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이후 대한민국은 일본을 답습하고 있다는 우려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길을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아닌가 싶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을한 1853년으로 부터 15년만인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한 개혁 그리고 불과 3, 40년만에 청나라는 물론 러시아 발틱함대를 패퇴시키고 아시아 맹주로... 결국 패망을 자초 했지만 미국과 맞장을 뜨는 대단한 나라가 되었음은 놀랍다. 우리나라가 60년대 인당 국민소득 70불의 극빈국에서 오늘날 반도체, 조선, 자동차, 방산에 이르기 까지의 눈부신 발전을 기적이라 자화자찬하는데 일본의 발전속도와 비교 할 수 있을듯 하다
도쿠가와 에도막부이래 200여년간의 평화시기 동안 상업의 번성과 네덜란드를 통해 세계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은 은둔의 조선과는 달랐다. 미국의 흑선이 들어오기 그 이전부터 개화 할 수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14세기에 전래된 성리학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자조 할만큼 조선의 유학은 특히 유별났다.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되는 스승을 구심점으로 파벌이된 패거리는 정쟁을 만들었고 반복적인 환국이 만들어내는 피바람으로 인한 보신주의가 고구려 유목민족의 기상을 초식의 농경문화로 굳어지게 된 듯 하다
반면 태평시대 임에도 전체인구의 7%에 달했던 사무라이는, 도시 하급월급쟁이 하급서리화 되었으며,
18세기 중엽이후 유학을 접하면서 개혁을 원하고 개혁 할 수 있는 행동의 주체가 된다.
과거를 통한 등용의 기회가 없었고, 조선과 달리 학맥이 약한 사무라이 지식층은 유학을 통해 존왕양이 그리고 부국강병을 모색한다. 당시 막부의 무능은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는데 큰 걸림이 되지 않은점과 脫亞入歐하겠다는 허영심 그리고 청, 필리핀, 인도 등을 식민지화하여 아시아의 패주가 되겠다는 대망은 우리에겐 아픈 역사가 되었지만 왜인들의 저력이 참으로 대단했다고 생각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