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리크라는 이 신비한 작가는 그 글에 빠져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그러나 빠져보면 그 강렬함을 거부할 수 없음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까..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ㅎㅎ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독일문학은 이 천재적인 작가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한다. 특이하기도 한 그만의 개성은 황당하게 여겨지기도 하는데 혀를 내두르게 되는 통찰이 있다.

뭔가 남들과 한참 다른 삶을 살고,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 같은 이 사람.. 향수를 제외하고는 너무도 짧고, 경쾌하고 엉뚱한 소재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일종의 촌철살인의 향연이라고나 할까. 암튼 대체 불가한 그의 세계, 그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알면알수록 그를 연민한다.

[깊이에의 강요] - 젊은 여류 화가가 자신의 전시회에서 어떤 평론가로부터 "당신은 재능이 있고, 호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깊이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 내용이 신문에 실린다.

그녀는 깊이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반추하고 좌절하느라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심지어 일상생활의 유지도 못하며 영락의 길을 걷다가 파멸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자살에 이른다.

그리고 그 평론가는 다시 이런 내용을 쓴다.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이미 그녀의 작품들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며, 깊이에의 강요를 언급한다.

결국 그는 깊이 없는 손놀림과 말 한마디로 재능 있는 예술가를 파멸시킨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함부로 쓰지 말 것, 함부로 말하지 말 것, 깊이 없이 던지는 말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교훈.. 리뷰도 댓글도 되새겨 보아야 할것같네..

[승부]- 체스를 두는 이야기이다. 70세의 체스 고수 '장'에게 도전한 낯선 젊은 남자를 이미 '장'에게 수도 없이 패배해와서 복수심 가득한 체스를 두는 관중들이 두 사람의 게임을 보느라 에워싸고 있다.

고수 '장'은 꾀죄죄한 몰골이지만 그간의 체스판에서 번번이 상대방을 지게 하고, 지치게 하고, 분개하게 하여 증오심을 품게 했던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도전자는 젊고 말쑥한 옷차림의 낯선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한 패배의 앙갚음을 이 도전자가 해주기를 바란다.

도전자는 과감하고 모험적이며 독창적으로 체스를 둔다. 자기의 손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대담하여 고수 '장'은 긴장하고 더 소심하게 방어를 한다. 그가 정석대로만 두려 하고 진을 빼는 진부한 수법을 쓴다고 군중들이 야유를 하기도 한다.

내심 도전자의 위력적인 공격을 보고 싶어 하고, 그의 승리로 늙은 고수가 바닥에 꼬꾸라지는 장면을 보고자 기다리던 사람들의 기대에 안 맞게 도전자는 알 수도 없는 수를 쓰다 결국 패배를 하는데, 무례하게도 자신의 킹을 쓰러뜨려 버리고는 가버린다.

고수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지만 가장 졸렬한 체스를 두었다고 생각한다. 흐트러진 말들을 주워 담으며 방금 둔 체스의 수 하나하나와 상황들을 머릿속에서 더듬어보며 알고 보면 형편없는 수준의 도전자였는데, 평소와 다르게 상대의 약점을 전혀 탐지해 낼 수 없었음을 인정한다.

젊은이의 자신감, 후광은 자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고, 본인도 도전자에게 감탄을 했으며 내심 자신도 체스 고수라는 부담스러운 자리를 내어주고 싶었노라고.. 그리하여 악의와 시기심 넘치는 군상들에게 만족을 안기고 평온을 찾길 바랐다고..

가장 하찮은 풋내기에 무릎을 꿇었고, 두는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낮추었다고..

그리하여 그의 승리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결국엔 패배한 것이라고, '장'은 체스를 영영 그만두겠다고 결심한다.

체스를 전혀 모르는데도 그의 관찰력과 묘사가 어찌나 뛰어난지 숨이 막혀 온다. 독보적인 그의 글쓰기에 감탄했던 작품이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 - 미래의 미지의 독자에게 쓰는 금세공사의 유서이다. 의사들은 그의 병을 위장 마비라고 진단하는데, 그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의 금세공사가 되어 성공을 하고 돈도 많이 벌지만 유력인사들과 교류를 하면서 지식의 습득에 탐닉한다. 그리고 60세가 되기 전에 모든 사업을 접고 지방에 저택을 지은 후 정원을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그런데 응접실 앞에 정원사가 심은 장미가 자라지 못하고 죽자, 화단을 갈아엎어 테라스를 만들고자 직접 삽을 들고 나선다. 그러나 돌에 부딪치고, 돌을 파내다가 돌조개를 발견한다. 그리고 온천지에 조개, 조개 암석, 조개 모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지구의 조개 화가 급속도로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달도 조개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하고, 우주의 조개화도 이야기하다가 인간 육신의 조개화도 이야기한다.

이런 황당한 가설을 뒷받침하고자 인간이 잉태된 순간은 점액질이었지만 자궁에서 자라는 과정에서 앙금이 형성되고 인간이 화석 화가 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피부가 거칠어지고, 머리카락이 갈라지고, 심장, 두뇌의 석회화와 등이 꼬부라진다고 한다. 그리고 조개의 내적 구조를 좇아 인간의 육체가 안으로 구부러지고 휘게 된다고도 한다. 결국은 조개 병이라고 한다.

자신의 죽음은 끝이 있어서 마음이 가볍다고, 그대들은 아직 한가운데 있으므로 불쌍하다며 유서를 접는다.

황당한 내용이지만, 인간의 몸에 석회질이 쌓여 가는 것은 맞다.

결국은 노화도 죽음도 석회화, 조개화 인가? ㅎㅎ 진짜 기발난 상상력이다.

[문학적 건망증]- 이것은 에세이이다. 어떤 책이 자신에게 감명을 주고 아로새겨 졌는지, 어떤 책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는냐는 질문에 자신의 서재를 돌아보다가 무심히 집은 책에서 앞서 읽은 이의 밑줄 친 부분과 낙서가 자신이 생각과 일치함을 보면서 정서적 연대감을 품는다.

그러다가 그 낙서가 자신의 것이었음을 깨닫고 어차피 잊어버릴 것을 왜 읽는가? 왜 다시 읽는가? 어차피 죽을 것을 왜 사는가?라는 회의까지 품는다.

모든 서가의 책들을 한때 열렬히 읽었고 나름의 감명을 주었음에도 저자도, 존재도 잊혔음에, 심지어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결말에 이르기도 전에 처음을 잊어버리기도 한다며..

그래서 우리가 블로그를 하는 겁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님^^~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 못 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이 넋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92-93



- 이 무서운 건망증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나는 생각한다. 있는 힘을 다해 레테의 물살을 버티어 내야 한다.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아야 한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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