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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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세계적인(?) 중국 작가 '위화'의 산문이다. 그가 아직 떡잎이었던 시절부터 매료되었던 작가와 음악 이야기들이다.

책을 읽다 보면 고전을 탐하게 되고, 고전문학을 가까이하다 보면 클래식 음악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 수순인가 보다.

'문학의 선율',이라 하고, '음악의 서술'이라 한다.

이 제목에 끌려 사둔지 1년도 넘은 책,,

이웃님 리뷰에 홀려서 당장 읽겠노라 했다.

문학도 음악처럼 선율이 있고

음악에도 문학처럼 서술이 있다. 엄청 공감하면서, 제목을 계속 읊조려본다.

- 정말로 짧은 서정에는 모든 거대한 선율과 격앙된 리듬을 덮을 능력이 있었다. 사실 문학의 서술도 마찬가지이다. 변화무쌍한 문장이나 단락 다음의 짧고 침착한 서술이 훨씬 강력한 전율을 가져올 수 있다. 242

처음 부분엔 그가 읽은 작품과 작가들이 나온다. '위화'에게 문학의 지속성과 광대함을 깨닫게 해준 작가와 작품들.

'윌리엄 포크너'

아직 입문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다음 책은 바로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이다.

- 이 기묘한 작가는 타인의 글쓰기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다. 그의 서술은 기교로 가득한 동시에 보이지 않게 은폐되어 있다. 27(윌리엄 포크너)

- 그는 시종일관 삶과 나란하고자 했고 문학이 삶보다 대단할 수 없음을 증명한 매우 드문 작가이다. 29 (윌리엄 포크너)

이 두 줄로 엄청 관심이 가는 작품이다.

작가와 다른 작가의 만남은 문학에서 가장 기묘한 경험이라고 하며 멕시코의 '후안 룰포'를 이야기한다.

그의 [빼드로 빼라모]는 누구도 '후안 룰포'처럼 계속 서술할 수 없는 책, 영원히 완성을 기다리지만 영원히 완성을 기다릴 수 없는 책, 그러면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활짝 열린 책이라고..

- 어떤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미 문학 속 글쓰기의 연속성으로 자리 잡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감정과 사상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여기에는 누가 이익을 얻는가의 문제도 없고 누가 가려지는가의 문제도 없다. 문학 속의 영향은 식물에게 쏟아지는 햇살 같다. 식물은 햇살을 필요로 하지만 스스로 햇살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식물의 방식으로 건장하게 자라나려 할 뿐이다. 33(후안 룰포)

위화는 자신의 20년 독서사에서

'할도르 락스네스'의 [청어]와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를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제시한다.

- 나는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게 끌려 들어간다. 겁 많은 어린애처럼 조심스럽게 그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시간의 강을 천천히 걸어간다. 따스하면서 온갖 감정이 뒤섞이는 여정이다. 그들은 나를 이끌어준 뒤 돌아갈 때는 혼자 가라며 등을 떠민다. 돌아온 뒤에야 나는 그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56

그리고 '체호프'의 [세 자매]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기다림을 비교하고

- 이 이야기와 체호프, 베게트 희곡의 공통점은 기다림의 모든 의의가 기다림의 실패에 있다는 것이다. 그 대가가 짧은 순간을 잃는 것이든 평생의 행복을 날리는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우리는 거의 모든 문학작품에서 기다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시로 자기 이미지를 바꾸어 가끔은 감동을 자아내는 주제가 되고 또 가끔은 한 단락의 서술, 특정한 동작, 혹은 어떠한 심리 변화, 세부 묘사나 시구가 되더라도 기다림은 문학 속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93

'단테'와 '마르셸 프루스트'를,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카프카'를

-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한한 부드러움의 상징이고 카프카는 극단적 날카로움의 상징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서술에서 응시를 통해 영혼과 사물의 거리를 단축시킨다면 카프카는 절단으로 그 거리를 넓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육체의 미궁이라면 카프카는 심리의 지옥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만개한 양귀비꽃처럼 혼곤한 잠으로 이끈다면 카프카는 혈관에 헤로인을 투입한 듯 강렬한 흥분을 일으킨다. 41

'스탕달'의 [적과 흑] 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비교한다. 가장 관심 깊게 봤던 대목이다.

- 윌리엄 포크너뿐만 아니라 누군들 서술의 광기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비할 수 있겠는가.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른 뒤 도스토옙스키는 20페이지를 할애하여 공포에 빠진 그의 상태를 강렬하게 묘사한다. 조금도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그 순간 가능한 모든 행동과 주변 반응을 세세히 그려낸다. 다른 작가라면 이럴 때 기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기교를 선택하는 대신 용감한 흑곰처럼 우직하게 전진한다. 137

- 도스토옙스키보다 서른여덟 살이 많은 스탕달은 신사, 그것도 프랑스 신사였다. 망망대해처럼 광대한 19세기 문학에서 도스토옙스키와 가장 비슷한 작가는 아마 스탕달일 것이다. 비록 두 사람의 스타일은 궁전과 감옥만큼 다르지만 유럽에서는 늘 역사적으로 궁전과 감옥을 같은 건물에 배치했으니, 도스토옙스키와 스탕달 역시 기이한 대칭을 이루더라도 유럽 문학에서 나란히 놓여도 될 듯싶다. 138

'세헤레 자데'의 [천일 야화]를 이야기하면서 서술의 요소를 강조한다. 이야기의 힘, 꼭 듣고 싶게 만드는 서술.. 이게 소설을 읽는 묘미라는 것.. 아는 사람만 알 터.

-[천일야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야기란 무엇이며, 이야기가 진행될 때 어떤 길이 펼쳐져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늘 서술에서 가장 빛나는 단락, 이를테면 뜻밖의 놀라움을 선사하거나 신묘한 매력으로 유혹하는 단락에 빠져든다. 그런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이런 화려한 글과 클라이맥스 및 결말의 글들이, 아름드리 거목도 작은 뿌리털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사실은 작고 담백한 디테일, 국왕의 손짓 같은 묘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110

문학의 음악적 요소,, 착착 감기는 단어, 어휘, 문장인데,, 대부분 번역본을 읽어야 하는 한계가 늘 아쉽다.

그가 들었던 음악가와 음악 이야기는 중간 이후부터 이어진다.

- 하지만 음악은 단숨에 사랑의 힘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달빛처럼, 혹은 폭풍우처럼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햇빛과 달빛을 받고 바람과 눈을 맞으며 다가오는 모든 사물을 맞아들여 그것들을 침잠시키고 소화시키는 드넓은 땅처럼 사람의 마음도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었다. 235

'쇼스타코 비치'를 이야기하면서 '너세니얼 호손'과 그의 [주홍글자]를 언급한다.

얼마 전 읽어서 그가 말하는 작가와 그의 감상평에 어느 정도 맞장구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미술 이야기도 나온다.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단스키',,

그가 말하는 색채, 특히 빨강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 칸단스키가 보기에는 거의 모든 색채가 음악 속 악기에 대응될 수 있었다. 그는 "파랑은 전형적인 천국의 색깔이며 거기에서 드러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은 평온이다. 파랑이 검정에 가까워지면 인간에게 없을 법한 비애를 드러내고, 하양으로 향하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진다"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파란색은 플루트, 짙은 파랑은 첼로, 더 짙은 파랑은 우레 같은 더블 베이스, 제일 짙은 파랑은 파이프 오르간에 해당한다고 단언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균등하게 섞인 녹색의 경우 칸단스키는 인상파를 계승해 특유의 안정과 평정의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초록에서 일단 노랑이나 파랑이 우세해지면 상응하는 활력을 동반하면서 내재된 영향력이 바뀌기 때문에, 칸단스키는 초록에 바이올린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순수한 초록은 바이올린의 조용한 중간 음색 같다"고 평했다. 또한 빨강은 제어할 수 없는 생기를 가졌다며, 노랑 같은 제멋대로의 영향력은 없어도 성숙하고 충분히 강력하다고 보았다. 칸단스키는 옅은 빨강과 중간 노랑이 힘과 열정, 과감함과 개선의 느낌을 비슷하게 준다며 트럼펫 소리 같다고 말했다. 또 날카로운 감각의 빨강인 주홍은 파랑을 만나면 냉각되지만 빛을 죽이는 검정을 만나면 깊이를 잃게 딘다며"주홍은 튜바 혹은 천둥 같은 북소리처럼 들린다"고 비유했다. 그리고 보라는 냉각된 빨강이므로 슬픔과 고통을 의미해 "잉글리시 호른이나 목관악기(바순 등)의 깊은 음색을 가진다"고 말했다. 346-347

-칸단스키는 색채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서 "색채의 조화는 영혼과 상응하는 떨림에 의지해야 하며 이는 내면의 목적을 따라 움직이는 원칙 중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칸단스키가 말한 '내면의 목적'에는 정신세계의 충동과 갈망뿐 아니라 실제 표현의 의미까지 포함됐다. 또한 칸단스키는 음악도 똑같이 영혼에 직접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속 시구를 인용하며 그처럼 영혼에 음악이 없는 사람들, 달콤하고 조화로운 음악을 듣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극악무도하고 간사한 사람이라고 과감하게 분류했다.칸단스키가 보기에 영혼은 모종의 그릇 같아서, 미술과 음악은 그곳에서 만나 비슷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서로를 받아들인 뒤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내는 듯했다. 혹은 영혼에게 색깔과 음향은 모두 내면의 감정이 확장될 때 필요한 길, 동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348-349

- 칸단스키는 색깔마다 따뜻하고 차가울 수 있지만 어떤 색깔의 온랭 간 대립도 빨강처럼 강렬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에너지와 강도가 얼마나 크든 빨강은 "자신을 태워 장엄한 성숙을 이룰 뿐 에너지를 바깥으로 많이 내보내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빨강은 냉혹하게 연소하는 열정이자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견고한 힘이다"라고 말했다. 그에 앞서 괴테도 진빨강에서 고도의 장엄함과 엄숙함을 발견하고 빨강은 다른 모든 색깔을 자기 안에서 통합시킨다고 보았다. 354

19세기 말, 급진적인 경향을 보였던 '리스트'와 '바그너' 이야기와

그와 대조를 보이며 보수적이고 내향적였던 '브람스'를 길게 언급한다.

사실, 나는 아무리 들어도 '브람스'는 잘 모르겠더란 말이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그의 작품들도 여러 번 언급되고 '슈테판 츠바이크'와 '헤밍웨이'도 등장하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는 한때 역사와 문학의 중간쯤 되는 전기 작품에 열중했는데 이런 작품에서도 자신의 성향을 명확히 드러낸다. 내 말은 이 오스트리아 작가가 역사학자처럼 실제로 있었던 역사 사건을 다루면서도 소설가답게 역사 속 사소한 부분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사소한 부분이 중대한 사건을 결정하고 인간의 운명과 역사의 방향을 정했다. 그래서 역사의 서술에서 그러한 디테일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여겼다. 그 스스로의 비유에 따르면 가끔 피뢰침의 뾰족한 부분에 우주의 모든 전기가 모이듯,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결정이 사실은 하루, 한 시간, 심지어 1분 만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세이에서 비잔틴 제국의 함락, 콘스탄티 노플의 함락은 오스만 튀르크인의 강력한 공세 때문이 아니라 케르카포르타라는 작은 문 때문으로 묘사된다. 112

- 헤밍웨이처럼 자신의 구조와 언어를 고스란히 드러내 강물을 들여다보듯 명료하게 만드는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와 동시에 헤밍웨이는 독자가 작품을 분석할 권리도 약화시키기 때문에 독자는 느끼고 추측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118-119

물론 처음 들어보는 작가와 작품들이 더 많아서 황당하지만,, 특히나 '후안 룰포'의 [빼드로 빼라모]는 리뷰들이 역시나 만만치 않고.

[이즈의 무희]로 만난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매료된 부분도 참 인상적였는데,, [설국]도 다시 한번 읽어야겠고, '히구치 이치요'의 [키재기]부터 기웃거려 본다.

- 나는 한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묘사, 가느다란 실로 연결해놓은 디테일에 매료되었다. 세세한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서술 속 시선은 얼마나 치밀한지 물건의 무늬 하나도 놓치지 않는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 데도 닿지 않는 듯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듯도 하고 떨어져 있는 듯도 한 묘사가 감각의 방식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눈빛과 내적 파동으로 사물을 어루만지지, 손으로 건드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디테일을 드러내는 한편 끊임없이 뭔가를 숨겼다. 숨겨진 것이 더 매력적인 법이라 독서 방향은 접근 불가의 상태에 가까워졌다. 뒤쪽에 신비한 공간이 있고 그 경계 없는 공간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 축소될 수도 있어서였다. 우리는 왜 독서를 마친 뒤 생각에 잠길까? 그 신비한 공간에 들어가 계속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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