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201411, 이 나라를 떠다니는 부조리에 대한 의문, 부정의에 대한 항의, 진실은폐에 대한 거듭된 질문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도 참된 삶에 관한 교훈을 얻지 못하고, 패거리 정치꾼들의 놀음판에 말이 되어 늘 망각의 강을 건너는 우리의 과오를 기억해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꾸는 미래를 제시하기 못하고 숨 막히는 입시교실에 가둔 어설픈 어른들을 기억해야 한다. 개살구에 불과한 성장과 성과를 위해 도도한 강을 뒤엎고, 생태보고인 습지와 갯벌을 없애는 무지몽매함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와 권력을 사적으로 활용하고, 국민과 시민사회와 공적 구성원들을 이간질시키고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철학 없는 위정자를 기억해야 한다. 1%의 기업집단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99% 국민의 생존권을 과감히 내던지는 무모한 정책결정자를 기억해야 한다. 꽃 같은 아이들과 국민들을 사지에 몰아넣고도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던 우유부단한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독재의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아직 독재의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먼저 간 누군가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지만, 다시 등장한 누군가는 새로이 돋아난 싹을 짓밟고 독재의 망령을 부활시키고 있다. 그동안 변한 것은 설탕과 밀가루에 대한 숭배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햄버거와 커피의 숭배에 빠져버린 우리 국민들이다. 독재의 시대에 독과점의 지위를 부여받았던 기업 자본은 지금은 거대자본이 되어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국민을 좀먹고 있다.

 

11월의 하늘은 시리도록 청명하지만,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우리의 반복되는 온정주의와 대책 없는 망각에 분노해야 한다. 국민의 생존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사유화된 권력에 분노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에 국가와 국민을 볼모로 잡혀버린 영혼 없는 권력자에 분노해야 한다. 이들 권력에 빌붙은 좀비 같은 추종자들과 그들의 허언에 분노해야 한다. 이들에게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부여한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에 분노해야 한다.

 

비좁은 교실에서 시험기계가 되어 내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의 교육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재정건전성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복지를 하향평준화 시키는 후안무치한 결정에 분노해야한다. 세대 간의 단절과 국가 구성원의 분열을 책동하는 보이지 않는 아주 나쁜 손에 분노해야한다. 정치실험이라는 이유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국부를 헛되게 낭비한 삽자루 정신에 분노해야 한다. 개그프로의 닥치고와 같이 계속된 망각에 희화화된 우리의 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누군가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맨몸으로 부당함을 표현해야 하고, 다른 누군가는 반복되는 질문에 침묵하는 거짓됨에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거대한 망각에 분노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현자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죽음의 대한 근심을 갖지 말기를 경고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우리의 삶이 우리의 뜻대로 되었던가? 마치 수풀이 무성한 곳에서 어딘가 뱀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 우리의 하루를 지배한다. 엄습해오는 불안감의 실체는 분명치 않지만, 공기와 같이 우리 주위를 부유하는 것은 명백하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울리히 베크 교수는 이와 같이 위험이 일상화된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위험사회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따른 불안감을 늘 품고 사는 사회를 말한다.

 

2014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위험사회에 살고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상황은 재앙사회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울리히 베크에 의하면 위험사회는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성찰하고 재발을 막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재앙사회는 위험한 경고나 재앙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 없이 재앙이 반복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에 따르면 2014년의 대한민국은 전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한 세월호사건부터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른바 재앙사회에 가깝다.

 

 

#2.

지난 4.16 이후에 우리 사회에 깊은 반성과 진정성 있는 성찰이 있었던가? 책임과 반성의 사전적 의미는 알 수 있겠지만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회적 성찰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책임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책임규명이라는 이유로 몇 사람을 법의 심판대에 기소하고, 관련 조직을 해체하는 법률을 입안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의욕부족으로 지지부진하다. 분노의 4. 16 이후에 대한민국의 시계는 멈춰있다.

 

꽃피우지 못한 어린 생명들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무엇을 보았던가? 국가시스템의 부재, 지도력의 부재, 위기관리시스템의 부재를 비롯한 무정부상태와 무능하고 무력한 몇 사람의 직업정치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위험에 노출된 대한민국의 여린 속살을 보았다. 몇 번의 고통스런 기억을 통해 이제 국민은 무책임한 정부와 전문가 집단을 믿지 않는다.

 

책임은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번 무너진 신뢰는 하루아침에 회복할 수 없다. 민방위복장을 착용하고, 사건발생 후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국정운영자들의 인식은 여기에 머물러 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한사람의 말은 책임 없는 자리에 있는 백사람의 말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리더십과 더불어 책임감이 강한 지도자가 필요한 까닭이다. 또한 체험적 지식이 결여된 학위만을 가진 전문가는 탁상공론의 전형적인 폐해를 가져온다.

 

우리사회는 6.25이후 빠른 시간 내에 산업화와 고도성장시기를 거친 세계사에 흔치 않는 이력을 갖고 있다. 역동성 있고 빠른 성공신화는 한강의 기적으로 과대 포장돼 현재 우리 사회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는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제대로 된 성장통을 겪지 못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흔들리는 청춘을 거치지 않은 허약한 성인이 되어버린 경우와 같다.

 

모든 사회변동에는 각각의 위험요소가 따른다. 따라서 바람직한 사회라면 다소 늦더라도 예상되는 위험과 그에 대한 극복의 경험을 거치고 가야하는 것이다. 시속 300km의 속도로 달리는 KTX에서 경관을 세밀하게 조망할 수 없듯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각 단계마다 발생하는 위험요소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사회는 빠른 변화를 소망했던 탓에 타산지석의 경험이 없고, 그 경험과 성찰의 부재가 우리사회의 현재를 더욱 위험하게 하고 있다.

 

 

#3.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발생하는 각종의 사건들은 하나의 복잡계를 이룬다. 하나의 복잡계는 더 커다란 체계의 하위체계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연관성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아니 그 상관관계를 모른다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복잡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이 하나의 법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작은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대형사고를 만든다는 하인리히 법칙도 이러한 법칙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복잡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라고 한다.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세상이 운용되는 원리가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수학적, 물리학적 논리에 따르면 복잡한 현상을 분석하는 도구의 틀이 명확하면 원인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변수를 통제하고, 변수들 간의 네트워크의 상관성을 분석할 수 있다면 그 동일한 사건의 재발은 물론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변수들도 각 사회마다 다르고, 그 변수로 인한 각종의 사건 사고의 양상과 그 해법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사회마다 발생 가능한 사건에 관한 다양한 경험과 실패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경험적 사실을 체득하지 못함으로 인해 사회구성원을 지켜주는 사회안전망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현재시점의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미진한 과거로부터 오고 있다.

 

 

#4.

울리히 베크 교수는 한국을 특별한 위험사회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한국이 실질적으로는 재앙사회에 가깝지만 한국사회가 가진 변화가능성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다소 우호적인 시선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능성이 있을까? 과연 우리는 재앙사회를 탈피하여 위험사회에 머무르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

 

첫째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권력의 가장 큰 힘은 국민으로부터 비롯된다.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정부와 정치권력은 무정부상태의 지폐와 같다. 책임을 다하는 정부는 국민을 저버리지 않는다. 또한 전문가 집단은 관련분야에 관한 전문적 식견뿐만이 아니라 체험적 통찰을 하여야 한다. 국민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정운영자가 책임의 진중함을 통감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적재적소에 전문성과 책임감을 가진 전문가를 두고, 양자가 머리를 맞대어 위기를 풀어나갈 해법을 강구하고 이를 몸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국민의 믿음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둘째는 정교한 위기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뒤흔드는 사건에서 사후약방문과 우왕좌왕은 눈물과 절망을 낳는다. 안전에 관한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예방이다. 문제는 어떤 시스템에서 고도의 예측능력을 갖추더라도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일정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이에 대한 정확한 매뉴얼과 행동방안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성수대교 붕괴, 삼품백화점 붕괴, 씨랜드화재 등 국민을 절망케 했던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에서도 크게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경험했던 사건들을 철저히 분석하고, 우리사회에 적용 가능한 선진시스템을 접목하여 한국적인 위기관리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

 

셋째는 원칙과 규범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다. 사회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는 서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을 정하는 것이다. 더불어 각 구성원들이 이러한 원칙과 규범을 준수할 것이 요구된다. 누군가 원칙을 무시하고 규범을 사소하게 위반할 때 나비효과는 발생한다. 온정주의와 조급증에 빠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원칙의 수립과 규범정립에 소홀했고, 그 결과는 비참했다. 이제부터라도 사회 각 분야의 원칙과 규범을 바로 세우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넷째는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직분에서 책임을 다하고 주어진 일에 사명감을 갖는 것이다. 한 개인이 스스로의 책임을 다했다면 세월호의 눈물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업무에 성심을 다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구차한 변명은 없다. 사회체계는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이며 복잡계이다. 시계 속의 작은 부품 하나의 오작동이나 고장 때문에 시계는 멈출 수밖에 없다. 우리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직분에서 성실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두른 탓일까. 아니면 서투른 탓일까. 처음 가보는 낯선 길. 지하철 하나가 방금 지나갔다. 줄지어 걷는 이들의 걸음걸이엔 조바심의 꽃이 피었고, 어떤 이들의 얼굴엔 아쉬운 한숨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은 늘 정해져있기 나름이다. 오늘도 930분까지는 도달해야한다. 조금만 빨리 걸었더라면 하는 작은 후회가 파동을 일으켰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쉬움을 머금은 동지가 많았다. 일단은 안심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군가의 눈길은 온갖 색으로 꾸며진 수험용 책을 놓지 않았고, 내손에도 그동안 정성들여 정리한 노트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어젯밤은 잠들기 힘들었다. 머릿속은 온통 시험관련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른 봄기운이 창문으로 배꼼 고개를 내밀었지만 상응할 여유가 없었다. 이른 봄꽃 향기에 취해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안 될 일이었다.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어렴풋한 꿈속에서 알람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소풍가는 날 아침과는 다른 기분, 그 당혹스러움이 세수하는 순간까지도 어깨위에서 나를 누르고 있었다. 잘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어쨌든 언덕 위를 오르는 경쟁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지만 희미한 미소만 서로 교환했을 뿐이다. 고시학원에서 제공하는 공짜 커피를 서둘러 입안에 흘려 넣고는 시험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빈자리가 적었다. 먹고살기 힘든 까닭이리라. 신성한 밥벌이를 위한 첫발걸음이 이리 어려울 줄 몰랐다. 부모님이나 선배들이 갔던 길은 왠지 순탄해 보였는데 시대를 잘못만난 것 일까. 심란한 마음에 변명이 제 구실을 찾고 있었다.

 

   손에 쥔 컵을 내려놓고 오전 과목을 정리한 노트를 펴고 빠르게 넘겼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시험 직전의 강박감을 해소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냉정해 보이는 시험감독관이 교실로 들어서는 순간 과민성 방광의 또 다른 압박이 있었다. 화장실에는 줄이 길에 늘어서 있었고,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책장은 넘어가고 있었다. 경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지. 알지 못할 짜릿함이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그래 반드시,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래 오늘 마지막 시험이 되게 하자. 거울속의 얼굴이 비장하게 웃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은 가능성의 시간이다. 무언가를 위한 종도 늘 울리기 마련이다. 다만 그 의미를 알고 가능성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가는 선택하는 자의 몫이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전자벨이 경쾌했다. 기분 좋은 시작이다. 네 과목 중 첫 과목 첫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지문이었고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어젯밤에 슬쩍 지나간 부분이긴 했지만 습관처럼 답을 골라낼 수 있었다. 아! 이런 통쾌함이란!!

 

   국어 과목은 예시문이 무척 길었지만, 평소 다양한 책을 섭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법정스님의 무소유’, 그리고 김사인의 시까지 출발이 순조로웠다. 문제에서 출제위원의 속내가 들여다보였고 답이 손을 들고 있었다. 날카롭게 보이던 시험감독관의 눈초리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내 기분때문이리라. 조용히 웃고 있는 나를 창문 밖 토요일의 봄이 바라보고 있었다

 

   헌법은 예상했던 대로 판례와 헌법 및 각종 법조문을 아는지를 시험하는 듯 했다. 내가 출제위원이라도 이러한 문제를 출제했으리라. 문제는 영어시험이었다. 과연 무슨 의도로 이렇게 긴 지문을 본문으로 만들었을까. 번민은 짧았다. 재빨리 문제부터 훑어보고는 다시 본문으로 다시 문제로 의외로 답을 골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영어시험의 가장 큰 난관인 문법문제가 이번에도 여러 개 눈에 보였다 개탄스러운 대한민국 영어시험의 현주소를 또 한 번 체험했다.

 

  종료 20분전을 알리는 방송이 정적을 깨트렸다. 누군가는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순조롭게 문제지를 넘기고 있었다. 시험 종료 10분 전의 태도가 다른 것은 서로에게 주어진 똑같은 시간을 계획하고 안배한 그 차이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수험생에게는.

 

   시험 종료 5분전에 답안지 기재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몇 문제 아리송하기는 했지만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백점을 목표로 시험장에 오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 않았던가. 단지 커트라인 안에 내 점수가 들어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오전은 수험전략과 선택, 시험시간의 집중이 모두 조화로웠다. 욕심을 버리니 타깃이 분명해보였다.

 

   집에서 정성껏 챙겨준 죽이 무슨 맛인지 모르게 점심시간이 흘러가고, 캔 커피의 달콤함이 100년만의 따뜻한 봄 날씨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막아주었다.

 

   오후 과목은 모두 법과목이었다. 평소 자신만만한 과목들이어서 시험시간 백분이 길게 느껴질 정도였다. 매 과목 지문이 거의 판례 위주로 출제되었고 대부분이 아는 판례의 결론이었다. 슬쩍 옆에서 열심인 수험생들의 눈길을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나와 같은 느낌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옆자리 수험생의 안경테가 유난히 빛나보였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은 나보다 더했겠지. 경쟁심과 동정심, 서로 어울리지 않은 궁합이지만 시험장에서는 서로 어울릴 수 있었다. 삶의 현장이 누군가의 말처럼 정글은 아니지 않은가. 짧은 한숨이 창문가를 맴돌고 있었다.

 

   시험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니 창문 밖 햇살이 손짓을 했다. 후련함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그리웠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의 얼굴이 맥주잔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래 오늘이 토요일이지. 누군가에게는 토요일은 행복한 주말이었지만 그동안 밥벌이를 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주중의 하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평범한, 지극히 일상적인 토요일을 즐겨보리라. 나중에 이런 수험생활이 그리울 날이 있겠지. 후회는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 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긴 시간 함께 했지만 오늘 같은 하루를 위해 그 날들을 잘 참고 즐겨왔기 때문이다.

 

   시험장을 나서면서 핸드폰 전원을 켰다. 문자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있었다. 부모님, 사랑하는 친구들로부터 고생했다는 격려의 문자였다. 아름답고 따뜻한 3월 오후 3시의 태양이 나를 위해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햇살 하나하나에 솜사탕을 매달고 나를 반기고 있었다. 흐뭇한 정적이 머무른 순간, 푸른 하늘 어디에선가 맑은 물방울이 비쳤고, 지하철역 입구가 흐려보였다. 혼자만의 여행, 내가 선택한 삶의 길, 카타르시스란 진정 이런 것이었던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첫 계단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계에서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그 무시무시한 등단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우리의 서정적 정서는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보급율 또한 최고이다 보니, 온라인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이도 넘쳐난다. 여기도 한명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쓴이가 자신의 내면을 내보이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스스로를 채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스스로가 판단할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당신이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갖고 글을 써야 할 것이오!“(류시화, 지구별여행자)

 

글을 쓰는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책속에서,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글감을 발굴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타인의 글을 읽다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이 있는가하면, 도통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미학적 기준에 충실한 분들의 글도 그렇다. 우리가 모르는 낯선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난해한 개념들로 채워진 글도 역시 그렇다. 글을 쓰는 이들이 모두를 이해하거나 경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체험이거나 체험적 지식일 필요는 있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 깊이 새겨진 진실한 경험이 아니라면, 그 것은 글로 쓸 가치도 없소. 머릿속에 한순간 스쳐지나가고 마는, 그래서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것들은 갖고 글을 쓴다면, 그 것이 어찌 다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소?”(류시화, 지구별여행자)

 

오늘날 특이하면서 생각이 좋은 작가(개인적인 생각에)인 류시화는, 마흔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인도 카르나타카 특급열차 안에서 만난 어느 노인과의 대화에서 진정한 작가수업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 깨달음은 류시화의 글과 말을 통해 타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나도 류시화의 독자로서 그 부분에서 강하게 무릎을 쳤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아직까지는 그렇다.

 

내가 쓰는 글의 최초의 독자는 바로 나다. 내가 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타인들의 시선에는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 글을 내보이는 이들이 가장 두려운 부분이다. 전업 작가가 아닐지라도 글쓴이의 의도가 자신의 언어로 나타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내 영혼의 기록들이다. 사람과 사물과 책과의 만남,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기억된 체험의 기록들이다. 한참 시간이 흘러가도 내 영혼의 기록은 잊히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진실 되게 내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적 기록만이 사실성과 독창성을 체득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그렇다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야흐로 표현과잉의 시대이다. 시각적 청각적 요소에다 다변, 능변의 소유자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이리라.

 

하지만, 그가 쏟아낸 말이 그 사람의 총체가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결정적 기준은 아니다. 오히려 말을 내뱉기 이전의 생각과 그 생각이 드러나는 행동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읽는다.

 

생각은 말로 표현하면 갇히고, 행동하면 풀려난다.”(칼릴지브란, 모래와 거품)

 

말로 나를 표현하려고 하다보면 진정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경중을 가리기 어렵다. 모래밭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찾는 것과 같다. 정리되지 않은 말은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피로한 대인관계를 만들고야 만다.

 

때때로 나를 위해서, 상대방을 위해서도 침묵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구체화시킬 필요가 없는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다. 침묵이 장애가 되지 않고, 대화의 수단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그를 친구라 부른다.

 

침묵은 기쁨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아침안개가 걷히고 처음 마주하는 꽃잎이 나를 말로 부르던가. 우리가 자연을 접할 때 그 어떤 소란이 장애가 되었던가. 소소한 일상에서 관조가 필요한 상황은 말이 필요치 않고 오로지 침묵만이 존재한다. 그러한 진지한 침묵만이 나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침묵이 깊어질수록 내가, 내 생각이 살아나고, 내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때는 침묵에서 비롯된 바로 그 시간이다.

 

우리는 절대적 침묵을 규율로 정하고 철저한 금식으로 명상을 수행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 약속한 침묵의 시간만큼은 외부의 모든 안테나를 꺼두어야 한다.

 

말의 유희보다는 침묵과 사색의 성찬을 즐기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