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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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그 사람들을 증오하는 건, 네 증오를 모두 고스란히 돌려받으려는 거야. 네가 품은 증오여도 그 증오는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바뀌려면 시간이 흘러야 해.


우리 엄마도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어린 시절 이름이 '요시코'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일본 사람들을 오랫동안 싫어했고, 당연히 증오해야 한다고 배웠다. 또한 북한 사람은 피부가 빨개서 빨갱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일본 사람과 빨갱이는 이유도 모르고 어린 나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유관순 언니의 대한독립 만세와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그냥 자연스럽게 미워해야 할 대상자들을 정해 주었다. 교실 칠판 위에 양쪽으로 붙어 있던 태극기와 대통령 사진이 사라지자 매우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증오가 왜 나의 증오가 아닌 줄 이제는 안다. 엄마의 증오와 경험이 그저 나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증오라는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에서 인숙은 시어머니 후란에게 받았던 고통을 며느리인 제니에게 대물림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인 인숙이 며느리인 제니를 딸처럼 대하며 아들보다 더 잘 챙겨 먹이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한 건 나에게 진정한 해방의 감정이 느껴져서가 아니었을까? 미움과 증오는 구속이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란 이렇게 고정관념으로부터 세대를 거치며 해방되어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주인공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강아지 토토의 시점으로도 이야기하는 부분과 인숙의 시어머니 후란의 사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화자의 말투가 바뀐다고 나처럼 당황하지 말고 누가 말하는 중인지 생각하며 읽길 바란다. 


나는 굳이 4장이나 연도 별로 나누어 이 책을 읽기보다는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읽는 게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다. 이 책은 인숙의 아버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대전 교도소의 교도관도 이야기한다. 아무 죄도 없이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뛰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오해 받아 총살당한 요한 이야기가 황당했다. 사람의 목숨이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니...


이런 한국이 싫어서 였을까? 인숙과 결혼한 성호는 미국으로 자유를 찾아 떠난다. 그리고 임신한 인숙과 시어머니 후란도 뒤따라 간다. 나는 모두가 아픔을 공유하기에 이 책에서 주인공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손꼽으라면 인숙을 주인공이라고 하고 싶다. 


인숙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비원'이라는 한국식 중식당에서 일했지만 화재로 슈퍼마켓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때 알게 된 로버트와 강아지 토토 이야기가 나온다. 헨리의 엄마 인숙이 나이가 들어 죽은 강아지 토토에게 우리 아들을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하는 부분에서 나도 우리 집 강아지에게 나보다 우리 아들을 더 많이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같은 마음을 전했다. 


인숙은 시어머니와의 방 문제로 남편 성호와 다투다 유산을 한다. 그리고 시어머니 후란이 죽자, 인숙은 후란과 성호와 보냈던 시간이 그저 악몽에 불과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한다. 


어쩌면 시월드에 시달리는 이 땅의 모든 며느리들이 그렇지 않을까? 우리나라 며느리들에게만 화병이라는 게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 화병은 인숙이 그랬듯 더이상 대물림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해방자들이니까. 적어도 내가 당했던 것을 되물림(X) 대물림(O) 하는 일은 없는. 


1945년 마이즈루 항구, 우키시마호 이야기. 로버트의 어머니는 18세에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 이름인 고일을 자기 이름으로 삼았다. 한국인 강제 노역의 증거인 우키시마호는 한국인 노동자들을 1만 명 이상 태우고 폭발해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몇몇의 사람들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때 건물 주인이 무너지기 전에 도망가는 걸 봤다고 한다. 그런데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던 며느리한테는 알려주지도 않고 건물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 며느리가 살아남았어도 과연 다시 그 집과 얽히고 싶었을까. 


2000년이 되었다. 시어머니 후란은 4년 전에 죽었고, 인숙은 임신한 헨리의 여자친구 제니를 먹이는 일에서 위안을 얻는다. 마치 심장이 숟가락 모양으로 변하는 것 같다면서. 자신이 시어머니에게 받고 싶었던 것을 며느리 제니에게 아낌없이 해준다. 제니는 인숙에게 환한 빛을 내뿜었다고. 진정한 평화의 빛, 해방이다.


이 책 98쪽을 보면 88올림픽 때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이 성화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통구이가 되었을 거라는 묘사가 나온다. 찾아보니 괴담일 뿐 실제로는 다 날아가서 죽은 비둘기는 없었다고 한다. 


책 표지에는 순 백의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들이 불속을 날아오르고 있다. 저자는 갑자기 성화가 점화되었어도 자유롭게 날아간 비둘기들을 보며 세계에 진정한 해방인 자유로운 평화가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이 아픈 소설과 같은 역사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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