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하버드 아동 사별 연구소의 J. 윌리엄 워든에 따르면, 돌고래가 짝이 죽은 뒤에 먹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고 한다. 기러기는 짝을 잃으면 짝을 부르며 날다가 방향을 놓쳐서 길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사람도 비슷한 반응 패턴을 보인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미 알던 사실이었다. 사람도 찾아 헤맸다. 먹지 않았다. 숨쉬기를 잊어버렸다. 산소포화도가 낮아져 의식이 혼미해지고 흘리지 않은 눈물 때문에 부비강이 막혔으며, 결국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귓속 염증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찾게 됐다. 집중력을 잃었다. "1년이 지나니까 겨우 신문 헤드라인을 읽을 수 있었어." 3년 전에 남편을 잃은 친구한테들은 이야기다. 인지 능력이 감소했다. 헤르만 카스토르프처럼 사업을 망치고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당했다. 자기 전화번호를 잊어버리거나, 신분증을 깜박한 채 공항에 갔다. 몸이 아프고, 쇠약해지며, 심지어는 헤르만 카스토르프처럼 죽고 말았다. 이렇듯 ‘죽음‘에 이르는 현상이 여러 연구를 통해 기록되었다. - P63
비애는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장소였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예상하지만(알지만), 상상한 죽음 직후 며칠이나 몇주가 지난 다음의 삶이 어떠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 며칠이나 몇 주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죽음이 급작스레 닥친다면 충격을 받으리라고 예상은 하지만, 이 충격이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혼란에 빠뜨리리라는 건 모른다. 탈진하고 슬픔에잠기고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리라고는 예상한다. 우리는 실제로 미쳐 버릴 것으로는 예상치 않는다. 남편이 곧 돌아올 테니 그의 구두가 필요하다고 믿는침착한 고객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가상상하는 비애는 ‘치유‘가 기본형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지배적이라고, 최악의 순간은 처음 며칠뿐이리라고 생각한다. 가장 힘든 순간은 장례식이고, 이후에는 치유 과정이 시작될 것으로 믿는다. 장례식을 앞두었을 때는 ‘버틸 수 있을지,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을지,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다들 말하는 ‘의연함‘을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한다. 그일에 대비해 마음을 굳게 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조문객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을까, 내가 그날 옷을 챙겨입을 수나 있을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으리란 걸, 겪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장례식이 일종의 진통제가 되리란 것, 다른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 행사의 엄숙함과 의미에 파묻혀 있을 수 있는 일종의 마약성 퇴행이 되리란 걸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한없는 결핍, 공허, 의미의 부정, 무의미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연속(이게 상상한 비애와 실제 비애의핵심적인 차이다)도 겪기 전에는 알 수 없다. - P249
비애에 잠겨 있는 사람은 자기 연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자기 연민에 빠질까 봐 걱정하고, 겁내고, 그런 조짐이 비치면 스스로 채찍질한다. 우리 행동이 지난 일에 연연한다‘라고 할 법한 상태를 드러낼까 봐 겁낸다. ‘지난 일에 연연하는 것‘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혐오를 느낀다는 것도 안다. 눈에 보이게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그런 일이 부자연스러운 일로, 상황을 통제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사라졌는데, 전 세계가 텅 비었다.’ 필리프 아리에스가 [죽음의 역사]에서 이런 혐오감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도 그 심경을 입 밖에 내어 말할 권리는 없다. 우리가 느끼는 상실은 죽은 사람이 경험한(혹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지만 경험하지 못한) 상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계속 스스로 상기한다. 이렇게 생각을 교정하다 보면, 오히려 자아 성찰의 심연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된다. (나는 왜 예상을 못했나,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인가.) 자기 연민을 묘사할 때 쓰는 언어를 보아도 우리가 느끼는 강한 혐오감을 알수 있다. 자기 연민은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것이고, 아기처럼 손가락을 빠는 행동이고, ‘흑흑, 불쌍한 내 신세‘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며, 자기 연민을 느끼는 사람은 그 상태에 흠뻑 젖어 심지어 탐닉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연민은 가장 흔하면서 또 가장 보편적으로 매도되는 성격 결함이다. 파괴적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헬렌 켈러는 자기 연민을 ‘우리의 최악의 적‘이라고 했다. 자기를 가여워하는/야생동물은 본 적이 없다, D. H. 로렌스가 쓴 4행짜리 훈계 글의 일부이다. 자주 인용되는 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극히 편향적이다. 작은 새는 얼어 죽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더라도/자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리. - P254
나는 이 해를 끝내고 싶지 않다. 하루하루 지나서 1월이 2월이 되고 2월이 여름이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존의 모습이 덜 생생하고 덜 분명하게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 일이 지난해에 일어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살아 생전 존의 느낌도 멀어지고, 심지어 ‘흐리해져‘, 내가 존 없는 삶에 적응하는 데 도움 되게끔 약해지고 변질할 것이다. 사실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해 내내 나는 지난해 달력을 따라 살았다. 작년 이날 우리가 무얼 했나, 저녁은 어디에서 먹었나, 한 해 전 오늘이 퀸타나의 결혼식을 끝내고 호놀룰루로 날아간 날 아니던가, 오늘이 파리에서 돌아온 날 아닌가, 오늘이 그날 아닌가. 나는 오늘 깨달았다. 작년 이날의 기억이 처음으로 존과 함께하지 못한 기억임을 작년 오늘은 2003년 12월 31일이었다. 존은 작년 이날을 맞지 못했다. 존은 죽어있었다. 렉싱턴 애비뉴를 건너다가 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왜 우리가 죽은 사람을 살려두려고 하는지 안다. 그들을 우리 곁에 두려고 살리려 하는 것이다. 나는 또 우리가 살아가려면 죽은 사람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그들을 보내 줘야만 하는 때가, 그들을 죽은 채로 두어야만 하는 때가 온다는 것도 안다. 그들이 테이블 위의 사진이 되게 해야 한다. 신탁 계좌의 이름이 되게 해야 한다. 물 위에 띄워 보내야 한다. 그걸 안다고 해서 존을 물 위에 띄워 보내는 일이 조금이라도 쉬워지지는 않는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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