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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후안 엔리케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세계사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윤리의 절대적 기준은 있는가? 얼마 전까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은 절대적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신념 이라기 보다는 이해관계에 따른 진영간
이전투구의 당사자들이 我是他非하는 정치꾼들이야
말로 이기심이란 가치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 같다.
즉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편인지 남의 편 인지에 따라
판단하는 그들은 도덕기준은 비록 상대적 이지만 권력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행동으로 지나칠 정도로 절대적이라 생각된다. 단지. 도덕적 감정은 있으되 죄의식이나 良心이 없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수오지심이 없는 자들은 어떤 잘못에도 당황하지 않고 수치심이 없어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데 이를 소시오 패스라 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시의적절(時宜適切)해야 한다. 예전에는 맞고 지금은 틀렸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 시대의 윤리적 잣대와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화된 시점에서 동일한 잣대로 평가 함은 적절치 않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를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라 판단하여 제거 하였고, 독립투쟁을 했던 북한 지도부 대비 체제에서 열위 했던 이승만은 친일의 군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제주 4.3사태 등의 무리수로 을 수만명의 양민을 학살 하였다. 한때 해외 독립운동가 였으나 그의 이기심으로 자행된 무력탄압의 행위는 전두환보다 심했지만 현시점의 평가는 건국 대통령이라 일컬어 지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와 신하들은 척화론과 주화론으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마지막 한사람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론의 대표자인 김상헌은 대단히 애국적인 듯 보이지만 만백성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반인륜적 인 정치인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백성들로서는 민족의식이 성숙되지 않았으며 단지 두려웠던 것은 자신의 목숨이나 재산이었지 종묘사직의 안위는 아니었다. 조선의 가렴주구 상황에서 당장의 먹거리가 궁했던 극빈의 백성들은 조선의 왕조가 청이나 왜나라 보다 나을 것도 없다고 인식 하였으 며, 무능했던 임금과 신하들의 고집스런 명분이 전쟁을 초래케 함으로써 수십만의 양민을 노예로 잡혀가게한 역사의 죄인이라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자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업적으로 인해 인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 받아지는게 정당한가? 다양한 이민족의 정복으로 헬레니즘과 같이 보다 풍성해진 문화가 당시 그들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쓰러져 죽어간 생명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 볼 수는 없다.
중세기 서양에 있어 신은 모든 가치나 판단 기준의 중심에 있었다. 신이 사람을 창조했는지 사람이
신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해답은 없으나, 신의 존재 또한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아브라함 신은 아브라함 가족신이었고 모세의 신은 부족신이었다. 당시 애굽 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을 출애굽한 것은 애급을 점령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수십년만에 가나안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들을 몰아내고 터전을 잡는다. 예수는 유대인은 물론 인류의 죄를 사함을 받기 위해 로마 총독에게 십자가 형을 받았다. 원죄를 로마 총독으로부터 사함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부족신에서 AD313년 로마의 국교로 공인됨으로써 대륙의 신으로 거듭 나게 되었다.
일천억개의 은하중에 하나인 우리 은하에 있는 일천 억개의 별중에 하나인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여러 행성중의 하나인 지구는 티끌처럼 작다. 신의 권위는 대륙을 넘어 지구, 은하, 우주 까지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구약의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물로써 그리고 향후 불로써 심판하겠다고 예정해 놓으셨다. 한다면 하고 마는 정의로운 하느님인데 비해, 예수님은 자애롭고 나누시고 용서 하시며 모든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이 믿었던 아버지 하느님이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은 구약의 하느님과 같으신 분인가 알 수 없다.
인간이 공포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신에 의지한다.
신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가지기도 하고, 그 신이 없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혹세무민하기도 한다. 감히 불경스럽게 신의 존재와 권능을 의심하였던 자들은 마녀가 되어 불태워졌다.
동양은 삼라만상은 움직임이 극에 달해 양이 되고 결국 고요해 짐에 음이 되었으며, 음양은 오행을 낳고 오행은 선남선녀를 낳고 세상을 열었다는 우주만물의 이치(元亨利貞)를 말하며, 이러한 하늘의 이치가 곧 인간의 本性 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라는 인간중심의 사상이나 弘益人間은 인간을 귀히 여기는 동양의 정신이야 말고 타협되지 않는 절대신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중심의 주체적인 밈이라 본다.
동서양의 창조에 대한 관점은 상이하나, 만물을 창조하신 신은 인간세상에 대하여 더이상은 관심을 두지 않음이
맞지 않을까 싶다. 권선징악이 순리가 아님에 대하여
죽고 난 이후에나 심판을 받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좀
어설퍼 보인다. 가보지 않은 아무런 증거가 없기에
불지옥, 유황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혹세무민은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인 경고이며 천명으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에 말살 되었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과 비슷하고 유사한 것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다. 결국 위협 된다는 공포감이 그들의 종족을 말살했을 것이다.
인간에 의해 가축화된 개(犬)가 다양한 種이 있음에도 인간은 단지 피부색이나 골격 등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단일종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본다.
단일종임에도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이 남미에서 저지른 학살은 그러한 예이며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판단한 흑인을 가축화(노예에 대한 소유권) 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알고 있다.
선거권은 물론 식당, 화장실, 학교, 버스를 타는 것에서
조차도 철저히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모두
그들의 가정에서 배웠으며, 이는 선조로부터 유전된 밈(Meme) 이라 할 수 있다.
노예해방을 이끌었던 링컨조차도 노예의 인권이 아닌
공업지대 북부지역에 대한 정치적 입지를 위한 정치적인 전략 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랬던 구미선진국들은 이제는 후진국들의 아동의 노동행위를 반인권 이라는 명분으로 선진국 산업에 위협요인을 제거하려는 정책을 옳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아동의 착취를 걱정하기에 앞서 아동의 생존권을 보호 해줄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즉 표면적으로는 아동을 착취하여 생산한 기업의 제품을 사주는게 아동을 도와주는 냉정한 이기주의자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촉탁소년이나 지적 장애인의 범죄에 대하여 강한 처벌이 재발을 줄이지 못한다는 통계를 근거로처벌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방의 주장이 있다. 몰라서 저지른 범죄로 한인간의 인생아 파탄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야 하는가? 잘못은 없지만 리스크가 있다면 감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안전을 보장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약사범은 가중처벌을 받는 반면 음주 범죄는 오히려 감형을 받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약이나 알코올 모두 도파민을 분출하도록 함으로써 기분을 좋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약은 본의 아닌 경우도 있으나 알코올은 수년, 수십년 마셔오는 과정에서 주사 등 본인의 습성을 알고도 적절히 제어하지 않고 과음에 범죄에 이르렀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중처벌해야 하는 대상이라 본다. 음주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알코올에 과하게 부과되는 세금 때문이라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직관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에 의하여 형성되어 직감적으로 인지되고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생각이지만, 잘못된 판단일 지라도 전략적 추론이라는 이성은 직관을 합리화 하곤 한다. 개인의 정체성으로 굳어지기까지하는 고집스런 직관으로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자기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반드시 자신의 생각 인지도 불분명하다. 보편적으로 진리라고 알려주는 사회전반의 인식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또는 누군가의 목적에 따라 세뇌된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매트릭스의 세상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는 호접몽과 같다.
이해관계를 떠나 객관적인 시점으로 인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무엇 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면,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론과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사고는 어떨까? 절대적 도덕주의자인 칸트의 정언명령은 융통성이 없고 최대다수의 최대 효용을 말하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지나치게 공산당 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