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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관촌수필』: 전근대의 상부상조 마인드
화자의 어린시절 시골 마을은 상부상조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다.
내가 먼저 줬으니 당당히 받아야겠다는 마인드.
내가 받았으니 마땅히 되갚아야 한다는 마인드.
이런 식으로 뒤엉키다보면
남에게 신세 지기를 쉽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자기 일과 남의 일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자연스레 타인에 대한 간섭과 참견, 지대한 관심이 이어진다.
내가 요청했을 때 상대가 주지 않으면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 한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
거절을 받았으니 보복으로 돌려주는 게 마땅하다는 계산법이다.
그쪽이 요청했을 때 내가 들어줬는데
내 차례에 요청이 묵살 당한다면
그 인간은 천하의 나쁜 놈이고 인륜을 저버린 놈이다.
세계관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인 것이다.
그는 불한당이고 폐륜아다.
혹은 앞서 내가 들어준 적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요청한다는 말은 갚는다를 전제로 하기 때문.
요청과 동시에 ‘갚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요청과 되갚음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쌍을 이룬다.
하지만 문제는 주고 받음의 해석이 주관적일 때다.
그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 암묵적 거래는 순식간에 불공정 거래가 되어버리고, 앙심과 보복의 단계로 들어선다.
근대화가 되면서 이런 상부상조의 빈틈은 점점 커지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영악하게 계산을 한다.
|| 그런 자잘한 신세를 미리 지면 나중에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급할 때는 못 써먹게 된다는 거였다. || p. 337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들 간의 계산법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질된 상부상조의 감각은 곧잘 근대화 사회를 장악했던 부정부패와 연결되었다.
찔러준 돈과 우회하는 법 질서.
준 대로 받는 것.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
시골과 도시의 충돌,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
옛 사고방식과 새로운 시스템의 충돌.
근대화 과도기의 사회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꼴이 이렇게 되버리니 근대 이후에 상부상조의 마인드는 척결해야 할 구태와 적폐가 되었다.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다.
마지막 챕터인 월곡후야에 이르러서는,
근대의 합리와 상부상조의 비합리가 뒤섞여 난장을 이룬다. 기성세대는 아동성폭행범인 이웃을 ‘좋게좋게‘ ‘합의‘하여 넘어가게 하고, 신세대인 청년들은 그 오염된 ‘사법‘ 시스템에 분노하며 사적 복수를 하기에 이른다.
상부상조에 오염된 합법은 오히려 부조리하고,
공정함을 요구하는 근대화된 신세대는 누구보다 전근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 당신은 속으로 이런 법이 없다구 여길치 모르나 그렇잖어. 이런 법을 뭐라구 하는 줄 아슈? 이게 바로 불문율이라는 거여. || p. 377
전근대로 돌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가능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현대화 되는 것만이 정답도 아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저 ‘그때에만 가능했던‘ 전근대의 상부상조 감각을 그리워한다.
기꺼이 주고받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반드시 돌려받을 걸 알기에 서슴없이 먼저 주고자 했던,
혹은 (가끔씩이긴 했어도) 거래 개념을 뛰어넘어 그냥 조건 없이 주기도 했던 그 감각 말이다.
(화자의 어머니는 걸인들이 찾아오면 굶겨서 보내는 법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모두가 어린 자신에게 아낌 없이 베풀었던,
자신의 유년기에 대한 저자의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양반집 자제였던 저자에게는, 그 두 가지 세계(전근대와 유년기)가 구분이 되지 않는 하나였다.
그 낙원과도 같은 달콤한 곳,
하지만 지금은 변해버린 삭막한 곳.
그곳이 관촌이란 이름의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