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인가 - 존엄한 삶의 가능성을 묻다
오종우 지음 / 어크로스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극빈은 죄악이라 했던 도스도옙스키의 생각에 공감이 된다.
인간이 인격과 인권을 지키려면 최소한의 자유와 소유가 있어야 한다. 안빈낙도라도 할 수 있어야 음풍명월이 가능하며 자유와 평등을 논 할 수 있는거다.

로쟈의 하숙방 같은 방에서 자취를 하던 대학1년차에 ˝죄와벌˝의 앞부분을 읽다가, 그 답답한 상황과 주인공인 대학생의 공감되지 않는 생각이 읽기를 중단케 했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데모하다 잡혀 감방으로 또는 전방으로 징집되던 상황을 보며 잡혀가는 당사자보다는 그들 부모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로쟈의 무모한 행동에 화가 났었던 것 같다.
그후 아주 오랜시간이 지나 지금으로부터 몇년전에야 겨우 읽어 냈지만 그때 조차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했던 행간의 의미를 되짚어 주는 친절한 설명을 통해 좀더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듯하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고리대금이 죄악시 되었고 이런 비열한 일은, 유럽인들이 미워하고 싫어했던 유태인들의 전문직종이었다는 점에서 전당포 노파를 벌레같이 보았던 것은 비단 로쟈뿐이 아니라 유럽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반인식 이었을성 싶다.

가진 것이 개뿔도 없는 극빈자가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휴머니즘은, 보통의 사람조차도 이행키 어려운 오지랍 인데 자신이 옳다는 고집스런 생각, 즉 선의나 대의라는 명분만 있다면 더럽고 해로운 벌레같은 인간을 죽이는 것은 당연하므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로쟈와 같은 인간은 너무도 위험하다. 로쟈가 좀더 과격했던 성향의 인간 이라면 히틀러나 폴포트와 같은 독재자나 테러리스트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겠다.

현재 아국에서도 24%(?)를 초과하는 고리대금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는데 금융권에서 대출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고리의 사체를 쓰겠는가?
당장 고리의 급전이 없어 부도가 날 수밖에 없다면 더한 이자라도 주고 빌려야 하는데 법이 규제를 함으로써 즉시 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불법대출만이 해결사가된다. 전당포가 빈자들로부터 이익을 취하지만 로쟈와 같이 빈자들을 위한 금융이었음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휴머니스트 로쟈는 그런 벌레같이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전당포 노파에게는 왜 연민조차 없었을까? 살인의 경험조차 없었음에도 피흘리고 괴로워 해던 모습을 보고도 트라우마나 연민조차도 가지지 않는 로쟈는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싶다

무모한 로쟈로 인해 모친은 한을 품고 죽었을 듯한데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던 스미드리가일로프는 듀나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비록 자살로 마무리 했지만
나름 성공한 마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초반부에 묘사된 소냐의 아버지의 기구한 삶과 딸의 화대로 술을 마시는 무책임에 화도 났었지만 그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영혼에 마음이 시렸다.
결국에는 자살하려는 의도였을것 같은, 마차에 치어 숨음 거두게 되는 장면에 토리노 광장에서 죽어가는 말의 목을 끓어앉고 울음을 터트렸던 니체의 광기어린 장면이 겹쳐지는 건 로쟈가 니체가 말하는 위버맨쉬를 추구하며 구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로 악습을 파괴하는 사자의 캐릭터로 묘사 되었기 때문인가 싶다.

소냐는 로쟈에게 아무런 요구없이 끊임없이 헌신했다.
그렇게 해서 로쟈의 마음에 소냐가 크게 자리 잡았다.
낮추었더니 커진 것이다. 겸손도 사랑을 많이 닮았다
소냐를 사랑하게 되니 자신을 진짜로 사랑 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것이다(p247)

로쟈가 드디어 드넓은 세상을 바라 보았다. 로쟈의 시야가 드디어 확 트였다(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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