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의 심리감각이란, 뇌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가 말하는 ‘감정‘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무섭다‘라는 감정을 느낄 때, 동시에 ‘신체변화‘(이 책에서 말하는 ‘신체감각)로서 몸을 경직시키거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다수의 사람은 이 때 감정의 결과로 신체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마지오의 가설에 의하면 신체변화가 먼저 일어나고 그것을 뇌가 ’감정‘으로서 받아들인다. 즉, 무서운 것을 보고 우선 특유의 신체변화가 생기고, 그 후에야 무서움의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본 책의 논의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P25
다만 일단 패턴화된 것이 그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 꽤나 동요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겨우겨우 결정해낸 구체적인 세부 행동 패턴을 지킴으로써 헤매지 않고 행동하고 있지만, 정말 조금이라도 환경이 변하면 그 패턴에 적응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몸 상태가 나빠지거나 한다. 왜냐하면 기껏 넘쳐흐르는 많은 선택지들 속에서 ‘이런 때에는 이 행동‘이라고 일대일로 세밀하게 추려두었는데, 그 매듭이 부서져 버림으로 인해 급격히 많은 선택지들로부터 하나 하나의 행동을 골라야 하는 처음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화장실 다녀온 후에는 손을 씻는다‘라는 습관은 나에게 있어서 헤맬 일 없이 자동화된 <행동의 정립 패턴>이 되어 있다. 하지만 ‘언제나 있던 장소에 수건이 없다‘라는 일이 일어나면 그 순간 ‘손을 씻을까 어떡할까. 손을 안 씻을 거면 위생적으로 괜찮은 걸까. 손을 씻는다면 수건을 쓸까 어떡할까. 수건을 쓰는 거면 여분 수건은 어디에 있는 걸까. 수건을 안 쓸 거라면 젖은 손은 어떻게 해야 되나‘와 같은 상태에 빠진다. 결정해야만 하는 많은 선택지가 일제히 작동되는 것이다. 이러한 ‘평소와 다르다‘는 변화는 사소하다 여겨지는 것이어도 큰 문제로 느껴진다. 아니, 사소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일상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로써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 P46
이렇게 하여, 외계의 모든 사물은 우리들에게,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소개‘를 해 온다. 또 동시에 사물은, ‘먹을래?‘ ‘던질래?‘ ‘걸을래?‘등, 나의 행동선택을 독촉하는 자기주장도 해 온다. 이와 같이 사물이 사람에 대해 행동을 재촉하는 모습을 생태심리학의 전문용어로 <어포던스>라 칭한다고 한다. - P71
일정 기간 ‘평범하게 이야기가 가능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바뀌는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파악해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라는 어느 하나의 캐릭터로 [일관되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미세한 조정에 기운을 배분해야만 한다. 발성법, 말투, 어휘, 이야기의 간격, 말하는 속도, 웃는 방식, 눈 움직임의 조정, 손가락의 움직임. 그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인격(캐릭터)으로서 일관성이 있는지, 혼자 들떠있거나 주눅들어 있지는 않은지, 깔보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지, 남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과도하게 연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의 체크가 상시로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사교는 나중에 나에게 큰 공황을 일으킬 정도의 허들이 높은 작업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사교를 끝내고 귀가하면, 자기상도 자아상도 해체된 채 ‘일상의 나는 어땠었지?‘하고 심신이 뿔뿔이 흩어져 간다. ‘진짜 열심히 사교적으로 움직였지만, 그건 내가 아니야‘하고 몸이 토악질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교 중에 내린 자신을 향한 많은 행위 지령이 재생되어, 기억으로 머리가 포화하고 머리가 내압으로 부풀어 올라 깨질 듯한 느낌으로 고통받는다. 즉 사교용으로 만들어낸 스스로의 캐릭터에 의한 침입이 시작되는 것이다. 타인의 캐릭터의 침입이 ‘식중독‘이라면, 필시 이것은 ‘자가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 말할 수 있는 자신이라니 역시 거짓말쟁이었어‘, ‘그런 식의 나로 있을 것이었다면, 차라리 무리해서 말할 수있는 척 같은 거 안 했으면 좋았을 걸‘하고, <1인 반성회>를 하게 된다. 이러한 평범한 척을 통해 내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이나, ‘다른분이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대요‘라는 등의 말을 들은 새벽에는, 난 사라져 버리고 싶어진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승인된 자신은 어림짐작하여 표현하고 있는 ‘평범한 척‘의 캐릭터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으로부터 소외받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항상 그 캐릭터로 있을 수밖에 없는 건가‘, ‘매번 거기까지 무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하며, 슬프고 힘들어져 오열이 시작된다. 거부하는 몸이 이물을 토해 내려 한다. 그 때문에 더 이상 누구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아지고, 심할 때에는 1주일에서 10일까지도 방에 처박히기 일쑤인 생활을 하게 된다. - P122
그렇다 해도 나도 일단 사람과 만날 때에는 혼신을 다할 각오로 상대에게 집중하고, 머리를 풀가동시켜 단편적인 많은 미세한 행위에서 의도를 길어올리려 노력은 하고 있다. 따라서 상대가 이야기하고 있는 ‘언어 그대로의 내용‘은 보통 이해하고 있으며, ‘아마 상대는 이런 식으로느끼고 있을 거야‘라는 것도 어찌어찌 짐작은 된다. 하지만 결국 ‘그 짐작이 확실한지 아닌지 몰라‘라는 점이 나를 불안 덩어리로 만들고 얼어붙게 한다. - P139
이와 같이 ‘의미의 정립‘ 단계에서 얼어붙어 있는 경우 그 장소에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발언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어려워, 더욱이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어떻게 말할까‘ ‘목소리는 낼 수 있을까‘ ‘수어를 쓸까‘라는 구체적인 ‘행동의 정립‘ 단계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 결과 ‘평범한 척‘으로서 사전에 결정해 놓은 행동 표출인 ‘평소의 사교적 미소‘를 그럴듯하게 지어 보이게 되고(4장 참조), 즐거워 보이는사람들의 대화를 생긋생긋 방관하게 된다. 때로는 ‘평범한 척‘으로 위장하지 못하고 신기한 듯 있거나 얼어버림 그 자체인 상태로 넋이 나간 채로 있거나 하는 일도 있을지도 모른다. 지치고 집중력이 끊겨 힘든 나머지, 스윽 하고 그 장소에서 사라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는 그 장소에 속하지 못하는 감각이 드는데, 이는 이를테면 눈앞에서 돌고 있는 단체줄넘기에 들어가는 방법도 타이밍도 몰라 뛰어들지 못하는 느낌과 유사하다. 그 외에도 ‘영화같이 스크린 저편의 닿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든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세계를 유리 너머로 바라보는 느낌‘, ‘수중에서 밖을 바라보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나 자신도 하고, 다른 당사자들로부터도 자주 접하곤 한다. - P140
아무래도 나는 ‘4차원 소녀‘를 흉내 내고 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상태로 불안해하고 자신감을 상실해 왔던 모든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도대체 나는 뭘까.‘ 그에 대한 답은 ‘남들보다도 신체의 안과 밖의 감각을 세밀하게, 대량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일 듯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어. 그렇게 느끼는 나는 분명 어딘가가 이상한 거야‘하고 생각해왔던 여러 감각들도, 이제는 ‘없는 것‘이 아닌 ‘있는 것‘으로서 인정해도 될 것이다. 이는 나를 조금은 긍정적이고 밝은 세계로 인도한다. 내가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것, 느끼고 있는 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런 식으로 인지하고 있으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영문 모를 어두운 세계‘가 아닌, 느끼고 있는 대로의 모든 것을 믿어도 되는 또렷하고 알기 쉬운 세계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 P169
물론 같은 신체를 가진 것이 아닌 이상, 완전히 같은 패턴을 공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패턴을 회의적으로 살피고, 분해하고, 또 새로이 재정립하는 ‘자폐적인‘ 작업을 상호 간에 중첩시켜 나감으로써 서로 다가갈 수는 있으리라. 많은 독자분들이 자신의 패턴을 분석하고, 다른 신체를 가진 타인의 세계를 상상해보며 이 책을 읽어 준다면 기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이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 P206
상호신체성이란 메를로-퐁티가 개발한 용어로 , ‘상대의 몸에 생기는 것과 유사한 상태가 자신의 몸에도 생기는 몸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유사하게, 양육의 실천을 논하는 책에서 무토 다카시는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표정이나 몸의 동작을 공유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이라고 하면서, "마음과 몸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어" "타자와 같은 움직임을 하는 것"은 "다양한 마음을 잇는" 것이라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같은 움직임을 취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내수용적 신체감각에 의해, 타자에게 있어서는 시각으로 호소하는 것에 의해 (...) 친밀함이나 공동의 감각에 확실한 실재감(實在感)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논의와 구마가야 씨의 태도에서 추측하건대, 몸을 [다수가 따르는 방식에 맞춰,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상호신체성에 의해 비슷한 움직임을 함으로써 서로간에 비슷한 심리감각을 느낄 수 있는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즉, <상호신체성에 의한 움직임의 공유→심리감각의 공유→장(場)의 공유→친밀함과 공동감각>이라는 흐름이 있는 것은 아닐까.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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