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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평점 :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이런 글이고, 나의 취향에 저격인 류는 이런 류이다. 간결하고, 멋부리지 않았지만, 멋드러진 문체ᆢ하룻밤 읽을 분량을 아깝다 미루며 본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
제목이 주는 현실적인 뉘앙스의 '마돈나'는 섹시 심벌의 가수 '마돈나'를 떠올리게 했고, 모피코트가 주는 세속적인 이미지가, 이 책을 추천해준 이웃들의 짧지만 강렬한 언급을 의심케 했으나 역시 믿기를 잘했다.
첫 페이지부터 단숨에 빠져들게 된다.
터키 문학은 '오르한 파묵'으로 열었다. 1941년도부터 1942년까지 연재되고 1943년 단행본이 출판되었을 때도 별 관심을 못 받았던 이 책이 70년을 묵히고 난 후, 2013년에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는 등, '오르한 파묵'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는데, 사회주의자였던 이 책의 저자 '사바하틴 알리'는 그 나라 그 사회에서, 반항의 상징이었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을 발표한 후 5년 만에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 책을 영화화한다는 언급도 책의 뒷부분에 있는데, '마리옹 꼬띠아르'가 주연한다고도 한다.
이 책의 화자 '라심', 그는 자기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라이프 에펜디'를,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면서, 전혀 특별하지도 않고, 오히려 너무도 평범한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은행 말단 직원이었던 '라심'이 이유도 모른 채 짤린 이후 구직활동을 벌이다 어렵사리 친구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한 사무실을 쓰게 된 남자가 '라이프'이다. 독일어 번역 담당자인 '라이프'는 그 회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원이며, 대가족을 부양한다는 사람으로 매우 성실하고, 좀처럼 흥분할 줄 모르지만, 감기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어서 이따금 결근을 하는데, 그의 집에 번역할 원고를 가져다주게 되는 일이 '라심'에게 주어지고 '라이프'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의 가족들의 무례함과 뻔뻔스러운 모습에 당황한다.
아내와 두 딸, 처제와 동서, 조카들, 그리고 처남들까지 함께 지내는 '라이프'는 박봉으로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라심'에게 비친 그의 가족들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는 것으로 내면의 공허를 채우는 사람들 같다.
하지만 '라이프'는 끔찍한 침묵으로 회사와 집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걸 순종하고 견디며 건강에 노심초사해서 양모 내복에 옷을 겹겹이 껴입고 지내지만, 황폐한 성격이 드러나는 날이 있는데, 그런 다음날엔 꼭 병이 도지고 결근을 한다.
그러다가 회복되고, 출근하고를 반복하던 어느 날에는 병이 위중해져서 결근이 길어지고, 그 집으로 향한 '라심'은 '라이프'의 부탁으로 그의 회사 책상 서랍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해서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 서랍에 있던 '라이프'의 비망록을, 난로에 던져 버리겠다던 그에게 부탁해서 읽게 된다.
비망록은 1933년 6월 20일부터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서로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가 감춰둔 영혼, 질서정연하든 뒤죽박죽이든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고 가장 단순해 보이는 사람도 경이로운 내면을 품을 수 있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고뇌에 찬 영혼의 소유자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미적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는 듯 사람이라는 피조물을 이해하고 판단 내리는 걸까? 왜 우리는 처음 본 치즈의 특성을 말할 때는 주저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단박에 결론짓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걸까? 57-58
세상사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사람이 억지로 웃는 것만큼 슬픈 것은 없었다. 123
이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광경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축축한 공기가 얼마나 신선하던지! 살아가는 것, 자연의 지극히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삶을 바라보는 것, 누구보다도 기운차게, 매 순간을 일평생처럼 충만하게 채우며 삶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특히 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그녀를 기다리는 것... 세상에 이보다 행복한 게 있을까? 이제 우리는 촉촉하게 젖은 길을 함께 걸을 것이다. 한적하고 어둑한 곳을 찾아 앉을 것이다. 서로 눈을 맞추며 많은 것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들을 얘기할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들이 또 순식간에 다음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추위에 발갛게 언 손가락을 비비며 따스하게 해줄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그녀와 가까워질 터다. 153-154
인생의 참맛은 고독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결혼은 거짓 위에 쌓아올리는 허상이에요. 사람들은 일정한 정도까지만 가까워질 수 있고, 그 이상은 가식이라고요. 어느 날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알아차리면 절망에 빠져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망가지요. 하지만 환상과 착각에서 벗어나, 아쉽더라도 적당한 정도에서 만족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자연스러운 걸 받아들이면 절망에 고통받는 이도, 운명을 저주하는 이도 없을 테지요. 우리가 처한 환경을 가여워할 권리는 있지만 동정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에요.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건 그 사람보다 강하다고 여기는 건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가련하다고 여길 권한도 없어요. 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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