.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노동 덕분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나의 노동 덕을 보겠죠.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노동 공동체의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 소중하고 항상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할 '타인의 노동'을 단순한 화폐 수치로 전락시킵니다.
따뜻한 '인간' 관계를 차가운 '돈' 관계로 치환하죠.
187-188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요,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가 빼앗긴, 착취당한 노동(잉여가치)에서 나온다. 이것이 마르크스 "자본론"의 핵심 내용이란다.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하자면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랄까! 어떻게 그러냐고?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있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교환가치는 상품이 노동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의 교환비율은 해당 상품을 만드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생산과정에서 가치가 생산물에 이전되는 방식을 기준으로 구분하자면 노동자가 임금으로 받는 부분은 가변자본이다. 이때 노동자의 노동력 중 임금에 해당하는 부분이 필요노동이요, 자본가의 이윤으로 전환되는 부분이 잉여노동이다. 이를 바탕으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C불변자본+V가변자본+S잉여가치'다. 용어가 어려워 보이지만 딱히 어려울 것도 없다. 임승수 저자의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에서 친절히 짚어주니까 일단 주는 떡 받아먹으면 끝. 하지만 읽다 보면 '사상' 있는 우리는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날 게 분명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결국 기업들이 경쟁해야만 하는 전쟁의 장이나 다름없다. 약육강식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은 노동자를 쥐어짜야만 한다. 즉, 자본가는 자연스럽게 자본의 무한한 탐욕을 닮게 되어 노동자의 근로시간을 연장해서 잉여가치의 절대량을 늘려야 한다. 이로써 절대적 잉여가치의 창출이 일어난다. 즉, 자본가는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더 많이 뽑아내기 위해서, 또 시장에서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노동자에게 장시간의 근로를 강요한다.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를 최대로 높이기 위해 설비를 연구하고 투자하여 새로운 기계 및 시스템을 확보한다. 이로써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특별잉여가치가 발생하고 자본가는 이를 무기 삼아 자사 상품 가격을 낮추어 시장 우위를 점한다. 상대적 잉여가치가 창출된 것. 이러한 경쟁 과정에서 일부 기업은 도태되고 살아남은 기업들은 동등한 기술력을 갖추어 노동시간의 단축을 달성한다. 그럼 노동자도 좋은 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여기서 얻어지는 이익은 대부분 자본가가 가져가기에 노동자의 삶의 질이 '절대적'으로 개선되어도 계층 간 빈부 격차는 '상대적'으로 심해진다. 기술 발달로 생산력을 증가시킨 결과가 착취를 강화하는 꼴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력 착취를 가능하게 하고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를 원망해야 할까? 후후... 그렇게 생각하면 아... 슬프지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200여 년 전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 즉 새로운 기계의 발명으로 일자리를 잃은 숙련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하려고 벌인 대규모 행동을 예로 들어 기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고 하니, 정말 자본론 읽어야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별잉여가치고 상대적잉여가치고를 뛰어넘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더욱 착취당하도록, 즉 자본가들이 손 안 대고 코 풀 방법이 또 있으니 바로 성과급이다. 두둥. 성과급이라고요? 두둥! 이윤율이 같다고 하는 와중에 이윤량과 착취율이 등장하니, 현실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갈등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
내 맘대로 요약하자면 이거다. 자본가는 초기에 자본금으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입하고 생산과정을 거쳐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을 만들어낸다. 이때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뽑아내는데 상품을 팔아 벌어들인 돈은 당연히 초기 자본보다 크다. 노동자의 잉여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가 창출되기 때문.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단순재생산 하느냐 확대재생산 하느냐는 자본가에게 달렸다. 이 과정에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산업구조가 바뀌는 것은 말릴 수 없는 문제겠다. 마르크스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실업 상태로 있는 사람을 산업예비군이라 불렀다. 이 산업예비군이 많을수록 자본가는 좋다. 필요한 인력을 적당한 임금 수준으로 손쉽게 고용할 수 있기 때문... 노동자, 하아... 마르크스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생산수단의 소유권 문제를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얘기? 이러한 공상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 어느 쪽에 손들겠는가? 여기서 국가, 즉 정부가 법과 제도로 규제하는 개입이 필요한가? 국가의 개입이 커진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세상을 바꿀 주체는 노동자 라 하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비유가 지금도 횡행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혹시 인류의 종착역일까? 임승수 저자는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에서 분명 이전 사회보다 장점이 많은 자본주의 사회지만 우리는 한 발 더 내딛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질문이 있다. 나는 꼭 노동자일까? 나는 자본가가 되지는 못할까? 아니, 세상일 누구도 모른다지 않던가. 나의 출발은 노동자였으나 자본가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읽지 않아도 될까? 아니, 자본가적 입장에서도 이런 과정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으므로 읽어야 할까? 이런 과정을 알기에 모범이 될 만한 좋은 경영 모델을 시도할 수 있으므로 꼭 읽어야 할까?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하였으니 임승수 저자의 책,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노동자와 자본가를 막론하고 필독서라고 하겠다. 왜 내 자식이 비정규직으로 채용되는지, 왜 나는 정규직을 채용하지 않고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인 비정규직을 채용하려 드는지를 알고 싶다면, 읽어보자.
노동자를 위해 쓰였다는 "자본론". 다행히도 우리 노동자는 예전 시대의 노예와는 다르게 교육을 받아 일정 수준의 교양과 사상을 갖추었다. 임승수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천동설을 진리로 알고 있던 사람이 지동설을 알게 되었을 때 받는 충격에 비교했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대변하는 사람한테 투표한다는 말에 통쾌하면서도 안타깝다. 사회주의가 좋냐 자본주의가 좋냐를 두고 따지는 게 아니다. 사회주의는 어떻게 자본주의는 어떠하니 우리는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혹 더욱 발전시킬 방향은 무엇인지를 더욱이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찌해야 할지를 고민해볼 노릇이다. 알아야 면장 한다고 했던가. 노동자와 자본가는 마음먹기 따라 한 끗 차이라고 보자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책 임승수 저자의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겉핥기 식 도서이나 알찬 책,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