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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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그 사람들을 증오하는 건, 네 증오를 모두 고스란히 돌려받으려는 거야. 네가 품은 증오여도 그 증오는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바뀌려면 시간이 흘러야 해.


우리 엄마도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어린 시절 이름이 '요시코'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일본 사람들을 오랫동안 싫어했고, 당연히 증오해야 한다고 배웠다. 또한 북한 사람은 피부가 빨개서 빨갱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일본 사람과 빨갱이는 이유도 모르고 어린 나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유관순 언니의 대한독립 만세와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그냥 자연스럽게 미워해야 할 대상자들을 정해 주었다. 교실 칠판 위에 양쪽으로 붙어 있던 태극기와 대통령 사진이 사라지자 매우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증오가 왜 나의 증오가 아닌 줄 이제는 안다. 엄마의 증오와 경험이 그저 나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증오라는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에서 인숙은 시어머니 후란에게 받았던 고통을 며느리인 제니에게 대물림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인 인숙이 며느리인 제니를 딸처럼 대하며 아들보다 더 잘 챙겨 먹이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한 건 나에게 진정한 해방의 감정이 느껴져서가 아니었을까? 미움과 증오는 구속이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란 이렇게 고정관념으로부터 세대를 거치며 해방되어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주인공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강아지 토토의 시점으로도 이야기하는 부분과 인숙의 시어머니 후란의 사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화자의 말투가 바뀐다고 나처럼 당황하지 말고 누가 말하는 중인지 생각하며 읽길 바란다. 


나는 굳이 4장이나 연도 별로 나누어 이 책을 읽기보다는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읽는 게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다. 이 책은 인숙의 아버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대전 교도소의 교도관도 이야기한다. 아무 죄도 없이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뛰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오해 받아 총살당한 요한 이야기가 황당했다. 사람의 목숨이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니...


이런 한국이 싫어서 였을까? 인숙과 결혼한 성호는 미국으로 자유를 찾아 떠난다. 그리고 임신한 인숙과 시어머니 후란도 뒤따라 간다. 나는 모두가 아픔을 공유하기에 이 책에서 주인공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손꼽으라면 인숙을 주인공이라고 하고 싶다. 


인숙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비원'이라는 한국식 중식당에서 일했지만 화재로 슈퍼마켓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때 알게 된 로버트와 강아지 토토 이야기가 나온다. 헨리의 엄마 인숙이 나이가 들어 죽은 강아지 토토에게 우리 아들을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하는 부분에서 나도 우리 집 강아지에게 나보다 우리 아들을 더 많이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같은 마음을 전했다. 


인숙은 시어머니와의 방 문제로 남편 성호와 다투다 유산을 한다. 그리고 시어머니 후란이 죽자, 인숙은 후란과 성호와 보냈던 시간이 그저 악몽에 불과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한다. 


어쩌면 시월드에 시달리는 이 땅의 모든 며느리들이 그렇지 않을까? 우리나라 며느리들에게만 화병이라는 게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 화병은 인숙이 그랬듯 더이상 대물림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해방자들이니까. 적어도 내가 당했던 것을 되물림(X) 대물림(O) 하는 일은 없는. 


1945년 마이즈루 항구, 우키시마호 이야기. 로버트의 어머니는 18세에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 이름인 고일을 자기 이름으로 삼았다. 한국인 강제 노역의 증거인 우키시마호는 한국인 노동자들을 1만 명 이상 태우고 폭발해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몇몇의 사람들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때 건물 주인이 무너지기 전에 도망가는 걸 봤다고 한다. 그런데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던 며느리한테는 알려주지도 않고 건물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 며느리가 살아남았어도 과연 다시 그 집과 얽히고 싶었을까. 


2000년이 되었다. 시어머니 후란은 4년 전에 죽었고, 인숙은 임신한 헨리의 여자친구 제니를 먹이는 일에서 위안을 얻는다. 마치 심장이 숟가락 모양으로 변하는 것 같다면서. 자신이 시어머니에게 받고 싶었던 것을 며느리 제니에게 아낌없이 해준다. 제니는 인숙에게 환한 빛을 내뿜었다고. 진정한 평화의 빛, 해방이다.


이 책 98쪽을 보면 88올림픽 때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이 성화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통구이가 되었을 거라는 묘사가 나온다. 찾아보니 괴담일 뿐 실제로는 다 날아가서 죽은 비둘기는 없었다고 한다. 


책 표지에는 순 백의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들이 불속을 날아오르고 있다. 저자는 갑자기 성화가 점화되었어도 자유롭게 날아간 비둘기들을 보며 세계에 진정한 해방인 자유로운 평화가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이 아픈 소설과 같은 역사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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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말아요, 이별도 당신을 떠날 거예요
이승재 지음 / 좋은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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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러지면 안 되는지, 절망하면서 왜 버텨야 하는지, 엉망인 마음은 무엇을 위해 감추어야 하는지,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데, 왜 사람만 저항하며 슬퍼하는지, 이러한 질문들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시집은 이별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슬프다. 이별이 기쁜 것은 어딜 가나 꼭 있는 진상과의 이별밖에 없는 것 같다. 가장 슬펐던 소재는 취객 세 명이 고양이를 몰아넣고 밤새 돌을 던져 죽인 것과 예니세이 강물에 몸을 던진 딸의 시체를 찾아 강가를 떠돌다 얼어 죽은 엄마 이야기였다. 


떠나간 존재에 대하여

시베리아의 겨울이 그렇게

신이 없는 곳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p.121)


책 표지에 보면 고양이와 소녀가 잠을 자고 있다. 죽음이란, 이별이란 어쩌면 이렇게 깨지 않을 행복한 꿈을 꾸는 게 아닐까? 듣기만 해도 마음 아픈 끔찍한 죽음들도 모두 다 이제는 행복한 꿈만 꾸었으면 좋겠다.


잊지 않을게

반짝이는 별이 된 너의 짧은 여행

(p.99)


하늘은 은하수로 우는 아이를 덮어주었어

아이는 그날이 처음 자신을 위해 울던 날이었대

올빼미 한 마리가 같이 울어주었어

먹을 것을 주면 대신 울어주던 작은 아이 곡비

곡비는 행복하게 먼 길을 떠났어

누군가 날 위해 울어주네 하면서

이제 그 어디에도 이별이 남아있지 않아

(p.128)

 

이 시집은 시간 순서로는 3부에서 2부, 2부에서 1부로 쓰였다. 순열을 벗어난 숫자처럼 사람들은 잠시 눈을 감고 뒤돌아보며 살지 않을까. 그러나 시를 잘 모르는 내가 시인의 깊은 속을 헤아려 시간 순서를 생각해 가면서 작품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해까지는 못 했지만 이렇게 짧은 말들에 아프다가 분노했다가 위안이 되었다가 슬퍼졌다가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런 게 시(詩) 인가 보다. 


뒤돌아본 삶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건 아마 당신에게도 저항해 보지 못한 슬픔이 있어서이다. 


나도 엄마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정든 강아지와도 이별했다. 강아지는 아직도 내 블로그에서 살아있는 것 같아서 사진을 바꾸지 못한다.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슬픔에는 저항할 수 있다. 괜찮다고 행복할 거라고 위로가 되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하지만 시인이 말한다. 슬픔을 받아들이라고. 슬퍼해도 괜찮다고. 


폭염 속에서 부는 바람은 숨이 막혔다. 그런데 요즘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선사해 줄 수 없는 맑은 공기까지 가져다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시원한 바람이 그동안 더위 속에 지쳐버린 나를 위로해 주듯 이 시집 역시 그동안 꽁꽁 묵어 둔, 아팠던 이별 보따리를 풀게 만들었다.


사실 난 괜찮은 적이 없었던 거야 (p.116)


이별하지 말아야 할 연과 헤어졌다면 언젠가 그 이별과도 헤어지겠지. 그렇게 당신의 슬픔도 지나가기를 바랐다는 시인의 말이 따듯하다. 아팠던 이별과도 헤어지면 나 역시 지구별 여행의 마지막 이별을 하고 남는 이들에게 이별도 떠나간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이별마저 떠나간 자리에 위로만이 가득하길 바라며.


이별이 있었기에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 슬픔과 아픔이 있었기에 평범한 일상이 귀한 줄 안다. 


이승재 시인님의 시집 덕분에 한경애의 <옛 시인의 노래>라는 시 같은 옛 노래를 들으며 나도 오랜만에 시인의 가슴이 되어 보았다. 


'먼지가 되어도 나무는 널 기다릴게(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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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이슨 벨을 죽였나 -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 3 여고생 핍 시리즈
홀리 잭슨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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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핍은 매일매일 자신과 엄마를 선택한 아빠에게 감사할 것이다. 호기심 어린 조쉬의 궁금증은 뭐가 됐든 다 대답해 줄 것이다. 친구들에게 이해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늘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1, 2권을 먼저 읽고 보면 훨씬 재밌게 볼 수 있다. 3 권부터 읽으니 그전 내용을 몰라서 갑갑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부분들을 이해하려고  여기저기 검색한 시간이면 앞에 있는 두 권을 다 읽고도 남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재밌다. 드라마는 날 새고 정주행 해봤어도 책을 정주행하기는 처음이다. 졸린데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뒷부분을 다시 읽었다는. 


나는 1권은 넷플로 보고, 2권은 서평을 읽고 줄거리를 파악한 다음 이 책 3권만 읽었다. 앞의 내용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오면 무슨 일이 있었나 검색했는데, 결국 못 찾고 모르는 채 읽었다. 영국의 리틀 킬턴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이 책의 주인공 의 본명은 핍 피츠 아모비(Pip Fitz-Amobi)다. 남자친구는 샐싱의 동생 라비 싱(Ravi Singh)이다. 


1권에서는 앤디벨(Andie Bell)이 그녀의 남자친구 샐싱(Sal Singh)에게 살해당하고 샐싱은 자살한 사건을, 2권에서는 앤디벨과 샐싱의 추모식에서 사라진 핍의 친구 형인 제이미 레이놀즈(Jamie Reynolds) 사건을 다룬다. 3권은 주인공 핍이 납치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왜 제목은 <누가 제이슨 벨를 죽였을까>일까? 누가 죽였는지 내가 너무 궁금해가지고 정신없이 읽어서 그건 밝히지 않겠다. 


핍이 납치되는 순간부터 가슴이 콩콩 뛰고 긴박감이 장난이 아니다. 이런 느낌을 서스펜스라고 한다. 검색해 봤다. 원래 주인공은 안 죽으니까 2부에서 탈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맞다. 탈출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 이후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헉!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이 책의 첫 장면은 강간범 맥스와의 조정 장면이다. 엇?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맥스의 변호사는 핍이 운영하는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AGGGTM)'이라는 팟캐스트 때문에 취직도 못하고 있다고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돈으로 풀려난 맥스가 왜 강간범이었는지 앞의 이야기를 모르니 핍이 극대노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외국에도 있네 싶다. 저자는 감사의 말 끝에 '트루 크라임' 트렌드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쓴 이상, 우리 형사사법 시스템과 이 시스템에 대한 아쉬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영국의 강간 및 성폭력 건수와 신고 및 유죄판결 비율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라면서.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하다는 말이다. 이때, 강간범과는 타협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핍의 모습과 뒷부분의 이야기가 매우 대조적이다.  


다음은 DT 살인범에게 스토킹 당하는 핍의 이야기가 나온다. DT는 덕 테이프(duct tape, 박스테이프)의 약자. 덕 테이프로 얼굴을 칭칭 감아 죽이고 파란 줄로 목을 매달아 놓아서 붙은 별명이다. 그 살인범이 이제까지 해왔던 살인 예고 패턴들이 핍에게도 똑같이 재현된다. 


핍은 몇 달째 웹사이트를 통해 보내오는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네가 사라지면 누가 널 찾지(Who will look for you when you’re the one who disappears)?" 그리고 이 익명의 메시지에 추신까지 있었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DT 살인범의 경고임을 알리는 말임을 알게 되고 발신번호 추적 앱을 깐다. 


머리 없는 막대 인간 5명의 그림이 벽과 도로에 아이들 낙서처럼 분필로 그려져 있다. 문 앞에는 머리가 잘린 비둘기 시체가 있다.  아무 말 없는 전화는 핍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약 없이는 잠도 못 자고 핍은 극도의 공포에 시달린다. 


이런 복선들을 저자의 안내대로 쭈욱 따라갔는데 갑자기 핍이 DT 살인마에게 납치된다! 


이 책의 색깔은 회색이다. 비난할 수도 잘했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이유는 책장을 덮으면 느껴진다. 


이 책의 원제인 As good as dead는 죽은 것만큼 좋다는 해석이 이상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죽은 듯이다. 굿 good 이란 말을 보며 죽은 것과 죽은 듯이 사는 것은 어느 게 나을까 생각해 보았다. 최근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라는 드라마를 봤다. 경찰이 살인범을 죽인 젊은이를 찾아가,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한다는 의미의 말을 넌지시 하면서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삶에서 그 젊은이를 해방시켜 주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경찰관의 판단을 지지한다. 이 책을 다 읽은 여러분의 핍에 대한 판단은? 


전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권 :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A Good Girl's Guide To Murder) 

2권 : 굿 걸, 배드 블러드(Good Girl, Bad 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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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회고록을 두 번 쓸지도 모른다
노정호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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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수많은 지식 중 극히 일부이다.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지식에 왜라는 의문을 갖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자.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스승이다. 지혜는 생활 속에서 나온다.


이 책은, 가진 것은 시각장애뿐, 학벌도 부모의 도움도 없이 성공한 저자의 성공담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스승으로 삼았다. 그리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포기보다는 도전을 택한 파란만장한 성공 스토리가 펼쳐진다.


초등학교 때는 그냥 눈이 나빠진 줄 알았는데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망막 색소 변성증'이라는 병이 시작되었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병인데 세포 변이로 인해서 눈이 기능을 상실하고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불치병이라고 한다. 


눈이 잘 안 보여 공부도 계속할 수 없고, 집안 환경도 어려워진 저자는 한의원에서 일을 도와주면 고등학교에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한의원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고등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밑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대문 시장에서 타월 도매상을 운영하는 사장님 집에서 숙식하면서 사장님 딸의 공부를 도와주고 잔심부름을 하게 된다. 


타월 업계 도매에서 매출 1위를 달성한 사장 밑에서 일을 배우며 금전 관리를 맡았다. 큰돈을 다루다 보니 '나라고 왜 돈을 벌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돈 버는 일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정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고 목표까지 정했다는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사장님께 간청해서 독립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한편의 드라마 같다. 독립을 하려고 사장님께 앞으로의 사업 계획 등을 적어 매일 꾸준히 편지를 쓴다. 거의 한 달 이상을 쓴다. 나는 한 번 해보고 안되면 포기할 텐데 이 정도 끈기가 있어야 성공하는구나 싶었다. 사장님께 일을 배우며 돈이 무엇인지, 돈 버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알아간다. 결국 사장님께 허락을 얻어 타월 사업 도매상으로 독립했다.


그러다가 장마로 인한 극심한 피해로 타월 사업을 접고, 1970년 공구상을 시작한다. 저자는 눈을 고치기 위해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안과들은 다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눈을 고칠 수는 없었다. 눈이 나쁜 것을 말하지 못해 첫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사업을 하며 많은 오해도 샀다. 그래서 남이 먼저 알아볼 수 있게 밝은 곳에서 만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24세에 청계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고, 삼성전자는 물론 거의 모든 공구 제조업체의 대리점을 맡게 되었다. 나이도 어리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공부해서 남들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갔다. 매사를 즉흥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계획적으로 점검한 덕에 준재벌이 되었다. 


하지만 접대 위주의 일상으로 몸에 무리가 왔고 병원에 누워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아서 무엇을 얻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건강에 무리가 안 가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리고 운동도 시작한다. 


눈이 잘 안 보이니 산에서도 미끄러져 다친다. 산은 위험해서 동네를 조깅하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잘 안 보이는 눈 때문에 운동하다가 버스 아래에 깔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1989년에도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이 사고 이후, 운동은 집에서만 하게 되었다.  


사고를 낸 버스 기사를 원망하기보다 다치지 않음에 감사했다. 남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도움이 되는 삶을 살지를 고민하면서 지금도 소명을 찾고 있다. 이 아침 운동 습관은 오늘날까지 쭉 이어오고 있는데, 도를 닦듯 아침 운동을 하는 모습이 감동이다. 


건강에 무리가 안 가면서 안정적인 일을 찾다 보니 투자를 하게 되었는데, 잘나가면 주위에 꼭 시샘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결국 이 투자건으로 악성 루머가 퍼져 제조업체들이 물건 공급을 중단한다. 졸지에 전 재산을 다 날렸다. 하지만 여기서 또 좌절하지 않고 청계천 뒷골목에 점포 하나를 얻어 남아있는 재고로 공장에 납품을 다시 시작한다.


이후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독점 계약권을 따 와서 전동 공구를 판매하며 제조업 공장도 운영한다. 4개의 주식회사도 설립했다. 그러나 IMF로 회사 하나만 남고 모든 것을 또 잃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시각 장애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급 장애인 판정을 받고, 시각 장애가 있음을 모두에게 알린다. 저자는 이때부터 비로소 평온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저자처럼 자신 있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왜 이런 눈을 주셨는지 알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도 살길이 존재하는 건 분명하다. 만약 시각 장애가 없었다면 애초에 사업에 뛰어들 일도 없었을 것이고, 공부를 계속해서 유명한 대학교 교수님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30여 년간 아껴 모은 돈을 주식으로 다 날려버리고 용돈벌이를 하는 전직 교사, 이상만 추구하는 과학을 전공한 교수인 두 괴짜 친구들 이야기도 재밌었다. 친구란 함께 한 시간과 추억 때문에 더 소중한 것 같다. 


끝부분의 가족 이야기 중에서 딸과 아들이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는 모습이 남다른 것 같다. 자녀의 꿈이 아닌 부모의 꿈을 이루려는 부모도 많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싶었을 텐데 아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막냇동생은 술에만 의지하며 살다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거의 부모 역할을 했던 저자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눈이 보이지 않으면 조상님을 원망하고 팔자 탓하고 나쁜 생각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을 포기하는 것은 언제라도 늦지 않으니, 일단 가 보는 데까지 가 보자. 끝을 본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자고 생각했다고. 


"최근 기술의 발달로 드디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된 작가님을 응원합니다!"


만약 눈이 정상이 된다면 두 번째 회고록은 긍정적인 이야기로 가득 찰 것이다. <어쩌면 나는 회고록을 두 번 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두 번째 회고록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읽게 될 것이다. 여러분께서 부디 저의 시각 장애가 극복되도록 함께 빌어 주시길!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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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시버시입니다
호르바 지음 / 좋은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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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을 먼저 먹으면 좋아하지 않는 것들만 남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먼저 먹으면 좋아하는 것들만 남게 되죠. 인생도 나쁜 일들을 먼저 겪으면 좋은 일들이 남는 거죠.

주인공 부부는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가시버시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가시버시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부부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진관 부부가 '우리는 가시버시입니다'라고 하자, "우리도 가시버시입니다."라고 답하는 주인공의 말에 행복이 넘친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부부라는 말과 부모라는 단어가 얼마나 가슴 뭉클한 단어인지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우리는 가시버시입니다> 인가보다.

지표와 가수는 수학 용어다. 저자는 의 개념에서 희생을, 가수의 개념에서는 긍정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희생과 긍정을 통해 행복을 찾는 이야기를 쓰면서 지표와 가수가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 책의 남자 주인공은 한지표다. 축구광인 아빠가 박지성의 지와 이영표의 표에서 한 글자씩 따와 이름을 지었다. 도서관에서 수학 문제 알려주다 만난 여학생은 왕가수다. 가수가 꿈인 엄마가 가수 왕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지표의 친구 똥파리는 편의점 아들이다. 아빠가 어릴 때 채변 봉투를 걷었는데, 친구들 것을 대신해 주고 떡볶이를 얻어먹어서 생긴 별명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이 껌팔이를 똥파리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지표의 아빠는 건설 현장에 가면 1년이 넘도록 얼굴도 못 보고, 엄마는 밤늦게 들어왔다. 아침에 잠을 깨면 엄마는 없고 밥과 반찬만 놓여 있어서 늘 혼자였다. 그러다가 지표에게 어떤 설명도 의논도 없이 엄마 아빠는 이혼한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혼자 내 살길 찾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부모님이 아파서 학교도 못 다니고 평생 부모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나을까? 나는 부모 뒷바라지를 하기보다는 마음은 아프지만 버림받고 부모 원망하면서 내 인생 사는 게 낫지 싶은데, 친구에게 의견을 물으니, 버려지는 것보다는 내가 부모를 케어하는 쪽이 훨씬 더 낫다고 한다.

TV가 한 사람 몫을 해서 외로움을 달래 준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집에 오자마자 TV부터 키고 자기 전까지 항상 켜 놓는 사람은 외로움 때문이라고. 지표는 TV를 켜놓으면 누군가가 나를 맞이해주는 느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지표의 담임인 노쌤은 학생들이 모르는 문제 가져가서 풀어달라고 하면 NO라고 해서 노쌤이다. 요새는 선생님 되기가 워낙 어려워서 이런 쌤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있었다. 질문하면 수업 방해한다고 혼났던 기억이... 고등학교도 무상교육이 됐다는 것은 나도 처음 알았다. 2021년부터 실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점점 선진국이 되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좋다.

너무도 억울하게 퇴학을 당한 지표와 아이를 갖게 되어 자퇴한 가수,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이 두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게 될까? 이 책은 희노애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쁨은 가수를 만난 것, 노여움은 죄 없이 퇴학당한 것, 슬픔은 부모에게 버림 받은 것, 즐거움은 아기가 태어난 것이 아닐까? 글자로 보는 드라마처럼, 너무 재밌어서 정신없이 읽었다.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고 키우려는 가시버시가 너무 귀하다.

지표와 가수는 예쁜 딸을 낳고, 빵집을 하는 가수의 부모님과도 화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노숙자가 칼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하는데, 지표가 팔로 내리지 말라고 X자를 표시한 것을 반기는 것으로 오해한 가수가 아기와 함께 버스에서 내린다. 그리고 정신 나간 노숙자에게 칼로 위협을 받게 되는데... 지표는 아내와 아기를 이 상황에서 구해 낼 수 있을까? 인생은 사람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인생은 수학처럼 푸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풀어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 모두를 받아들여야 스스로 인생을 풀 수 있다. (p.196)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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