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0년대를 빛내던 작가 '은희경'의 오랜만에 나온 소설이었다.

'김유경'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 40년 전에 여자대학 기숙사에서 만났고 한때 광고 회사의 출판부 상사이기도 했던 '김희진'이 있다.

자기 욕망에 적극적이고 사회생활의 수단이 좋았던 '김희진'이 소설가가 되었는데

인터뷰에서 그녀는 '고독과 가난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받은 모욕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었고 옛 친구들은 자신의 소설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소설 제목이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이다.

'김유경'은 실패한 결혼으로 인해 아르바이트를 근근이 하다가 '김희진'을 만났고, 그녀와의 인연이 우연히 이어지지만 절친이라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이다.

이야기는 지방 출신의 그녀들이 서울에 있는 여자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숙사에 모여들어 지내게 된 1977년도와

'김유경'이 '김희진'의 소설을 읽게 되는 2017년의 이야기이다. 그 소설은 여대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연애 소설이자, 성장소설쯤 된다고 한다.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으면서 읽게 된 그 책 속의 '유경' 자신과 지방 출신의 여대생들에 대한 기억과

'희진'이 써 내려간 공주들은 너무 달랐음을 깨달으며 '유경'은 그녀들의 1977년을 소환해 낸다.

시대는 여자들이 대학생이 되는 것도

대학을 나온 여자들이 취업을 하는 것도 많은 제약이 따르던 사회였겠으므로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런 시대에서 멀지 않은 40년이란 시간을 가늠해보면서 읽게 된다.

숙명여대에 다니는 그녀들이 주로 만나는 남학생들은 연세대와 서울대의 학생들인데 그들은 긴급조치 등 시국과 연애에 관심이,

그녀들은 오로지 연애와 좋은 결혼에만 관심이 있는 듯이 그려지지만,

가족과 사회가 여자 대학생들에 거는 기대가 현모양처일 뿐인 것이 시대적인 한계이다.

'김유경'은 말더듬이였다. 웅변학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교정을 하지만, 여전히 당황하면 말문을 못 열고

각 지방에서 올라온 여자 대학생들은 저마다의 개성들이 섞여 서울스럽고, 대학생스러운 것들을 익혀 나간다.

20년 전부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희진'의 언저리를 맴도는 '유경'은 그 시절 룸메이트를 비롯한 기숙사생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내며 자신의 어설프고 아픈 첫사랑까지도 왜곡되고 희화하한 '희진'의 소설과 '희진'의 편집된 기억에 대해 유감이 있다.

'김희진'은 독신녀로 살면서 소설을 쓰지만

유부남과 교제를 하고 있고, 전에 광고 회사에서도 인사권을 쥔 유부남 간부와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되어 회사를 그만둔 배경도 있다.

그녀는 소설 속 공주라 칭한 그녀들을 맘대로 과장하고 희화했다.

설 속 그녀들이 한결같이 허세와 모순이 넘쳐나는 캐릭터들이라면 그녀들을 관찰하는 주인공 '희진'만은 그 모든 상황들을 통찰하는 식견을 지닌 성숙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유경'의 기억 속, '희진'은 분명 다르다. 기숙사에 들어왔던 시위 전력 있는 남학생의 탈출을 도와줬던 사건과 연루되었던 여학생들 몇몇을 사감에게 일러바친 것도 '희진'이었던 것이다.

미팅에서 다른 여학생의 파트너였던 '브론스키'와 우연한 조우 끝 만남을 이어가던 '유경'에게 유학파 부모를 둔, 서울 태생 '오지은'이, 자신이 가지긴 싫고 놓쳐아주자니 아까운 '한승우'를 소개해 , 그와 교제를 이어갔으나, 또 그를 질투하던 '오지은'의 장난으로 아프게 아프게 관계가 끝나면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다시 '브론스키'와 만남을 이어가는데,

'브론스키'는 '유경'이 자신에게 '의외성과 특별함과 격정을 원했느냐'고 편지로 묻는다. 자신에게는 그것이 없다면서 이별을 고하고 두 번의 실연으로 '유경'은 성장한다.

'유경'이 '희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환한 과거는 빛나던 시간이었다. 빛의 이면은 그림자이다. 왜곡하고 편집해도 빛과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고, 아프고 어둡고 시리다고 덮으려 애쓰는 자도 자신에게 맞게 편집하여 각색하는 자도 있게 마련이겠지..

 나에게 그날은 그런 것들로 기억된다. 기울고 스러져갈 청춘이 한순간 머물렀던 날카로운 환한 빛으로.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 가까이에서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지만 끝내는 만져보지 못한 빛이었다. 339

 

'진'의 소설 속 마지막 부분이다. 그녀가 소환한 5월의 어느 날 k 공주의 결혼식을 마치고 그녀가 둘러보는 정경.. 이미 기울고 스러져 버린 청춘과 과거, 그 환하고 날카로운 빛은 그 한가운데 있던 그 시절에도 끝내 만져보지 못한 빛이라고..

'희진'은 인간들이란 자기를 주인공으로 편집해서 기억한다고 한다.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외로워서라며, 그래서 나를 주인공으로 편집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우겨서 내 편을 많이 만들려고 쓴다고 한다.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 봤냐고..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영국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319-3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