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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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사회주의 이념이고 공산주의자가 모두 독립운동가라는 일반화는 옳지 않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야만적
통치와 노동자의 인권이 무시된 시기에 노동투쟁은 생존과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이었
던 것이나 노동자 권익을 위한 여러 규제가 있는
오늘날의 노사간의 극단적 대치국면은 적절치 않다.
국내 최고의 연봉과 복지혜택을 받고 있는 대기업의 노동자 위에 군립하며 단결된 힘을 남용하며 귀족 행세를 하는 노조 지도부의 선넘는 투쟁의 진의는 명약관화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해야 파업이 가능하고 지도부의 역할이 있게된다.
설사 파업이 전체에 더큰 이익이 될지라도 개인의
동조가 강제화 되거나 정치화 되어서는 안된다.

기능과 숙련도가 요구되는 피혁, 주물, 고무제품을
제조하는 회사에 비하여 표준화, 전문화, 분업화된
자동차 공장의 조립라인의 경우 높은수준의 기능 숙련도를 요하지 않음에도 파업이란 권리를 남용 함으로써 중소기업 노동자에게는 위하감을, 소비자 에게는 비용부담을 기업에는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노조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다면 노사간 건설적 이고 미래지향적인 협의와 협력을 통해 평생 안정 적인 일터가 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존해야한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이야가하는 자를 멀리하라는 니체의 말과 유토피아를 주장하던 공산주의가 멸망 했음에도 그것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광신적 으로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미래를 위해, 사회를 위해 현재의 내가 희생하기를 강요하는 이념에는 개인의 권리나 인권이 없음을
보아왔다.

불의에 항거하며 앞장선 사람들의 희생이 대단 하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은 모두 친일파 내지는 기회주의자로 보는 관점은 옳지 않다.
처자식을 지키기 위해 불의에 눈감는 결심 또한 가정이라는 사회를 지키려는 義氣라 본다.
가정을 버리며, 가족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잘하고 좋은 세상만을 꿈구는 것은
이상주의자이거나 무책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큰 사회를 위함만이 옳다면 인류를 위해 국가를 버리는 행위는 매국이 아닌 평화주의자일까?
국가라는 전체주의에 사로잡히면 개인도 세계도
없는 맹목적 국수주의자가 된다.

피해자는 善은 아니다. 약자는 억울하니 무슨 일을 해도 용납한다는 사고는 결국 彼我를 善惡으로 구분하는 二分法的 갈등사회를 양산한다.

이진오가 어떻게 직장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묘사 없이 피해자 코스프레는 설득의 명분이 없다.
이백만 가문의 서사에서 가장 임팩트 없는 이진오
는 소설의 핵심도 아니고 떼만쓰는 인물인듯 하다
합당하고 합리적인 타협안이 아닌 떼쓰기는 애들 이나 하는 유치한 행동이다
이진오의 쓰임새가 없는 것이 개인의 문제라면
복직을 한들 기생충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고공농성 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회사를 과감하게 버리는게 좀더 의기로워 보인다.
그렇게 오래도록 매달려서 항복을 받아낸들 자랑
스런 무용담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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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6 09:23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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