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비대면 외면 - 뉴노멀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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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몇 다리 건너 연결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생활 방식이 나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주고 나 또한 그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까운 친구들은 10촌과 유전적으로 동등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우리가 자주 접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는 경향이 있고, 자기와 비슷한 성향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기 때문이다. ‘우편번호가 그의 유전자 암호보다 건강을 더 잘 예측하는 요인‘이라는 말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
……. 나는 건강한가? 의료 검진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들과 함께 빚어가는 경험 세계가 중요한 지표가 되는 셈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는가? 거기에 흐르는 감정은 무엇인가? 소통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과 충만함은 의료적 처치 못지않게 건강을 증진시킨다. 면역력의 원천이 되는 생명 에너지도 유쾌한 사회적 활동에 접속할 때 넉넉해진다. - P220

섬세함과 예민함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의 오랜 친구이자 스승인 조영훈 교육센터 <빛·숨> 센터장이 명료하게 구분해주었다.
전자가 상대방의 존재에 마음이 닿아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에고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섬세함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내면에 귀 기울이면서 기쁨과 슬픔, 평온함과 고통을 기꺼이 나누는 감수성이다. 그에 비해 예민함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생존 본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면서결국 고립을 자처하게 된다.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관계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타인을 충분히 배려하되,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거리를 두거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상대방의 속 깊은 이야기나 나를 위한 진심어린 조언에는 귀를 쫑긋 세워야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한다. - P229

캐나다의 도시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창조성이 발흥하는 도시의 모델을 기술technology, 인재talent, 관용 tolerance으로 설명하는데, 이 가운데 관용은 어떤 장소가 기술과 인재를동원하고 유인할 수 있게 만드는 핵심 요소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민자, 예술가, 동성애자 그리고 인종적 통합에 개방적인 곳일수록 기술과 인재를 성공적으로 활용한다. 문화적으로 개방적인 장소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되게 하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도록 함으로써,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나로는 창조적 에너지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 P238

이때 중요한 것은 애매함을 견디는 마음이다. 우리 두뇌는 무엇이든 확실하게 규정하고 싶어 하지만, 인식의 대상은 늘 분명하지 않다. 사람이든 현실이든 언제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자라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되고, 그 과업을 수행하면서 철이 들어간다. 인간의 성장이란, 자기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둘씩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 그런데 인간이 철들기란 쉽지 않다. 어른이 되어도 유아적 성향이 남아 있어서, 상대방이 내 의견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거절로 해석하기 일쑤다. 그러한 에고의 습성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끌려가지 않도록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 칼 로저스는 ‘반대의 관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는데, 불편한 반응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다.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상태라도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 P243

그러한 태도는 조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특히 리더들에게 더 요구된다. 주어진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다각적으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의 방안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개개인의 능력만으로 해내기는 어렵다. 조직 구성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서로 보완하면서 집단지성을 발휘해야 한다. 열쇠는 유연한 사고력과 그것을 북돋는 소통의 방식이고, 리더는 그런 조직문화를 일궈갈 책임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직원들과 나누는 대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대화는 대부분 질문과 대답으로 이뤄지며, 어떻게 질문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전개된다. 특히 상급자가 부하직원과 소통할 때,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리더는 모든 것을 이끌어야 한다는 잘못된 통념 때문에 질문보다는 지시나 단언을 하게 마련이고, 질문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은근히 강요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기 때문이다. 미국 MIT공과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에드거 H. 샤인과 피터 샤인 교수는 그런 식으로 소통할수록 조직은 상투적인 대답과 어색한 침묵 속에서 경직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겸손한 질문humble inquiry‘을 제안한다.
여기서 ‘겸손함’이란, 형식적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질문할 때 자기가 정말로 그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능력만으로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함께 배우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겸손한 질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호기심, 진실을 향한 열린 마음, 또한 서로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상대방을 논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맥락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적절히 대응하는 법"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조직 구성원들은 그런 화법을 통해 새로운 관점과 통찰에 이를 수 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대화의 핵심을 이렇게 짚은 바 있다. "참된 대화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가 자신의 확실성을 기꺼이 보류하려고 하는 것이다." 확신은 진실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확신을 내려놓고, 명료함을 구해야 한다. 자기를 겸허하게 비우고 경청하기. 정직하고 열린 질문으로 다가가기. 모름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순수한 앎을 향하여 함께나아가는 마음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그여백에서 상호 이해의 길이 열린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도 더욱 유연하고 우아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겸허한 질문과 경청은 창의성의 원동력이 된다. - P245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할 때 끌어다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이나 자원은 무한에 가깝게 열려 있다. 따라서 연결 그 자체가 좋은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는 혼란을 가중시키고 길을 잃게 한다. 어떤 주제 내지 목표를 중심으로 자원들이 선별되고 배열되어야 한다. 그러한 초점이 명료하다면, 전혀 상관없는 자료나 경험들이 융합되면서 의외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고 기존의 여러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지성이 필요하다. 연결지능은 그렇듯 자기 나름의 지향을 가지고, 다양한 자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는 능력 위에서 꽃피운다.
그런 능력은 맥락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안목과 과제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직관을 내포한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머릿속에 지식을 잔뜩 집어넣는 데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황에 부딪쳐 씨름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면서 터득해가야 한다. 리얼리티에 대한 통찰과 문제의식이 분명할 때, 방대한 정보와 지식, 경험과 자원들이 취사선택되고 편집되어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얄팍한 지능이 아니라 깊은 지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양한 장에서 존재를 연습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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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면 비대면 외면 - 뉴노멀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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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력은 도구적인 역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종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 그럴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 도덕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한계의 범위는 확장될 수 있다." - P167

시선을 통한 사회적 협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나와 타인들이 지금 무언가를 함께 바라보거나 듣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가리켜 ‘공동 주의집중joint attention’이라고하는데, ‘어떤 대상이나 과제에 자신의 관심(초점)과 상대방의관심을 일치시키는 사회적 행위’를 말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사물에 시선을 보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그쪽으로 유도할 수 있다. 반면, 아무리 똑똑한 개나 고양이도 주인이 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어린 아기들조차 상대방이 시선을 향하는 대상으로 눈길을 보낸다. 그것을 시선 쫓기gaze following라고 한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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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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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분들의 돌봄 경험은 어떤 것인가요?
저는 의료인은 아니고, 돌봄활동을 하는 사회복지사도 아니고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돌봄의 현장을 경험하고 있어요. 개인적인 돌봄경험으로도 아픈 가족이 있지는 않아서 아이 둘을 키운 육아돌봄이 전부네요.
이 책은 스스로에게 어떤 돌봄의 경험을 했는지 기억을 뒤돌아보게도 하지만, 저처럼 앞으로의 돌봄의 경험이 어떨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상상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하더라고요.

#2. 죽음, 어쩌면 너무 오래 또는 멀리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잖아요. 모두 죽음을 맞이하니까요. 하지만 자신이든 혹은 가까운 누군가든 돌봄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의 구체적 상상을 해본 적은 잘 없었던 것 같아요. 작은 돌봄이 필요한 순간부터 죽음까지는 아주 긴 과정이 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사람들(의료인, 가족, 돌봄 종사자 등)이 관여하게 되는 데도요.
돌봄이 필요해지는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레이드(난이도? 등급?)이 있다면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걸 가장 지키고 싶은지, 어떤 자기 존중을 바라는지, 얼마만큼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변화하는 돌봄의 단계마다 스스로 생각하고 관여된 사람들과 협의하고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3. 돌봄, 좋은 경험과 기억이 될 수 있을까?
돌봄이라고 하면 힘듦, 어려움, 아픔, 불확실, 독박, 절망, 고립 이런 단어만 먼저 떠오르잖아요. 돌봄이 성취감, 효능감, 즐거움을 느끼는 경험과 기억이 되는 날이 올까요?
공동체의 소속감이 가장 기본이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우리는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돌봄이 필요한 순간부터 애도가 필요한 순간까지 내가 사는 곳에서 서로 나이들며 서로 돌보는 협력이 가능할 것 같거든요.
의료사협에서 병만 치료하지 않고, 노동영화제, 동네퀴어위크, 무지개학교, 사전연명의료의향서교육을 하는 이유, 울림돌봄사협이 돌봄서비스 제공만 하지 않고, 조합원들과 돌봄책모임을 하는 이유도 그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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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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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둘러싼 이 ’양극화‘가 생애 말기 돌봄을 곤경에 빠뜨렸다. 환자 곁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회적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가뜩이나 옹색하고 시혜적으로 보이는 공적 돌봄을 받기 위해서 환자는 자신의 몸과 집의 비참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자는 집에 고립되거나, 군말 없이 요양원 또는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환자의 일상은 열악한 돌봄 노동조건에 따라 출렁인다. 이런 맥락을 제쳐두고 생애 말기 돌봄과 죽음을 다시 집으로 끌고 오자는 주장은 허망하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가 특정한 기준으로 선정한 환자 집에 비대면 의료 기기를 설치하고, 문턱을 제거하고, 가끔 사회복지사나 의료인이 방문하는 사업은 아닌지 우려된다. 집에서 죽으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고, 시설에서 죽으면 ‘나쁜 죽음(혹은 객사)‘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존엄한 죽음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 있다.
-집- - P26

질병이 빈곤으로 연결되고 빈곤이 질병으로 이어지기 쉬운 사회에서 보호자의 돌봄은 환자가 죽음(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의 돌봄이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는 아찔한 현실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강조는 자칫 ‘환자에게서 손을 떼라‘는 의미로 이해될수 있다. 오히려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타인의 돌봄을 딛고 섰을 때 비로소 행사되는 것이다.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돌봄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환자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울려퍼지려면 ‘환자의 자율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그의 일상을 떠받치는 ‘돌봄‘을 정의롭고 평등한 방식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말기 의료결정은 선언적 가치, 의료 윤리, 소통 기술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병원의 운영체계, 한국의 의료 다양성, 의료진의 태도, 보호자의 돌봄, 가족 삶의 조건, 환자의 몸 상태 및 인식 등이 뒤얽혀 협상을 벌이는 ‘정치적 행위‘에 가까웠다. 요컨대 말기 의료결정은 환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었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은 저마다의 이유로 ‘죽음의 타이밍’을 고민했다.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말기 의료결정- - P115

정부의 방역 저편에 또 다른 형태의 생명과 죽음이 존재한다. 코로나19 사태에 가려진 죽음의 단위를 ‘복수(複數)로서의 죽음‘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 단위는 죽음을 개별화하고 서사적인 방식으로 나타낸다. 사람들은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입장, 상황,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한다.
노환으로 임종하신 부모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녀,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한 친구, 생활고로 자살한 이웃은 모두 다른 죽음이다. 이 단위를 통해서 주목할 점은 불평등한 삶의 조건과 죽음의 관계다. 언론보도로 접하는 빈곤사, 하청노동자 사망 사고, 아동학대 사망 사건,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 사망 사건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여기서 죽음은 지역, 학력, 연고, 시간, 나이, 성별, 직업, 노동조건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열악한 삶의 조건이 생명을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과정을 주시하게 된다.
‘복수로서의 죽음‘이란 단위로 나타낸 세계에서 만인에게 평등한 신성한 생명은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불평등한 삶과 죽음이 어수선하게 엉켜 있는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독박 돌봄을 하던 보호자가 ‘간병 살인‘을 하게 될 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어린이가 어른의 학대로 사망할 때 정부는 부랴부랴 미봉책을 내놓는다.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허술한 안전 관리, 위험의 외주화, 비정규직 체제, 초과 근무, ‘갑질 문화‘에 대해서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코로나19- - P198

정부의 방역은 ‘평등한‘ 생명과 죽음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지만, 오히려 현존하는 ‘불평등‘한 생명과 죽음을 가리고 더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죽음에 호들갑을 떨고, 다른 쪽에서는 죽음에 침묵하는 이 양극적 현실이 불평등한 삶의 조건과 사회의 생산방식, 그 해법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두 가지 단위, 즉 ‘단수로서의 죽음‘과 ‘복수로서의 죽음‘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범주로 봐야 한다. 신성한 생명은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엄밀하게 논의하고 개선할 때 비로소 지켜질수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킨다는 말은 무엇이며, 생명이 신성하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오늘날 통용되는 생명과 죽음이란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혹은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질문해야한다.
-코로나19- - P203

웰다잉이 강조될수록 ‘잘 죽기‘는 요원하다. 앞서 살펴봤듯이 웰다잉이 전제하는 ‘죽음‘은 연명의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명의료를 둘러싼 환자·보호자·의료진 간의 갈등 및 쟁점은 웰다잉이란 광의적 표현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한국의 기이한 의료체계, 빈약한 사회보장, 정의롭지 못한 돌봄의 배치에 대한 깊은 관심과 논의가 필요하다. 호스피스 확대, 왕진, 간병 급여화 같은 제도도 절실하다. 각 사안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검토해야 한다. 또 건강한 몸을 정상으로 여기고 아프고 취약한 몸에 낙인을 찍는 인식을 갱신해야 한다. 돌봄을 집에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활동이나 시혜성 사업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문제, 즉 정치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에 대한 고민과 분리될 수 없다.
-웰다잉-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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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카먼 마리아 마차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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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성매매여성이 살해당한다. 그녀는 너무 지쳐서 유령이 되지 못한다.
분노: 성매매여성이 살해당한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유령이되지 못한다.
순수: 성매매여성이 살해당한다. 그녀는 너무 슬퍼서 유령이 되지 못한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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