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호실의 추석

 

요양병원 308호실에 바람이 분다

오래된 창문이 활짝 열리고

먼지 쌓인 문턱위로 새로운 안부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색색 풍선이 기차처럼

케이크를 매달고 달리는

오늘처럼

북적여서 더 쓸쓸한

침상에, 마른 가지에

꽃망울 없는 꽃이 피어나고

어린 손자의 눈웃음은

잠든 그리움을 깨운다

사는 게 대체 뭐라고

아버지, 할아버지가 내 이름이었나

깜박거리는 형광등

칠순의 언어는 틀니처럼 서걱거리고

비밀번호는 이미 내 것이 아니다

해묵은 세월의 냄새는

기저귀 너머에 둥지를 틀고

영원히 마실 나간 침상은 또 대기 중

누가 나를 반겨할까

아! 아들, 딸 얼굴이 이랬던가

사진 속 얼굴은 바랜지 오랜데

새 옷 입은 그 아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

모든 게 낯선데

도대체, 나는 꿈꾸던 시인이 된 것일까

둥근달 아래 노랗게 세상이 물들고

탱자나무 옆에 개 짖던

살가운 추석은 어디 갔을까

궁금하다, 툇마루에 앉은 저녁달빛이

 

-------------------------------------------------- 

출근길에 늘 마주치는 할머니가 보입니다.

손주가 누워서 하늘을 바라다보았을 유모차에 폐지를 올려놓고 또 다른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을 하늘이라 어찌 푸른지....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닌듯합니다.

나이 듦을 피할 수 없고, 예고 없이 다가오는 질병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요양병원에 많은 부모님들이 누워계십니다. 추석 때 요양병원 앞에서 비추던 하늘빛도

오늘 아침처럼 푸른 얼굴이었습니다. 어린 고사리 같은 네 살배기 손주를 아버지는 여름 내내 기다렸을 것입니다. 육신은 침상에 매어있지만 그 눈빛만은 기다림만큼이나 간절해보였습니다.

 

어린 손자가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낯설기만 하고, 할아버지도 자신의 가족을 낯설어합니다. 추석인데도 세뱃돈을 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얼굴입니다. 크고 맑은 눈을 가진 네 살배기의 머리와 손을 자꾸 어루만집니다. 아이고, 내새끼, 내강아지 하면서.

 

오랜만에 방문한 아들, 딸의 얼굴이 눈에 익지 않은지 서먹해합니다. 오래전 기억속의 어린 아들, 딸의 얼굴을 되살린 것인지 눈길이 자꾸 허공을 맴돕니다. 머릿속 기억과 시점이 서로 맞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대낮인데도 창밖이 흐릿해집니다.

 

사물을 낯설게 보면 시인이 된다는데, 불편하기기만 한 이 상황에 어린아이처럼 누워있는 아버지는 시인이 된 것일까요?

 

308호실의 창문가에도 어김없이 추석 달빛은 내려앉습니다. 그 옛적에도 세상이 노랗게 물들 정도로 큰 보름달이 떠오르곤 했었죠. 올해처럼 커다란 슈퍼문이 그때에도 키 작은 탱자나무와 감나무에 고요를 물들게 했었지요. 달 밝은 밤에 툇마루에 앉아 사방에 내려앉은 달빛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합니다. 백구야, 백구야 백구를 부르면서.

 

아버지의 추석은 어디에 있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