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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리스 타임 5 - Nabi Novel ㅣ 타임리스 타임 5
박미정 지음, 김유빈 그림 / 메르헨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 스포일러 주의
타임리스 타임 5권을 읽었다. 5권에는 챕터 9, 10, 11 세 가지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세 사건의 공통점을 들자면 '가족'이 될 것이다. 그것도 나름나름으로 불행을 안은 그런 가족들. 자신의 앞날을 댓가로 치러서까지 지난날로 돌아가고파 하는 이들의 사연이 밝기만 할 리가 없을텐데도, 이번 권은 유독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이 점점 더 가라앉았다.
첫 번째 챕터, 소원을 들어주는 천사를 찾아온 소녀 지은은 엄마를 살려달라고 한다. 보육원에서 맡겨진 채 가끔 엄마와 만나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에 엄마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러 온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죽은 사람이 살아온다면' 이라는 가정은 언제나 달콤하고 공허하다. 아직 그 무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는 그녀의 바람은 천사조차 이루어줄 수 없는 소원이라는 것도, 천사가 소원을 이루어준다 한들 그와 같은 무게의 댓가를 치러야한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바랐다. 이안과 유진은 지은의 보육원에 찾아간 끝에 지은은 죽었다고 알고 있는, 그러나 실은 살아있는 지은의 어머니를 찾아낸다. 그 와중에 지난 에피소드에 등장했었던, 드문 해피엔딩 커플의 이후 소식이 얼핏 비치는 반가운 장면도 있다. 그러나 이 챕터의 주인공격인 모녀의 사연은 여전히 세상이 엄혹함을 드러낸다.
"이 세상은 말이에요, 여자 혼자서 애를 키울 수가 없게끔 생겨먹었답니다." - p.101
"자식을 버리는 어미 같은 건, 차라리 죽고 없는 게 나아요." - p.108 /Better Than Yesterday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났던 지은의 어머니, 은지는 두 모녀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으므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새출발을 꿈꾸었다가 잔인하고 모진 소리를 들어야 했고, 은지는 그녀의 앞에 찾아온 기회 앞에서 지은과의 결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 보육원에 맡긴 지은에게 엄마가 죽었다고 알리게 한 것이다. 물론 그런 은지의 마음도 편한 것만은 아니어서, 평생 버린 거나 다름없는 딸 지은을 가슴에서 지워낼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는 아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는 미담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것이 절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그렇게나 흔하게 일어난다면, 굳이 미담이라 불리지는 않을 테니까.
옛날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많이 나아졌다느니, 보육정책에 신경을 쓴다느니 하지만, 여전히 사람 사는 세상 저변에서 여자와 어린아이, 귀속되는 보호자 없이는 그들이 상대적 약자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새삼 현실을 곱씹게 되었다. 다행히 은지는 새로운 삶을 꾸려가게 되었고, 지은 또한 보육원을 나와 좋은 언니의 여동생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지만, 이안과 유진을 만나지 못한 현실의 수많은 은지와 수많은 지은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올 수 있을까. 세상에는 사별이나 이혼 등 불가피하거나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제반사정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과 그 슬하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여럿일텐데, 그들에게 내민 손보다 손가락질이 많으니 마음 한 켠이 새삼 씁쓸해졌다.
두 번째 챕터, 시간을 돌리고자 찾아온 유명 소설가는 이안과 계약한 후, 자신이 저지른 죄를 유진에게 고백한다. 시각장애인 동생을 돌보며, 생활비가 필요해 자극적인 글을 썼던 그는 동생이 얼기설기 쓴 글에서 재능을 느끼고, 동생의 글을 고쳐써 발표하면서 유명 작가가 된다. 이제는 동생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쓰겠다며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는 그는, 동생의 것을 훔쳤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뒷수습이라는 건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거다.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는 것뿐이야. 물론 그걸로 자신의 잘못이 없었던 걸로 될 수는 없겠지. 남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잘못까지 없앨 수는 없어. 잘못을 저질러놓고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한다고 그 모든 게 지워지지 않는 건 당연한 거다. 그건 그자가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거지. 그런데 자그마치 과거로 돌아가기까지나 해서 없었던 걸로 만들겠다니. 잘못을 저질러 놓고 그에 대한 대가는 치르기 싫다는 심보로 보이는 건 나뿐인 거냐?" - p.177
"고쳐야 할 잘못이 아니라, 덮어야 할 과거가 있는 거겠지." - p.192 /The Glass Slipper
그러나 사실, 그가 시간을 되돌리고자 한 것은 동생이 작가로 데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교가 될 형제의 글, 영감의 원천이던 동생의 글 없이 형의 글이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이른바 오리지널인 동생의 글이 성공한다면, 그 아류작으로서 비슷한 느낌을 가진 형의 옛 글이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캐릭터의 직업이 작가라서인지, 손윤은 말을 참 많이 한다. 얼핏 그 언변은 퍽 능해 보이지만, 결국 괴변에 지나지 않는다. 허공에 떠도는 유창함은 앞뒤가 맞지 않아 덧발라대던 어구가 논리에 의해 부서지자, 진실의 흉한 속알맹이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손윤은 자신의 말이 제 마음의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무서운,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사람다운 자기합리화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한지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 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사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이란 얼마나 얄팍한지.
두 번째 챕터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챕터에 비하자면 좀 임팩트가 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첫 번째 챕터처럼 지은의 시점과 은지의 시점을 함께 엮어낸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로지 계약자인 형 쪽만이 이야기하며, 계약자가 아니며 피해자이기도 한 동생의 시점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믿고 있던 형에게 자신이 생각해 낸 이야기를 빼앗기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동생의 근저에는 대체 무엇이 깔려 있었을까? 동생은 형을 증오하며 복수하고자 했을까, 그렇잖으면 형이 잘못을 바로잡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롯한 자신의 글을 내놓은 걸까.
어찌되었든 형이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동생이 뒤늦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작가생활을 이어나간다면, 이 두 형제의 우애 앞에 놓인 가능성은 희적인 것보다 절망적인 것의 비중이 커 보여서, 차라리 여기서 끝나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세 번째 챕터, 가장 충격적인 소재다. 카운슬러이며 타로 점 사이트의 주인이기도 한 정원은 열흘 뒤로 시간을 돌려달라고 한다. 이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던 정원에게 대시하던 병원의 미혼남 의사가 갈기갈기 난자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1년여쯤 마음의 부담으로 그의 청혼을 거절하던 정원은 그와 마지막 만났던 열흘 전 싸우고 헤어졌던 것을 후회하며 죽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전하고자 한다.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착각할 법하지만, 그 미혼남 의사의 이름이 살생부에 없는 부자연사라는 점으로부터 시작해 도유와 소율이라는 두 사신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그 색채를 달리한다. 그리고 이안의 과거에 대해서도 퍽 의미심장한 조각들이 드문드문 흩뿌려진다. 그러나 전체 스토리에 이 챕터가 차지할 비중보다도, 죽은 의사의 드러난 추악함에 대한 경악이 더 앞섰다. 이안의 행동이 '사신'으로서 옳냐고 한다면 물론 도유가 부정했듯이 틀릴 테지만, '사람'으로서 옳냐고 하면, 글쎄, 최소한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무어라 적기조차 손가락이 무거워진다. 앞서 첫 번째 챕터에서 유진과 이안 없는 지은과 은지를 가엾게 생각했다면, 이번 챕터에서는 '소율 같은 아이를 만나지 않은' 끔찍하게 운 좋을, 사회의 넓은 그물망 너머에 존재하고 있을 범죄자들을 향한 분노 속에 나의 몫을 감히 얹어 본다. 소설 속에서 여지없이 악이었던 소율을 정의를 위해 소원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사회의 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가족' 이라는 키워드로 압축해볼 수 있을 세 편의 이야기를 읽었다. 타임리스 타임이 5권까지 나오면서 유진, 이안 외에 익숙한 얼굴도 늘어나고 겪은 사건들도 두 자릿수를 넘었다. 이안의 과거사며 명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도 되지 않으니, 갈 길이 멀고 그만큼이나 독자로서 기쁘다. 앞으로 또 어떤 사연을 지닌 이들이 시간을 되돌리고자 어떤 을씨년스러운 폐건물 꼭대기에 찾아들어, 툴툴대지만 실은 마음이 깊은 사신과 범상할 정도로 평범하지만 인정 깊고 귀여운 망량 아가씨와 만나게 될까.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언젠가 이 아이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설령 돌이키게 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뒤를 돌아볼 시간에 앞을 바라보고, 느리고 더디나마 한 걸음씩 걸어나가는 게 사는 거라는 것을.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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