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노동 - 가정, 병원, 시설, 임종의 침상 곁에서, 돌봄과 관계와 몸의 이야기
매들린 번팅 지음, 김승진 옮김 / 반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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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유지의 예술이라고 규정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지혜란 세상의 지속성을 위한 애정 어린 관심이라고 말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돌봄의 상당 부분이 지속성 유지에 투자되는데, (변화를 열망하든 변화를 두려워하든 간에) 모두가 변화에 집착하는 시대에 지속성은 간과되거나 무시된다. 여러 방식으로 지속성을 원하고 필요로 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는 동안, 권위는 성취achievement와 관련된 것들에 쌓인다. 이 단어에는 완성과 종결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성취는 ‘노력을 통해 획득하다’, ‘수행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가 어원이며, 개인에게 꼭 필요한 프로젝트로서의 활동으로 여겨진다. 대조적으로 유지는 공동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일이고 반복적인 일과와 지속적인 습관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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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동 - 가정, 병원, 시설, 임종의 침상 곁에서, 돌봄과 관계와 몸의 이야기
매들린 번팅 지음, 김승진 옮김 / 반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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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은 복지 시스템을 뼈만 앙상해지게 만들었고, 탄탄한 인간관계를 일구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을 고갈시켰다. 관계에 투자하지 않는 것은 복지 정책 전반의 특징이 되었다. 나는 부모들을 만나면서 서비스 담당자들이 가치 판단을 하려 하고 무디고 무뚝뚝하며 심지어는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냉담하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관료제는 위험관리, 불편부당, 책무성, 예산 제약 등의 개념 위주로 짜여 있다. 관료제는 공정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표준화된 의사 결정 절차를 따르는데, 이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상황과 필요에 대한 반응성을 떨어뜨리고 개개인의 필요에 신경 쓰는 것을 성가신 일로 여기게 했다. 장애 아동 지원 담당자의 일차적인 임무는 해당 가정의 필요를 파악하는 것인데, 그 필요의 산정이 관료제적 절차에 따라 이뤄진다. 가령 앞에서 케이트가 언급한 장애인생활수당도, 부모가 공문서 양식에 기입한 정보가 숫자로 환원되어 지급 여부와 지급액이 산정된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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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동 - 가정, 병원, 시설, 임종의 침상 곁에서, 돌봄과 관계와 몸의 이야기
매들린 번팅 지음, 김승진 옮김 / 반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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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집에 들이세요. 원하시는 방식으로요." 돌봄은 소비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금전 거래로 얻을 수 있는 사물이 되었다. 한 간호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의 구분이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비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죠. 원하는 것을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거요." 이러한 필요가 다시 수요로 바뀌면서 의료 및 돌봄 시스템에는 막대한 과부하가 걸렸고,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측면, 가령 호혜성이라든가 자신의 일에 손과 머리뿐 아니라 어떻게 심장도 개입시킬지를 판단하는 돌봄제공자의 자율성 같은 것은 숨겨지거나 아예 제거되었다.
정문 옆에 나붙어 있던 광고는 이런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 병원에 들어서는 모든 의료진, 환자, 방문자의 기대와 이해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짬을 내어 커피를 마시며 나와 이야기를 나눈 한 간호사는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듯이 구는 문화"에 분개하면서,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는 것으로 간호사를 부르는 환자도 있다고 했다. 일반의 진료소에서 진료를 받고 나면 환자들은 비행기 승무원 서비스를 평가하듯이 진료 경험을 평가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며, 여기에서 진료 관계는 소비자 계약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다. 의료와 사회적 돌봄 분야의 문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달하다deliver[배달하다]’라는 단어도 문제가 있다. 물품이나 패스트푸드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럴 수없다. 전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넘겨준다는 의미인데, 돌봄은 그렇게 유한하거나 깔끔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돌봄에는 친밀성이나 취약성 같은 측면이 얽히고설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 P47

많은 페미니스트 철학자들이 돌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고자 노력해왔다. 조앤 트론토Joan Tronto는 돌봄이 도덕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개념이기도 하다고 본다. 그에게 돌봄은 "우리가 그 세계 안에서 되도록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세계를 지속시키고 유지하고 고치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노동이다. 트론토는 이러한 노동을 구성하는 네 가지 윤리적 요소로 관심, 책임, 역량, 반응성을 꼽는다. 세라 러딕Sara Ruddick은 "돌봄은 노동인 만큼이나 관계이기도 하다."라며 "돌봄노동은 내재적으로 관계적인 노동"이라고 말한다. 롤로 메이Rollo May는 돌봄이 감정 이상의 것이며 "무언가를 행하는 것, 무언가에 대한 의사 결정"이라고 본다. 한편 돌봄을 미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버지니아 헬드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헬드는 돌봄이란 이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후생에 대해 호혜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관계"라고 설명한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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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동 - 가정, 병원, 시설, 임종의 침상 곁에서, 돌봄과 관계와 몸의 이야기
매들린 번팅 지음, 김승진 옮김 / 반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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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여성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이슈다.
돌봄노동의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문화적 가림막이 존재한다. 인간의 후생을 지탱해주는 노동의 가치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 뿌리깊은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돌봄의 중요성, 돌봄노동의 정도, 돌봄노동에 필요한 복잡하고 섬세한 기술 등 가려져 있는 방대한 돌봄의 직조와 연결망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 P15

돌봄은 여전히 오프라인 활동이다. 목욕시키기, 식사시키기, 청소하기, 정리 정돈하기, 손 잡아주기, 지켜보기 등 너무나 많은 면에서 물리적으로 대상자의 곁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근접성이 돌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들러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누가 사는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거나 말벗이 되어줄 만한 사람이 가까이에 있는가와 같은 점이 결정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돌봄에 대한 접근성은 지역별 편차가 크다. 가령 노인 인구가 많은 농촌이나 해안 마을에서는 돌봄 격차의 문제가 특히 더 절박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동네에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돌봄은 온전히 개인에게만 맡겨지는 일일 수 없다. 가까이 사는 누구를 누가 아는가, 그들이 어떻게 만나는가, 그들이 어떤 관계를 발달시켜가는가 등이 만드는 연결망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 P19

나는 돌봄이 취약성, 의존성, 고통을 다루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유통되는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지만 모든 돌봄은 취약성, 의존성, 고통을 다룬다.
얼마나 직면하기 싫든지 간에,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될 경험을 구성한다. 누구나 자신의 문화에 돌봄의 전통을 육성해야 할 이유가 있다. 모두의 삶이 그것에 의존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아주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삶은 이미 돌봄의 문화에 의존하고 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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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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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는 그렇게 까마득한 고독 속으로 굴러떨어져야 겨우 나를 지킬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 그런 구덩이 안에서 저 혼자 구르고 싸우고 힐난하고 항변하며 망가진 자기 인생을 수습하려 애쓰다보면 그를 지켜보는 건 머리 위의 작은 밤하늘뿐이라는 것. -은하의 밤- - P27

영화를 보다 밖으로 나와도 해는 중천이었고, 그렇게 손잡고 가는 길에 할머니는 인생에 필요한 경계랄까 교훈이랄까 하는 것들을 진지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은 "너무 상한 사람 곁에는 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꿈을 잃지 마라,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 돼라, 근면하라처럼 흔한 당부가 아니라서 인생의 아주 비밀스러운 경계를 품은 듯 느껴졌다.
그리고 대개 교훈들은 실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가 행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실수, 너무 상한 사람 곁을 지키고 말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했다. -데이, 이브닝, 나이트- - P69

예비된 성과가 있다는 것은 따뜻한 차 한잔처럼 노상 몸과 마음을 뭉근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 소봄은 동생과 싸우지 않았고 혼자만의 술자리도 주종을 바꿔 맥주 정도로 가볍게끝냈다. 뭔가 삶 자체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적당히예열된 차를 부드럽게 액셀을 밟아 몰듯 자기 삶을 운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생겼다. -첫눈으로- - P207

저는 영 나쁜 인간이에요.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소봄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소봄은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취한 채로 돌아온 아빠가 현관 계단을 다 올라오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곤 했다는 건, 그 편으로 난 방을 가진 소봄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여덟개의 계단을 오르지 못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안타깝게도 술꾼들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 이윽고 지민에게서는 한잔하셨네, 하는 답이 돌아왔다. 돌아왔다. 소봄씨가 왜 나빠, 그런 건 아닐 거야 하는.
아니에요, 피디님이 어떻게 알아요? 뭘 알아요?
또 시작이네, 알아.
아니, 몰라요.
어허, 어디야?
정작 지민이 그렇게 묻자 소봄은 더이상 대답을 하지않고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눈이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치 누군가의 머리 위로 죄 사함을 선언하듯 공중에서 끝도 없이 내려오는 그 눈송이들이. 그것은 비와 다르게 소리가 없고 쌓인다는 점에서 분명한 아우라가 있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 소봄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반짝이며 지민의 말이 계속되었다. 소봄은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혼자만의 힘으로 그날의 밤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이 잃은 사람에게 전해주던 그 기적 같은 입김들이 세상을 덮던 밤의 첫눈 속으로. -첫눈으로-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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