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 정글만리를 읽었다. 나온 지 일 년여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떠들썩함이 흐려지지 않는 걸 보면, 찬반양론이 있어 꼭 읽어야 한다고는 못하겠지만, 한번쯤 들춰볼만은 하다 싶다.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과 <아큐 정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400여페이지 세 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송재형과 리옌링이 미국 시사주간지에서 베이징대 학생들을 상대로 한 공개 인터뷰에 참여한 이야기(대학생들의 배짱/1권), 전대광의 시안 방문(우정의 비즈니스/2권), 한국 기자들이 중국 특집을 위해 베이징대 사학과 학생들을 방문 취재+난징대학살 세미나 참가(다시, 용서는 반성의 선물/3권)하는 이야기다. :)

 

중국은 특이한 사회라 보통의 민주국가들과는 달리 조심하고 피해야 할 화제가 아주 많았다. 중국에서는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3대 금기가 있었다. 첫째 마오쩌둥에 대한 험담, 둘째 공산당에 대한 비판, 셋째 대만 독립에 대한 지지. 그리고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젯거리들도 눈치껏 피해야 하는 지뢰였다. - 1권/p.232


"친구로 대하면 친구고, 적으로 대하면 적입니다." - 1권/p.317

 

"중국의 과거는 시안에 있고, 중국의 현재는 베이징에 있고, 중국의 미래는 상하이에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2권/p.379

 

"난징사람들이 일본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크고 뜨거우면 '일본과 전쟁이 붙으면 전 재산을 내놓겠다'고 하겠어. 그것만 가지고도 일본놈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30여만을 학살했는지 증거가 충분하잖아."

......

"그런 집단적 분노와 증오는 뼈저린 공동체험 없이는 형성되지 않는 거야. 유태인들의 병적이다시피 한 국가 건설 욕망의 응집력이 나치 학살의 공동 체험에서 비롯되었듯이 말야. 그건 명료한 제2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해." - 3권/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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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마다 눈물이 묻어있다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이기철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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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을 몇 권째 읽고 있는데...

명시선이라서 그런지 역시 좋네요.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있다>는 제목이 너무 예뻐서 펼쳐들었는데,

백여 페이지 시집이 천 페이지라도 되는 것마냥 한 장 한 장 곱씹어 읽었네요.

다른 명시선도 조금씩 읽어볼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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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5 - 시오리코 씨와 인연이 이어질 때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5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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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 뭐,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지만.

그래서 이 글은 스포일러/미리니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이스케의 고백, 지에코가 내민 손, 그리고 시오리코의 선택.

1권부터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진전되었다. 예상했던 것이지만 담담하지만 꼼꼼한 필치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퍽 만족스러웠다. 지에코와 시오리코 모녀 뿐만 아니라, 이번 편에서는 유독 '가족'에 관련된 느낌이 진하다.

 

떠나간 남편을 찾기 위해 <월간 호쇼>를 팔았다 되사기를 반복하는 부인, 병상의 아내에게 가던 도중 굳이 <블랙잭>을 구입한 남편과 그것을 바라보며 이해하지 못했던 아이, <나에게 5월을>을 둘러싼 형제 간의 갈등과 가족들이 오랫동안 지녀 온 오해…….

 

예상했듯이, 지에코는 무서운 사람이고, 그럼에도 시오리코는 선택했고, 다이스케는 귀엽다(!). 이제 반환점을 지났다고 하는데, 초반부에서는 그림자만 비치던 지에코가 과연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까 하는 불안감도 살짝. 모 인물의 재등장도 겹쳐, 과연 6권은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일지,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는 한 권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뻤어요."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어요……. 지금까지 제 말로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거든요. 글자로 된 누군가의 말들에 둘러싸여있는 편이 훨씬 좋았고요."
가격을 매긴 문고본 표지를 가녀린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사랑의 행방The Abortion』, 신초문고. - p.13

 

"어떤 사정으로 도망친 사람이 자신이 찾아낸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바람……,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도망친 사람이 있으면 남겨진 사람도 분명 존재해요. 남겨진 사람의 마음도 생각해줘야죠." - p.78

 

"지어낸 이야기 안에만 담을 수 있는 마음도 있는 거예요. 만일 세상 모든 게 현실이라면,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나 쓸쓸할 거예요……. 현실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를 읽는 거예요. 분명 신야 군 아버님도 그러셨을 테고요." - p.191

 

"모르면 대답할 수 없는 일도 있어……. 어떤 답을 할지 정했더라도."
"그게 뭐야, 무슨 뜻인데?"
시오리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지켜봐온 나는 안다. 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한번 그렇게 느끼면 시오리코는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다.
나는 턱을 괴고 눈앞의 친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머리는 좋지만 맹한 구석이 있고, 내성적이고 고집불통에 세상살이에도 서툴다. 가끔 뭔가 비밀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고민할 때는 항상 진지했다. 얼버무리거나 적당히 둘러대지 않았다. - p.201

 

"빛나는 계절에 누가 그 돛을 노래했는가. 찰나의 나에게 흘러가는 시간이여……." - p.247 5월의 시, 데라야마 슈지

 

"네? 왜 날 두고 떠난다는 겁니까?"

...

"그게 아니라, 나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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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웃었다 4.5
류재빈 지음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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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웃었다> 4.5권을 읽었다. 2부가 시작되기 전의 외전으로, 두 가지 이야기- 1~4권의 본편 시점에서 미래인 '나르숀 이야기'와 과거인 '백야 이야기'가 실려 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는 솜씨 좋은 장인들의 나라 공국 소녀 나르숀의 이야기이다. 주변의 도적떼로 인해 무너져가는 공국에서는 장인이 되지 않으면 검을 잡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 여자아이라서 나르숀은 검을 들지 않지만, 아버지는 성벽을 지키고 있으며 쌍둥이 두 동생들도 일찍부터 검을 들고 있다. 나르숀에게는 하나뿐인 언니, 예쁘장하며 제멋대로인 나르패와 장녀를 몹시 귀여워하는 어머니 역시 있다. 어쩌면 평범한, 그림처럼 그린 것처럼 화목하지도 불행으로 넘쳐흐르지도 않는, 고만고만한 가족 속에 어느날 외부인이 찾아든다. 아버지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면서 데리고 온 세 소년―그래, 라야와 무무와 기해이다.

 

"딱 보면 아는 건 아버지 쪽이야. 아버지가 우리보다 더 오래 사셨고, 우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겪어 봤을 테니까. 아버지 말씀 새겨듣고 너무 친해지지 마. 어차피 바깥 사람이잖아. 곧 떠날 거라고." - p.63

 

무뚝뚝해 보이는 라야와 달리 입담 좋은 무무를 두고 나르패는 좋은 아이라고 하지만, 나르숀은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 가깝게 지내지 않으려 한다. 존경은 하지만, 한편으로 불만도 쌓이고, 때로는 잘못도 하고. 차라리 결점 있어 완벽하게 보이는 가족상이다. 주인공 일행의 가족들이 워낙 장렬해서인지; 나르패의 반항(...)은 귀엽게 보일 정도다. 무무도, 라야도 여전하다.

나르패는 어딘가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소녀이고, 나르숀은 든든하다. 위연은 멋지다. 위연과 나르숀, 두 사람이 자아내는 일상은 참 아름답고 아기자기할 것 같다. 예술은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당장 죽게 생긴 마당에 예술이 필요한가,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잿개비로 가득 찬 세상, 모래 위에 그려낸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상상한다.

 

 

두 번째, '백야 이야기'. 자애로운 부부에게서 태어난 군석을 지닌 소녀는, 부모가 고른 보좌가 될 만한 소녀 두 명과 함께 성장하여 왕이 되고 그들을 군위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그녀―화왕 아래 찾아든 군석을 지닌 아이. 보통 왕은 찬탈 등을 염려하여 군석을 지닌 아이를 거두지 않지만, 화왕은 아이―백아를 받아들인다. 백아는 군위들에게서 나라의 운영에 관련된 것을 배우고, 화왕에게서 자애를 배웠다. 그러나 그 무조건적인 용서를 내리는 넓고 따뜻한 마음은, 그녀 치세에서 첫 번째 살인자가 나타나면서 일그러지고 만다.


사형 제도는 아직도 찬반 논란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죄에 벌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죄인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에서는 '법을 어겼을 때의 처벌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어떻게 되는지 교실을 통해 그려내었다. <백아 이야기>에서는 법을 만들었으며, 법을 어겼을 때 처벌을 내려야 할 주체가 차가운 잣대 대신 지나친 관용을 보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 준다.

 

"……용서는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화왕이 지친 눈길로 백아를 응시했다.
"용서라는 것은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고 난 후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에요. 그들만이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지, 우리같이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끼어들고 간섭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더 억울하지 않도록, 더 속상하지 않도록, 더 원통하지 않도록, 죄를 지은 자들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도록, 죄를 지을 생각을 못 하도록 법을 바로 세우고, 피해자들을 늘리지 않도록 해야 할 뿐이에요." - p.293

 

"제가 보복 살인을 한 것이 죄라면, 그것은 저의 죄가 아닙니다!"
해나는 무릎을 꿇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말했다.
"어머니를 잃은 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동정을 일삼아 법을 가벼이 여겨, 살인범을 벌하지 않고 내보낸 왕의 잘못이지요!" - p.308

 

"나와 같이 가자."
떨리는 갠지의 어꺠에 백아는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군석은 다시금 열릴 거야. 그때 내 나라를 너에게 보여 줄게. 내가 그토록 원했던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보여 줄게. 내 곁에 서서 지켜봐 줘. 내가 어떤 왕이 되어 가는지, 어떤 나라를 만드는지, 군석이 어떤 색을 가지는지 나라의 이름은 무엇으로 정하는지 네가 지켜봐 줘. 그러다 내가 잘못된 길을 걸어 나가거든 네가 말해 줘. 오늘 내가 했던 것처럼, '왕께서는 잘못하고 계신 겁니다'라고." - p.340

 

5권은 언제쯤 나와줄까. <왕은 웃었다>의 이어질 이야기에 한층 더 기대를 품게 된, 본편에 비해서는 얇지만 짧지 않은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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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리스 타임 5 - Nabi Novel 타임리스 타임 5
박미정 지음, 김유빈 그림 / 메르헨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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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타임리스 타임 5권을 읽었다. 5권에는 챕터 9, 10, 11 세 가지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세 사건의 공통점을 들자면 '가족'이 될 것이다. 그것도 나름나름으로 불행을 안은 그런 가족들. 자신의 앞날을 댓가로 치러서까지 지난날로 돌아가고파 하는 이들의 사연이 밝기만 할 리가 없을텐데도, 이번 권은 유독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이 점점 더 가라앉았다.

 

첫 번째 챕터, 소원을 들어주는 천사를 찾아온 소녀 지은은 엄마를 살려달라고 한다. 보육원에서 맡겨진 채 가끔 엄마와 만나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에 엄마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러 온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죽은 사람이 살아온다면' 이라는 가정은 언제나 달콤하고 공허하다. 아직 그 무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는 그녀의 바람은 천사조차 이루어줄 수 없는 소원이라는 것도, 천사가 소원을 이루어준다 한들 그와 같은 무게의 댓가를 치러야한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바랐다. 이안과 유진은 지은의 보육원에 찾아간 끝에 지은은 죽었다고 알고 있는, 그러나 실은 살아있는 지은의 어머니를 찾아낸다. 그 와중에 지난 에피소드에 등장했었던, 드문 해피엔딩 커플의 이후 소식이 얼핏 비치는 반가운 장면도 있다. 그러나 이 챕터의 주인공격인 모녀의 사연은 여전히 세상이 엄혹함을 드러낸다.

 

"이 세상은 말이에요, 여자 혼자서 애를 키울 수가 없게끔 생겨먹었답니다." - p.101

"자식을 버리는 어미 같은 건, 차라리 죽고 없는 게 나아요." - p.108 /Better Than Yesterday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났던 지은의 어머니, 은지는 두 모녀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으므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새출발을 꿈꾸었다가 잔인하고 모진 소리를 들어야 했고, 은지는 그녀의 앞에 찾아온 기회 앞에서 지은과의 결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 보육원에 맡긴 지은에게 엄마가 죽었다고 알리게 한 것이다. 물론 그런 은지의 마음도 편한 것만은 아니어서, 평생 버린 거나 다름없는 딸 지은을 가슴에서 지워낼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는 아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는 미담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것이 절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그렇게나 흔하게 일어난다면, 굳이 미담이라 불리지는 않을 테니까.

옛날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많이 나아졌다느니, 보육정책에 신경을 쓴다느니 하지만, 여전히 사람 사는 세상 저변에서 여자와 어린아이, 귀속되는 보호자 없이는 그들이 상대적 약자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새삼 현실을 곱씹게 되었다. 다행히 은지는 새로운 삶을 꾸려가게 되었고, 지은 또한 보육원을 나와 좋은 언니의 여동생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지만, 이안과 유진을 만나지 못한 현실의 수많은 은지와 수많은 지은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올 수 있을까. 세상에는 사별이나 이혼 등 불가피하거나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제반사정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과 그 슬하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여럿일텐데, 그들에게 내민 손보다 손가락질이 많으니 마음 한 켠이 새삼 씁쓸해졌다.

 

두 번째 챕터, 시간을 돌리고자 찾아온 유명 소설가는 이안과 계약한 후, 자신이 저지른 죄를 유진에게 고백한다. 시각장애인 동생을 돌보며, 생활비가 필요해 자극적인 글을 썼던 그는 동생이 얼기설기 쓴 글에서 재능을 느끼고, 동생의 글을 고쳐써 발표하면서 유명 작가가 된다. 이제는 동생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쓰겠다며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는 그는, 동생의 것을 훔쳤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뒷수습이라는 건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거다.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는 것뿐이야. 물론 그걸로 자신의 잘못이 없었던 걸로 될 수는 없겠지. 남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잘못까지 없앨 수는 없어. 잘못을 저질러놓고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한다고 그 모든 게 지워지지 않는 건 당연한 거다. 그건 그자가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거지. 그런데 자그마치 과거로 돌아가기까지나 해서 없었던 걸로 만들겠다니. 잘못을 저질러 놓고 그에 대한 대가는 치르기 싫다는 심보로 보이는 건 나뿐인 거냐?" - p.177

"고쳐야 할 잘못이 아니라, 덮어야 할 과거가 있는 거겠지." - p.192 /The Glass Slipper


그러나 사실, 그가 시간을 되돌리고자 한 것은 동생이 작가로 데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교가 될 형제의 글, 영감의 원천이던 동생의 글 없이 형의 글이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이른바 오리지널인 동생의 글이 성공한다면, 그 아류작으로서 비슷한 느낌을 가진 형의 옛 글이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캐릭터의 직업이 작가라서인지, 손윤은 말을 참 많이 한다. 얼핏 그 언변은 퍽 능해 보이지만, 결국 괴변에 지나지 않는다. 허공에 떠도는 유창함은 앞뒤가 맞지 않아 덧발라대던 어구가 논리에 의해 부서지자, 진실의 흉한 속알맹이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손윤은 자신의 말이 제 마음의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무서운,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사람다운 자기합리화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한지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 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사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이란 얼마나 얄팍한지.

두 번째 챕터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챕터에 비하자면 좀 임팩트가 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첫 번째 챕터처럼 지은의 시점과 은지의 시점을 함께 엮어낸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로지 계약자인 형 쪽만이 이야기하며, 계약자가 아니며 피해자이기도 한 동생의 시점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믿고 있던 형에게 자신이 생각해 낸 이야기를 빼앗기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동생의 근저에는 대체 무엇이 깔려 있었을까? 동생은 형을 증오하며 복수하고자 했을까, 그렇잖으면 형이 잘못을 바로잡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롯한 자신의 글을 내놓은 걸까.

어찌되었든 형이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동생이 뒤늦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작가생활을 이어나간다면, 이 두 형제의 우애 앞에 놓인 가능성은 희적인 것보다 절망적인 것의 비중이 커 보여서, 차라리 여기서 끝나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세 번째 챕터, 가장 충격적인 소재다. 카운슬러이며 타로 점 사이트의 주인이기도 한 정원은 열흘 뒤로 시간을 돌려달라고 한다. 이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던 정원에게 대시하던 병원의 미혼남 의사가 갈기갈기 난자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1년여쯤 마음의 부담으로 그의 청혼을 거절하던 정원은 그와 마지막 만났던 열흘 전 싸우고 헤어졌던 것을 후회하며 죽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전하고자 한다.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착각할 법하지만, 그 미혼남 의사의 이름이 살생부에 없는 부자연사라는 점으로부터 시작해 도유와 소율이라는 두 사신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그 색채를 달리한다. 그리고 이안의 과거에 대해서도 퍽 의미심장한 조각들이 드문드문 흩뿌려진다. 그러나 전체 스토리에 이 챕터가 차지할 비중보다도, 죽은 의사의 드러난 추악함에 대한 경악이 더 앞섰다. 이안의 행동이 '사신'으로서 옳냐고 한다면 물론 도유가 부정했듯이 틀릴 테지만, '사람'으로서 옳냐고 하면, 글쎄, 최소한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무어라 적기조차 손가락이 무거워진다. 앞서 첫 번째 챕터에서 유진과 이안 없는 지은과 은지를 가엾게 생각했다면, 이번 챕터에서는 '소율 같은 아이를 만나지 않은' 끔찍하게 운 좋을, 사회의 넓은 그물망 너머에 존재하고 있을 범죄자들을 향한 분노 속에 나의 몫을 감히 얹어 본다. 소설 속에서 여지없이 악이었던 소율을 정의를 위해 소원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사회의 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가족' 이라는 키워드로 압축해볼 수 있을 세 편의 이야기를 읽었다. 타임리스 타임이 5권까지 나오면서 유진, 이안 외에 익숙한 얼굴도 늘어나고 겪은 사건들도 두 자릿수를 넘었다. 이안의 과거사며 명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도 되지 않으니, 갈 길이 멀고 그만큼이나 독자로서 기쁘다. 앞으로 또 어떤 사연을 지닌 이들이 시간을 되돌리고자 어떤 을씨년스러운 폐건물 꼭대기에 찾아들어, 툴툴대지만 실은 마음이 깊은 사신과 범상할 정도로 평범하지만 인정 깊고 귀여운 망량 아가씨와 만나게 될까.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언젠가 이 아이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설령 돌이키게 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뒤를 돌아볼 시간에 앞을 바라보고, 느리고 더디나마 한 걸음씩 걸어나가는 게 사는 거라는 것을.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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