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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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사례로 옮겨 가보자. 의료인류학자 아네마리 몰은 『돌봄의 논리』에서 tinkering(팅커링)이라는 조어를 제시한다. 이 말은 조율하기, 매만지기, 땜질하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들이 협력해 잘 맞출 때 케어가 출현한다는 개념이다. 팅커링 개념을 실제에 적용한 휠체어 맞추기라는 작업을 살펴보자. 휠체어를 이용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 몸이 점점 더마비되고 그에 따라 휠체어 조종장치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더굳어진 몸으로 휠체어를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조작하려면 매만져야 할 게 많다. 게다가 그의 휠체어는 심하게 마모됐으나 단종된 제품이라 수리할 부품을 구하기도 더 이상은 어렵다. 새 휠체어가 필수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상품소개서를 펼쳐놓고 선호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그중 하나를 고르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때 선호와 비용 등 휠체어 이용 당사자의 조건들만 고려하면 되는 것인가?
실제 펼쳐진 과정은 이러하다. 돌봄지원센터의 케어매니저가 조율을 위한 자리를 만든다. 휠체어 이용 당사자를 포함해 휠체어 전문 기술자, 사회복지사, 주 돌봄자가 모였다. 휠체어를 자기 몸으로 여기는 이용자의 ‘몸‘ 자체가 최우선 고려 대상이다. 또 중요한 고려 대상은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돌봄대상자가 턱을 넘거나 경사로를 오를 때 휠체어를 밀고 동행하는 역할을 오래 해온 그의 몸도 노화가 진행돼 큰 힘을 쓰기 어렵다. 그가 힘을 덜 들이고 관절을 보호하면서 계속 돌봄에 참여할 수는 없을까? 사회복지사는 정부 지원 비용과 최적의 훨체어 값의 차이, 돌봄자의 경제 상황 등을 두루 고려해 가용한 최대 자원에 대한 정보를 내놓는다. 휠체어 기술자는 기성 제품 그대로를 구매할 때의 장단점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장치를 개조하거나 부가해야 최적의 휠체어가 될 수 있을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이때 휠체어를 이용해본 경험자들의 다양한 데이터와 사례가 참조된다. 이런 조율을 거쳐 비로소 새로운 휠체어를 결정한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조합한 의사결정이다.
한국 사회에서 ‘땜질한다"는 말은 임시변통, 근본적 조치 없이 대충 때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몰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아쉬운 점이 남더라도 끊임없는 조율 속에서 행해지는 돌봄 과정의 역동성이다. 돌봄은 어떤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는,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휠체어 조율하기 사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몸과 휠체어를 둘러싸고 형성된 관계와 그 관계의 확장,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자율적인 결정의 과정이다.
돌봄을 말할 때 핵심은 돌봄의 곁이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봄을 제공하고, 돌봄을 제공하는 그 돌봄자를 공동체와 제도가 보살피며, 이러한 돌봄 행위들의 선순환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켜내는 것이 돌봄권의 대상이다.
결국 돌봄권이 시민 모두의 일상에 뿌리내려야 사회적인것이 재생산된다. 돌봄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며 호혜적이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상호성이 시민사회 전반에 실핏줄처럼 퍼져야 한다는 것이 돌봄권의 기본 정신이다. 돌봄을 주고받는 것이 모든 사회구성원의 시민적 덕성과 활동의 기본이 되는 사회가 돌봄 사회다. - P193

자유는 방해만 없으면 되는 게 아니다. 자유의 내용을 실현할 만한 강한 제도들로 쌓아올린 방벽이 있어야 한다. 흔히 사회적 권리라 부르는 주거, 노동, 교육, 여가, 사회보장 등과 관련된 방벽 없이는 돌보고 돌봄 받을 자유를 이야기할 수 없다.
흔히 자유로 논해지는 자기결정, 자율 같은 것은 돌봄이 처한 사황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 P198

삶 자체를 상호돌봄으로 이어진 공생으로 이해할 때라야 생산적인 ‘하기(doing)‘가 없어도 ‘존재(being)‘만으로 평등한 존중과 인정의 대상으로서 온전한 인간임을 서로 확인하고 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사람도 사람인데…‘라는 동정과 두려움 섞인 반응은 ‘○○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대하라‘는 명령이나 ‘여전히 사람이다‘라는 선언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매개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돌봄이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고 인간이 되게 하는 활동이 돌봄이다. 인간의 얼굴을지켜주는 한 겹의 옷, 그것이 돌봄이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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