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관계의 한계는 접촉의 한계다.

 

접촉의 기회가 많을수록 관계의 폭은 넓고 깊다. 접촉은 어느 한 점이나 한 면에서 이루어진다. 당구공처럼 반드시 한 점에서 만나야하는 경우도 있고 찐빵처럼 오목볼록을 나누며 만나는 경우도 있다. 누구나 당구공 같은 접촉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선을 넘어선 접촉면을 가지길 원한다.

 

정이 개입되지 않은 업무상 만남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서로가 대면하기 때문에 한 점에서 접촉이 이루어지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애정을 전제로 한 가족 간의 관계에서는 접촉의 면적이나 시간이 중요하다.

 

 

#2.

엄마란 단어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결혼한 여성들에게 있어 친정엄마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엄마라는 숭고한 단어에도 상처의 이력이 담겨있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 이후에 시월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여성들도 많지만, 오히려 친정식구, 특히 친정엄마와의 불화로 고통을 받는 여성들도 많다. 피를 나눈 가족들 간의 인간관계에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만약 아내가 이렇다면 남편도 딱히 해결책은 없다.

 

친정엄마와 서먹서먹한 관계는 과거 경험의 산물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가정 내에서 부대끼는 시간이 적었다는 얘기다. 서로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나 공감할 수 있는 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은 부모 자식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 경제활동 때문에 아이들과 밥상머리 대화가 부족했던 많은 부모들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후회한다. 국과 찌개를 나누는 따뜻한 밥상의 대화가 생략된 부모자식의 관계는 한참 뒤에 기나긴 후유증을 남긴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상대방의 형편을 살필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던 까닭에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서로에게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공유할 대상이 없으면 공감도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야근과 술자리 때문에 아이와 대화가 없다면 아이의 미래는 나의 현재와 같다.

 

 

#3.

가족 간의 접촉도 아이가 스무 살 이전까지가 전부인 것 같다. 그 이후에는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한다. 결국에는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다시 재회하는 것은 일 년 동안 몇 번에 불과하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가족은 가족관계등록부나 명목상의 가족으로 남는다. 서로가 부대끼던 기억으로 그 이후의 삶을 살아나간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아이들이 십대일 때 부모와의 대화시간이 그 이후의 대화의 양과 질을 좌우한다. 우리 부모들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 시간의 중요성을 잊고 산다. 사실 대화하려고 해도 사춘기의 파도와 학원의 벽을 넘지 못한다. 까칠한 중2와의 대화는 철학자와 들뢰즈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밤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의 숲으로 빠져드는 것은 서로에게 고문에 가깝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아이와 잦은 접촉과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밥상과 책상, 거실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나누었던 대화가 뿌리를 내리면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된다. 추억거리가 쌓이면 올록볼록 찐빵 같은 접촉이 주는 따스함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그 공감을 통해 부모 세대의 착오를 반복하지 않는 바람직한 관계의 전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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