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을 걷는 시간 - 천년을 잠들어 있던 신라의 왕궁 소설가 김별아 경주 월성을 가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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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천년 왕성은 월성이라고 한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약 830년 동안 신라의 궁성이었다. 신라의 왕들 중 50명의 왕이 살았던 곳이자 통피의 정철이었으며 왕조 국가 신라의 중심이었다. 경주를 찾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첨성대와 불국사와 석굴암은 알아도 월성은 모른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월성은 너무나 낯선 이름이다. 월성보다는 경주가 친숙하고 다들 경주로 여행을 간다. <월성을 걷는 시간>을 읽으면서 첫 경주 여행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경주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친구들과 단체로 가는 여행이라 빠질 수도 없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경주의 여행의 설렘이나 기대는 없었지만 가을 경주는 자전거 타기엔 최적의 장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행을 주도적으로 이끌기보다 친구들이 가자는 대로 이끌려 다녔고 사람이 많아 자전거로 이동하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며 느끼는 가을의 경주는 최고였다. 그 뒤에도 각 계절의 경주를 여행했고 여전히 경주는 좋은 여행지라고 생각한다. 월성은 오래전에 불타고 침식해 사라졌지만 월성을 노래한 문학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 정몽주의 '포은집'에 실린 '첨성대'라는 시에 '첨성대는 반월성에 우뚝 서 있고'라는 구절이 있다. 이외에도 문학 속에 남은 월성은 흰 재와 검은 그을음이 폐허뿐이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신라는 까마득한 과거로 밀려난 것이다.

                            

2017년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 현장에서 발굴 조사를 하던 중 '성벽 밑에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을 발견한다.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저부 성토층에서 출구된 두 구의 인골이었다. 두 인골 모두 성인이고 외상의 흔적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형태였다고 한다. 발치에는 흙으로 만든 항아리 세 개와 손잡이가 달린 컵이 놓여 있었다. 방사선 탄소 연대를 측정하니 50대의 남녀 인골임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인골로 인주 설화로만 전해오던 풍습의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게 된다.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사람을 물속이나 흙 속에 파묻어 사람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거대한 토목 공사인 성 쌓기, 둑 쌓기, 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줏돌 아래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삼국 시대부터 안정적인 농경 생활을 했던 신라의 식문화는 조리 기구나 시설의 발달로 변화된 조리 방법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밥상의 구성 면에서 현재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짐작한다. 콩 잎이나 가죽나무 잎, 더덕, 도라지, 무, 전복 등 뭐든 장아찌감으로 치는 경상도의 식문화는 월성의 맛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달밤'이라는 말이 있다. 경주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밤을 배경으로 한 행사도 많고 야경도 추천한다. 현재는 동궁이 월성보다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일찍이 발굴 조사를 끝내고 복원한 동궁과 월지는 낫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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