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몸 1 - 몸의 기억과 마주하는 여성들 말하는 몸 1
박선영.유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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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울증도 잘살고 싶기 때문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그냥저냥 흘러가는 대로 살려면 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원하는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뭔가를 계속 갈구하는 거죠. 애정에 굶주려 있고, 감정에 굶주려 있고요. 이런 제 모습을 몸에 새기고 싶어요. 타투를 보며 이 마음을 되새기고 충만한 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요. - P21

채식하는 사람들은 "너 그러면 채소도 먹지 말지. 채소는 안 아픈가"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요. 그것도 중요한 질문이에요. 식물은 뭘 느낄까. 알면 너무 좋겠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무엇을 바꾸지 않기 위한 근거로 어떤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말을 할때 그것이 변화를 막는 도구로 이용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 P27

그때 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우리 노동환경이 분명 사람 몸을 수단시한단 말이에요. 우리는 그냥 수단이에요. 아침에 정성껏 로션 바르고 영양크림 바르고 머리 곱게 말리고 온 내 몸은 그냥 수단이에요. 그게 엄연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영원히 젊을 것처럼 화장품도 바르고 근육도 유지하려 하죠. 어떻게 해야 일하는 몸이 마치 사랑받은 사람의 몸처럼 존중받을 수가 있을까요?
인생에서 정말 좋았던 기억은 다 몸에 관한 기억이에요. 누군가 잡아줬던 손, 부드러운 목소리, 내가 기댔던 어깨, 내가 안아줬던 혹은 안겼던 품, 횡단보도에서 얼른 가라고 손을 막 흔드는 팔동작이요. 좋았던 기억은 몸과 관련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몸이 아무렇지도 않게 훼손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그런 걸 병원에서 많이 생각했어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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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전환매거진 바람과 물 7호 : 여성, 살림, 정치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편집부 지음 / 여해와함께(잡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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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상대가 없어도 혼자 의식할 수 있는 데 비해 감정은 상대와의 조우에서 일어나거나 교류를 통해서만 가능한 반응이죠. 예컨대 차가움이란 감각은 나도, 얼음도 독자적으로 가진 것이 아니어서 혼자 있으면 차가운지 모르고 나와 얼음이 만났을때 비로소 차가움을 느끼는 거죠. 감정이란 게 개체 사이의 알 수 없는 중간지대를 이어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 위주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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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전환매거진 바람과 물 7호 : 여성, 살림, 정치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편집부 지음 / 여해와함께(잡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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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한순간도 식민주의 없이 존재한 적이 없고 인간이 발명한 식민지 권력은 인종차별, 성차별, 자연착취라는 세 기둥으로 작동한다. 기후위기도 자연을 착취하는 채굴주의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마르케스도 그렇지만 공동체와 자연을 지켜내고자 하는 아프리카나 남미 여성들이 말하는 젠더관계는 서구의 논의와는 다르다. 루고네스는 서구의 발전 담론을 비판하면서 ‘젠더의 식민성coloniality of gender‘을 제기하고 "차이와 함께, 차이 안에서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과 같은 복수성과 탈식민decolonial 페미니즘을 주장하는데, 이는 기후위기 시대에 새롭게 사유해야 하는 젠더관계의 민주화에 유의미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 P43

여성이 자연과 서로 연관성을 지니며 공동체 내 자급적인 삶의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젠더와 자연이 모두 커먼즈의 세계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젠더가 개별적인 성역할로 축소되고 자연이 사유재로 전락하면서 커먼즈의 세계는 자본주의 질서 속으로 포섭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자연도 원래 세계 속에 붙박고 있던 ‘장소성‘이 박탈되면서부터 소유에서 사유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가령 소유로서의 토지는 선조에서 후손으로 전승되는 것으로 한 가계의 공통생계를 위한 공유재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토지가 사유재로 전락하게 되면 마치 물건처럼 자유로이 사고팔 수 있는 상품화의 길을 걷게 된다. 다시 말해 소유란 장소의 가짐이고, 사유란 장소의 박탈인 것이다. 소유는 공동체 내에서 어떤 장소를 가짐으로써 그 거처를 바탕으로 공공활동을 만들어내지만, 사유는 세계 속에서의 장소를 박탈함으로써 오직 사적인 축적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만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자의 경우는 보살핌이나 돌봄으로 장소를 대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오직 이윤으로만 장소를 다루게 된다. 이렇듯 젠더와 자연 모두 고유한 장소성과 그 장소에 속함belonging을 박탈당하게 됨으로써 커먼즈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개별성을 띤 사적인 어떤 것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 P49

그렇다면 이미 대부분의 공유지는 사라지고 저마다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오늘날 커먼즈 세계를 되살려낼 방밥은 무엇일까? 공동체 없는 공유지는 없다는 미즈의 주장에서 힌트를 얻자면 대안은 더많은 비자본주의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공동육아, 공공임대, 공공도서관, 공원, 공유텃밭을 비롯하여 고립된 타자들이 화폐 경제망에서 탈주하여 환대와 돌봄의 장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다양한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구체적인 장소에 토대를 둔 구체적인 접촉자로서의 타자들과의 만남이 필요하다. 촘촘한 자립의 그물망은 우리가 이웃한 타자들과 얼마나 깊은 우정과 연대를 나누느냐에 달려 있지만, 문제는 우정과 연대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낯선 단어가 된 지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 P50

나는 뉴욕에 살면서 온갖 세계적인 운동가들을 만나왔는데 결국 나의 뿌리인 로컬에서 시작하는 게 가장 힘이 센 것 같아요. 학자로서의 새로운 자기 인식과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항상 유럽과 비교해서 뭔가 모자란 느낌, 학문적 열등감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굉장한 일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야해요. 기존 시스템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아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들이 조언하기를 땅을 구해서 스스로 먹을 농사를 지으라고 하네요.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던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전망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 P70

조안나 메이시가 쓴 『생명으로 돌아가기』(이은주 옮김, 모과나무, 2020)를 같이 읽고 있어요. 메이시가 이런 질문을 해요. 요새 네 기분이 어때? 뭘 느껴? 절망 속에서도 감사하는게 뭐야? 절망과 감사를 동시에 느끼면서 네가 잘 할 수 있는 게 뭐야? 그는 불교도답게 희망을 주지 않아요. 너의 세대에 인류가 멸종할 수 있다고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해요. 메이시의 제자인 마가렛 휘틀리는 일생 학교나 기업에서 어떻게 하면 민주적이고 공감을 형성하면서도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지 강의했대요. 그런데 잘 안된대요. 그 이유는 현재 지도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는 제도권에 들어가 세상을 바꾸는 일을 놔버렸어요. 그리고 말해요. "당신이 있는 곳에서 ‘온전함의 섬Islands of Sanity‘을 만드세요. 미래에 어떻게 살겠다가 아니라 오늘 당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사세요. 그 섬들이 둥둥둥 죽어가는 이 지구에 떠다니면서 서로 연결돼 면이 되고 입체가 되도록 하세요." 어떻게 연대하냐고요? 나 자체가 온전함의 섬이 되는 거예요. 물에 빠진 사람들이 허우적거릴 때 내 섬에 건져내서 같이 가는 거예요. 나는 요새 그들을 매일 생각해요. 어떻게 느끼지? 뭐가 무섭지? 감사하는 것은 뭘까? 다 기록하고 써야겠다, 그 생각을 하고 있어요. - P74

걔네의 지향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순 없지만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하자!‘이다. 운동이나 활동의 무게와 부담이 때때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깨우친 뒤라 걔네의 이러한 모토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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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전환매거진 바람과 물 4호 : 돌봄의 정의 - 2022.봄호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편집부 지음 / 여해와함께(잡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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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의 인간‘과 ‘가이아의 복수‘는 동전의 양면이다. 동아시아 고전 개념으로 말하면 ‘천인상여(天人相與)‘로 표현된다. 천인상여란 ‘하늘과 인간이 서로 함께한다.‘라는 뜻이다. 한나라 때의 유학자 동중서와 조선말기의 동학사상가 최시형이 각각 다른 맥락에서 쓴 말이다. 특히 최시형은 하늘과 인간의 상호협력이라는 의미로 천인상여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동학의 천인상여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지구와 인간의 상호행위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가 지구에 영향을 끼치고, 지구의 행위가 인간에 영향을 끼친다."라는 것이 천인상여다.
인류세 시대에 인간은 지구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고, 지구 역시 인간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인간과 지구의 힘이 대등해지고,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가 아프면 인간도 아프고, 인간이 병들면 지구도 병든다. 지구와 인간은 한 몸이고 서로 돌보는 사이다. - P47

이름부터 흥미로운 ‘에코 페르소나 워크숍‘은 자연과 생태와 연결된 나의 진짜 모습, 숨겨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는 프로그램으로 청냔허브에서 지원을 받아 진행했다. 브랜딩 회사에 오래 다녔던 친구와 함께 송포어스를 열기 전에 무중력지대 G밸리에서 유사한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회차를 늘려야 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아서 다시 시도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행사에 참여하신 분들도 이렇게 스스로를 깊이 관찰해보는 환경 프로그램은 처음이라는 소감을 나누어주셨다. - P96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짧은 인연이 끝난 후에도 그 소중한 감정이 휘발하지 않고 온전히 마음 속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글이나 사진, 이야기가 담긴 소품, 추억의 장소, 혹은 집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필요하다. 불안정한 기억과 순간적 감정은 사물에 정착할 때 객관적 거리를 얻어 영속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가진 집단기억은 충혼탑 같은 거대한 기념비나 공식적 의례를 필요로 하지만 개인의 내밀한 기억은 작고 친밀해서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는 사사로운 것들에 잠들어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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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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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규범 체계에 맞서 자신이 처한 실존의 총체적이고도 구체적인 상황 한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몸의 외침과 목소리의 외침 사이에 어떤 차이도 알지 못한다. ‘그림자‘로 존재하고 일하며 느끼던 사람들이 이름을 부여 받고 권리를, 자신의 몫을 찾는 과정은 언제나 동시에 언어 투쟁의 과정이다. - P211

돌봄권이라는 새로운 권리는 돌봄의 주체를 구성해내는 데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각자가 시민의 자리에서 돌봄권의 주체로 자신을 재발명해야 한다.
권리를 외친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면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사회적 인프라, 자기와 돌봄자를 고립과 빈곤으로 내모는 노동시장과 복지 수준, 사회문화적 감수성과 태도, 24시간 요구되는 돌봄을 몇 시간에 한정하려는 사회서비스, 돌봄을 가족의 책임과 성별화된 역할로 돌리는 지배적인 통념. 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212

자기는 의존하지 않는다고, 자립적이라고 자부해온 사람들이 돌봄의존자의 ‘외침‘과 소통하면서 보편적 의존성과 관계 속의 자율성을 깨닫는 것이 한 축이라면, 돌봄에 의존한다고 해서 침묵의 세계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외침은 계속된다는 것, 그 외침이 기존의 권리 체계를 보다 인간화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데 핵심 요소라는 것이 다른 한 축이다. 일방의 결단이나 실천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면서 서로에게 적응하며 변화하는 것이 돌봄권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 P214

그런데 자기결정/권과 관련해 ‘조력사(안락사, 존엄사)’가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소위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결정한 내용만을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고 여기고, 그 결정권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해석하는 문제는 더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태의 ‘자기‘가 있다. 그는 언젠가 사고, 노화, 질병 등으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신체 능력을 상실할 ‘자기‘를 염려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되면 살고싶지 않으니 깔끔하게 살다 떠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미리 결정해놓는다.‘ 이때 자기결정권의 주체는 병들고 신체·정신 장애가 있고 늙은 자기를 분명 자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럴 때 이성적 자기가 ‘행사하는’ 것만 자기결정이고 취약한 상태의 자기가 ‘행사할 수도’ 있는 그것은 자기결정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마치 이성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만 ‘자기‘가 유지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특정 맥락에서 자기가 포기하려는 것이 치료나 삶인지, 누군가가 해줘야 할 마지막까지의 돌봄인지 묻고 싶다. - P222

돌봄과 관련해 우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을 쌍방향에서 행하기, 즉 호혜적으로 순환시키기,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 사람을 돌봄 실천의 경계 밖으로 내치는 것을 금지하기, 돌봄 수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시민 개개인의 주체성 형성에 필수 요소가 되게 만들기 등등이 주관의 상태, 자발성, 처지, ‘숙명‘ 등을 넘어서 객관화를 동반하는 문화적 코드와 사회적 대본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동학의 발전소는 ‘신뢰의 호혜성‘이다. 상품의 교환을 넘어서 신뢰가 계속 호혜적으로 이어지고 파생됨으로써, 신뢰는 정동적으로 전염되고 더 많은 신뢰와 사회적 관계/연대를 생산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서 ‘사회적‘은 societal(제도와 구조), socius (벗과의 교제)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 P250

그래서 그냥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아니라 ‘정의로운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다. 시민들 ‘모두‘가 참여해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가면서 고치고, 또 새로운 상상력으로 다른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사회, 시장으로 빠르고 넓은 길이 나는 것을 막고, 작은 모색의 골목들을 만드는 사회가 돌봄 사회이기 때문이다. - P282

누구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일 권리가 있다. 현실은 다르다. 많은 사람이 국적, 인종, 성정체성, 젠더, 지역, 신체 상태 등을 이유로 정치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이 배제는 구조(societal, 통합된 사회적 체계)와 벗들과의 관계(social, 사회적 교제), 두 차원에서 일어난다. social 차원의 두툼한 연결을 통해서 societal 차원의 방어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벗들이 함께 하는 장소인 사회에서는 ~하기(doing)와 있기/존재하기 (being) 사이에 적대적인 경계를 세우지 않는다. 신자본주의 문화에 물든 우리는 임금 생산노동을 하는(doing) 사람만이 존재한다고(being) 생각한다. ‘그냥 있을 뿐인‘ 사람은 사회구성원으로 세지 않는다. 그러나 ‘하기‘와 ‘그냥 있기‘ 사이를 돌봄이 매개할 때, 존재는 실존이 된다. ‘그냥 있기‘란 없으며 존재하기의 무수한 형태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하기와 있기가 돌봄을 통해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어 ‘삶’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돌봄을 어딘가에 뚫린 구멍, ‘하기‘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한 대책쯤으로 여기는 건 심각한 오류다. 쓸모 있는 생산을 하는 사람도 하지 않는 사람도,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이런 존재는 관계적 실존을 산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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