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 명사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위대한 작품
이동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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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작가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의 추천사를 자주 접하다보니 자연스레 "발자크"의 삶이 궁금해졌다.  이 책에서 대략적이나마 접하게 되었다. 

발자크를 얘기할 때 따라다니는 것이 커피, 다작, 그리고 귀족 미망인이다.

발자크는 출판계의 나폴레옹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 16시간 하루 60잔의 커피를 들이켜가며 글을 썼다.    20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전집 <인간 희극>을 미친 듯이 써대 다작이라는 라벨이 따라다닌다.   전집 중 하나가  < 고리오 영감>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못받고 자라서 그런지 모성을 자극하는 여인들이 좋았나보다.  여러 귀족 부인들과 사랑에 금방 빠지고 싫증내는 카사노바였다.   

 

카사노바가 또 있다.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

그에게는 질투의 화신 엘비라라는 부인이 있어 우여곡절이 많았다.  푸치니를 돌봐주던 간호사를 불륜관계로 몰아붙혀 간호사를 자살로 이끌기도 해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부인의 눈을 피해 여러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는 능력을 보여주어 오페라계의 카사노바로 등극한다.  

 

카사노바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솔로남이었던 명사도 있다.  바로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다.

안데르센은 적당한 밀당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큰 코 작은 눈에 비호감형 인상인데다가 첫만남부터 너무 들이대니 여성들이 기겁을 할 수 밖에..   평생 세번의 짝사랑만 하다가 사랑 한번 못받아보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인어공주>의 결말에 영향을 미쳤나보다.  

 

세번의 짝사랑만 한 명사가 있다면 결혼을 세번한 능력자도 있다.  "찰리 채플린".

그의 세번째 부인은 36살이나 어린 우나 오일..  그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유진 오닐의 딸로, 아버지의 반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고 둘은 33년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성기능이 약했던 명사도 있다.   서스팬스 영화의 대가 "히치콕" 감독.  

히치콕은 시나리오 작가와 결혼하지만 남성 성기능이 약해 부부생활은 거의 하지 못하고, 그의 성적 욕망은 카메라 앵글 속 여배우를 통해 해소되었다고.  그것도 모두 금발의 여배우로만..

그가 키운 여배우가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가 이탈리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결혼하여 떠난 이후엔 그레이스 켈리, 그녀도 모나코 왕비가 되어 떠난 이후엔 킴 노박이다.  이들을 자기 작품에 출현시켜 사랑을 표현했다.

 

여자 카사노바도 있다.  카사노바가 인상적이었나보다.  소개하는 인물들이 ㅎㅎ

 

누구와 교제를 하든 그 남자는 아홉 달 안에 불후의 명저를 쓰게 된다는 영감이 넘치는 여자, 하지만 사랑하게 되면 죽거나 미치거나 큰일을 당하게 만드는 여자.  그녀의 이름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이다. 

그녀의 어떤 지적인 면이 뭇남성들을 매혹시켰을까.  

철학자 니체도, 천재 시인 릴케도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했지만 사랑이 오래 가지 못했다.   자살을 기도한 동양학자와 결혼은 했지만 외형상의 결혼일 뿐으로, 가정부를 대리처로 용인하고 자신은 자유부인으로 남았다.  니체는 그녀가 결혼하자 10년간 광인처럼 살다 인생을 마치고, 레는 투신 자살하고,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어갈 때에도 살로메를 잊지 않고 이런 말을 남겼다.

"살로메에게 물어봐 주오.  내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신분석학회에서 만난 프로이트도 살로메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의 기질을 알고 동료관계로 지내는 데에 만족했다.  살로메가 일흔살일 때에도 파리퍼라는 작가가 사랑을 고백했다고 하니 그녀의 마력이 정말 궁금하다.

 

잘 알려진 여자 카사노바가 또 있다.  남장하고 다닌 것으로 유명한 "조르주 상드"이다.  

이혼 후 천재 시인 뮈세, 천재 작곡가 소팽, 조작가 망소를 차례로 굴복시켜 사귀었다고, 모든 남자들이 자신보다 일찍 사망했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결혼 없는 사랑을 원했던 "이사도라 덩컨".. 

대감독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았으면서도 결혼은 노예적 제도이며 자주성이 강한 에술가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헤어진다.  그 후 억만장자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역시 결혼은 하지 않고 공연에 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화려한 무용가 이면의 삶은 어두웠다.  두 아이가 차사고로 죽고 나서 발동한 모성애로 열여덟 살 연하의 시인 예세닌과 결혼하지만, 예세닌이 자살하는 바람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게다가 자신도 스카프 자락이 자동차 바퀴에 휘감기면서 생을 마감했다.    

뛰어난 재능에 대한 댓가가 이런 처절한 인생이란 말인가.. 

 

역사상 유명한 3대 사과가 있는데,

바로 에덴동산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애플의 사과인줄 알았더니, "세잔"의 사과란다.   그만큼 세잔이 그린 사과의 정물화는 현대 회화의 일대 전환을 이루어내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3억불의 가치가 있는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 외에도  여든살에 부인과의 불화로 가출했다가 역에서 동사한 "톨스토이", 가난한 시절 자신만을 믿고 옆을 지켜준 부인 카미유를 그림 속에 그렸던 "클로드 모네",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25명의 명사의 사랑 얘기가 이책에 담겨 있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작품 속에 녹아들었고, 그들의 인생을 크게 좌우했다.   역시 사랑은 우리의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사랑과 삶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명사와 명작들은 남아있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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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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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를 처음 접한 것은 작가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작가 김영하는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의 앞부분을 읽어주었는데, 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었다.   고전을 읽고 싶게 하는 논리로 가득찬 산문이었다.

 

다음에 칼비노의 작품 중에 접한 것이 선조 시리즈 3부작 중 <존재하지 않는 기사>였다.   책누에 북클럽에서 함께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동화 같은 얘기 속에 온갖 비유와 상징이 들어 있었다.   <반쪼가리 자작>은 더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   신체가 반으로 잘리는데 한쪽은 악으로 다른 한쪽은 선으로 정신 까지 분열되어 두 반쪼가리가 따로 돌아다닌다는 설정이었다.   쿠바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이민을 왔지만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칼비노에게도 녹아들었던 것일까..

 

선조 3부작 중 마지막인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동네 북클럽에서 함께 읽어보자고 추천하였다.  이 소설은 다른 두 소설 보다는 사실적이지만, 작가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있다.  12살에 갑자기 나무에 올라가 평생 땅을 밟지 않기로 한 질풍노도기의 청소년 코지모.  이 설정부터 독특하다. 

 

코지모는 공국의 왕이 되고 싶어 왕정으로부터의 호출만 기다리는 아빠, 전쟁터에서 나고 자라 전쟁에만 관심이 있는 엄마, 괴상한 요리를 만들어 관심받고 싶어하는 누나도 모두 맘에 안들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모여 식사하게 되면 가족과의 원한이 쌓여만 갔다.  표면적으로는 누나가 만든 달팽이 요리를 먹기 싫다고 반항하다가 나무에 올라갔지만 부모님과 가정교사로 대변되는 귀족 사회 현실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무 위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동생이 형 코지모로부터 들은 얘기와, 추측, 단서를 모아 화자가 되어 이 소설을 서술한다.  다음 묘사가 조금이나마 나무 위 세상을 상상해 보게 만든다.

 

"형의 세상은 이제 좁고 구불구불하게 허공에 놓인 다리들, 나무 마디나 껍질들, 이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유충들, 꽃자루를 흔드는 약한 바람에 떨리거나 나무 전체가 바람 앞의 돛처럼 휘어질 때 같이 흔들리는 울창하거나 성근 나뭇잎들, 그리고 그 나뭇잎의 초록색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햇빛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그 밑에 있는 우리들의 세상은 평평했으며 우리는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123페이지)

 

그렇다고 코지모는 세상과 완전 단절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 은자였다.   여기 저기 나무를 타고 바람같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곤 했다.  자연에 순응하며 적절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나무 위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해 갔다.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본 세상은 오히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끊임없는 독서와 연구 덕분에 사람들이 해결못하고 쩔쩔매는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부모들도 코지모와 일정 거리 떨어져 지내다보니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자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어머니는 코지모와 창문을 통해 코지모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봉양을 받고, 아버지도 남작의 지위를 물려주며 그 위치에서 직분에 충실하길 바랬다.   

 

"..  형이 너무나 깊숙이 파고들었던 야생의 경계들은 형의 정신의 원형을 형성하였고, 이로 인해 인간의 외형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형에게는 많은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짐승과 싸울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분명 형의 세언제나 이곳, 우리들 세상에 있었다."(137페이지)   

 

다른 선조 시리즈 책들의 배경은 기사가 출현하는 훨씬 더 오래전, 14,5세기경이었다.   이 소설은 계몽주의 시대 부터 프랑스 혁명을 거쳐 공화정과 왕정복고가 반복되던 격변기 시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다.  

 

코지모는 보편적인 사회를 위한 저술도 남기고,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와 루소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내고 편지를 받기도 했다.  동생은 볼테르를 직접 만나고, 프랑스 대혁명기의 인물들이 언급되고, 나폴레옹 황제는 코지모를 직접 확인하러 방문하기도 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사실적인 역사 배경과 인물들이 함께 등장해 읽는 재미를 주었다

 

코지모는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평가가 계속해서 엇갈려서 미친 사람이 되었다가 현자가 되기도 했다.   점차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어 유럽에서 위대한 천재, 비범한 인물이 되었다.   외형은 점차 새처럼 보이게 되었는데, 나무 위에서 생존하려면 최적화된 모습이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코지모의 비문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노라"

 

나무 위는 무엇을 상징하기 위한 것일까.  내 자녀가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독립한 세상을 비유하는 것으로 봐도 될까?  내 자식이 코지모와 같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것 같다.  코지모 부모도 처음엔 모른척 하다가 회유하다가 포기한 걸 보면 특별한 방법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또 모르지 난 나무위로 쫒아 올라가 사생결단낼지도. ㅋㅋ

 

동네 북클럽 회원들은 비슷한 연령대의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로 기승전교육얘기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나무 위에 올라간 코지모가 단순히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보이지 않고, 한창 반항기인 사춘기 청소년으로 보였다.   지가 좋아 올라간 세상에서 혼자 살아내고 세상과 소통하고 명성도 얻고 그럼 된 것일까?  좋아하는 일은 한다면 믿고 맡겨야 될까?  왠지 남들과 다름은 인정치 않는 현대에선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는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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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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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감정들은 정말 다양하고, 각각의 감정은 하나의 단어로 규정해서 표현할 수 있구나.

이 책을 보고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각각의 감정이 하나의 문학 작품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니..

 

저자 강신주는 에필로그에서 사람이 자신의 감정에 왜 솔직하고 당당해야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현재에 충만한 삶을 누리려면 자신의 감정의 목소리를 존중하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쉬운 얘기이지만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사람도 많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를 포기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이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쉬이 사로잡히는 것은 선(Good)과 악(Evil)의 평가 기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선은 반드시 따라야만 하고 악은 내다버려야 할 어떤 절대적인 규범, 타인들의 가치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기에 과거와 미래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반면에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은 좋음(good)과 나쁨(bad)에 따라 행동한다.  좋고 나쁨에 따라 감정은 다양하게 표출되므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자기만의 기준을 따른다면 자신만의 감정을 지킬 수 있다. 

 

저자 강신주는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기도 하지만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투른 점도 꼬집는다.   우리 자신의 감정에 능통해져야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지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행동 기준을 삶에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식별해야만 이에 대처하고 극복할 수 있지 않지 않을까.   

 

스피노자의 명저 <에티카>에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48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각각의 감정을 온전히 담고 있는 48개의 문학 작품을 소개해 준다.   48개의 문학 작품 각각은 하나의 감정을 분석하고 공감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등장인물과 스토리 전개를 파고들어가 감정을 얘기해 주니 소설 48권을 온전히 읽은 것처럼 와 닿는다.  마치 문학 작품이 하나의 감정을 얘기하기 위해 씌여진 것 같다.  

 

몇개의 소설을 소개하자면,

프랑수아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저자는  "소심함"이라는 감정을 여주인공 폴에게서 찾아내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소심함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라고 하였다.

폴은 매력적인 연하의 남자 시몽에겐 언젠가 버려질 거란 생각 때문에 바람둥이 로제에게로 돌아간다.   시몽에게 버려질 위험을 큰 악, 로제라면 바람을 피울망정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일말의 안도감이 작은 악이 될 것이다.   불안한 사랑보다는 불행한 안정을 선택한 것이다. 

 

폴에게 "대담함"이라는 감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대담함"은 조지 오웰의 <1984>의 소시민 윈스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라고 하였다.

"빅브라더는 당신을 보고 있다"라는 슬로건이 도처에 적혀 있는데도, 윈스턴은 체제에 도전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줄리아와의 사랑이 그런 대담함이라는 감정을 가져오게 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빅브라더의 감시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비극적으로 끝이 나게 된다.

 

두 사람은 대담했음을 후회했을까.  

"후회"는 토마스 하디의 <캐스터브리지의 읍장>을 통해 파고들어가진다.

스피노자는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라고 했다.

핸처드는 술김에 아내를 경매로 팔아버리고 이에 화가나 아내는 딸과 함께 다른 남자를 따라 떠나 버린다.  핸처드는 그 후 지나친 후회로 인해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핸처드를 실직으로 내몬 사회구조가 아니었다면 일자리를 잃지 않았다면 술독에 빠져 아내를 팔아먹지도 않았을텐데도, 핸처드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저자는 후회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유아적인 사람들에게 자주 찾아온다며, 이런 후회의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소개한 책들 중에서 읽은 책들은 1/3 정도 되는 것 같다.  "확신"을 파헤친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경멸"을 파헤친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 "치욕"을 파헤친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 "미움"을 파헤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욕망"을 파헤친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과대평가"를 파헤친 솔 벨로의 <허조그> 등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 많다.  서평 종류의 책을 읽으면 위시리스트만 늘어난다는 폐해 아닌 폐해가 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바가 에필로그에서 저자의 소회감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내게 고마웠던 것은 위대한 작품이란 어떤 특정한 감정의 아우라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가르쳐 준 48명의 위대한 문학자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웠다.  위대한 문학은 하나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반대로 말해 위대한 작품은 하나의 감정이라는 자장에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포섭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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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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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의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담론>을 책장에 꽂아놓은 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새..  그분의 마지막 강의를 돌아가시고야 펼쳐 들었다.

 

책을 읽다가 유투브로 강연하시는 모습도 보았다. 글로 느낄 수 있는 온화함이 얼굴에서도 느껴졌다.  얼굴은 그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모두 담겨져 있다고 하지 않는가.  20년 20일 억울한 옥살이를 했는데도 어떻게 그런 인상이 가능할까?  얼굴과 글에서 신영복 선생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대학시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책을 넘겨보긴 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왜 제대로 감동을 받지 못했을까?   청춘은 그 자체로 충분했을 뿐, 나 이외의 삶에는 공감과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지금은 담론을 읽으면서 순간 순간 코끝이 찡해진다. 

 

신영복 선생님의 화두는 모두 "관계론"과 "탈근대"로 수렴된다.  고전을 공부하는 것은 세계 인식과 인간 이해를 위한 것이다.  이의 목적은 "관계론'에 닿으며, 근대의 불합리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탈근대"의 전략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아~~ 좋은 말씀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회에 걸쳐 포스팅해야 할 정도로 소개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생각은 머리에서 한다지만, 가슴에서 울리는 생각,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서는 쉽지가 않다.  선생님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은 그래서 힘들다고 하신다.  나 자신의 변화.  공감과 애정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톨레랑스", 근대 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성이 바로 관용이었다.   그러나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 타자를 바깥에 세워두는 것, 타자가 동화되길 기대하는 강자의 여유였다.   진정한 관계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으로 완성된다.  자기의 변화로 이어지는 더 멀고 힘든 여행이다.  "발"은 삶의 현장이다.  애정과 공감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 삶의 현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노마디즘"이다.

 

한마디로 선생님은 탈근대화를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의 변화라고 하신다.   누군가 비를 맞고 있을 때, 톨레랑스"는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여 주는 거라면,

"노마디즘"은 그 사람과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게 아닐까.

 

 

선생님이 시서화로 쓰시는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우산을 씌여주면 함께 비를 피할 수 있을텐데 왜 함께 맞아야 할까..   선생님의 화두 탈근대화와 관계론에 연계해서 생각해 보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는 듯 하다. 

 

책과의 관계론.  서삼독(書三讀)과도 통한다.  책은 처음 읽을 땐 텍스트를 읽고, 두번째 읽을 땐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세번째 읽을 땐 독자 자신을 읽으라고 하신다.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탈정(脫井)".   공부도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으로 나 자신, 낡은 생각을 뛰어넘고,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으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라고 말하신다.   책을 처음 읽을 땐 머리로, 두번째 읽을 땐 가슴으로, 세번째 읽을 땐 발로 실천적으로 읽으란 의미의 서삼독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의 글과 얼굴에서 선생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지만,  선생님의 글씨는 또 어떤가?  글씨에서 선생님의 사유와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선생님은 글씨와 사람이 같다고 말하신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결코 뛰어난 글을 쓸 수 없다면서, 이것이 "서도의 관계론"이다.

 

선생님은 유년시절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붓글쓰를 배웠고(사랑방 붓글씨이긴 하지만), 감옥에 있을 때 추사의 맥을 잇는 정향 조병호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정향 선생님은 몇달만 해도 될 걸 5년동안 매주 찾아오셨다고 한다.   제자 신영복이 맘에 들으셨게 아닐까.  가르침은 한자로 받았지만, 가르침을 받은 획과 필법을 한글에 가져와 녹여내었다.  선생님은 아직까지 많이 쓰이는 궁체는 궁녀들이 쓰던 귀족적인 형체로, 서민 정서와는 조화되기 힘들다고 보고, 서민의 정서와 조화되는 글씨체(어깨동무체)로 글을 쓰셨다.

 

'서울'을 주제로 하는 작품전에 선생님은 아예 '서울'을 한글로 써서 출품했다.   산을 그려서 "서"자로 만들고, 강물처럼 "울"자를 쓰고,  그 옆에 한시 한수와 함께.

"북악무심오천년 한수유정칠백리"

북악은 5천 년 동안 무심하고, 한수는 유정하게 700리를 흐른다는 뜻으로, 북악산은 왕조 권력을, 한강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나타낸다.  그 상징성이 대단하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서울시장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기수..  왜 자살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묻는 질문에 햇볕 때문이라고 하신다.

하루 길게는 두시간, 신문지 크기만한 햇살을 무릎에 받으며 행복함을 느꼈다고 한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햇빛을 발견한다는게 이런 것일까..  햇볕 때문에 살 수 있었다지만, 그 부족함으로 인해 흑색종이라는 특이한 피부암이 발병하고,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20년 넘게 투옥 생활한다고 아무나 깊은 사색의 글을 쓰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투옥 생활이 아니었다면 선생님의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깊은 사색으로부터 나온 글씨나 강의들도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선생님은 감옥이 역사학, 사회학, 인간학 교실이었다고, 독방은 최고의 철학 교실이었다고 하신다.  덕분에 우리는 선생님의 글을 읽고 사유하고 공감하고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변방을 찾아서",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에 대한 얘기도 하고 싶고, "하방연대의 교훈", "화동 담론" 등 고전에 담긴 많은 얘기가 있으나,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여야 겠다.

 

끝으로, 독버섯에 관한 동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산책로에 버섯 군락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그 버섯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애야, 이건 독버섯이야"라고 가르쳐 준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옆에 있던 버섯 친구가 위로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위로하다가 최후로 친구가 한 말은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였다.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일뿐,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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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창비세계문학 43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김성일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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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힘든 날들을 참고 견뎌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가 버린것 그리움 되리니.

 

너무나 유명한 첫 두 연의 시이다.  

메모장이나 공책의 한귀퉁이에서, 식당의 벽을 장식하던 액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시가 아니고 먼 옛날 러시아 시라는 것을 알았을 때 좀 놀라웠다.  푸시킨..  그래서 푸시킨은 당연히 시인인줄만 알았다.

 

소설 <대위의 딸>의 작가와 시인이 같은 사람인 걸 알고 한번 더 놀라웠다.  

이현우의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에서, 러시아 문학의 계보는 푸시킨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그만큼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토대를 마련했던 작가였다.  그 중에 <예브게니 오네긴>과 마지막 소설 <대위의 딸>이 잘 알려져 있다.  <대위의 딸>은 딸이라는 제목에서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랬을까.  <첫사랑>, <좁은 문> 같이 이루지 못한 사랑 얘기인줄 알았다. 

 

읽어보니 완전 잘못 생각했던 거다.  사랑 이야기도 빠지진 않았지만.

19세기 초 푸시킨은 18세기 러시아 역사를 공부하다가 농민 봉기의 지도자인 뿌가초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에는 실제 인물 예까째리나 여제와 반란 주동자 뿌가초프가 등장하여 역사적인 사실감을 부여한다.    여기에 허구 인물 러시아 귀족 뾰뜨리 안드레예비치 그리뇨프가 반락 폭동을 직접 목격하고 이에 휘말리는 얘기를 자전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이다.

 

그리뇨프는 아버지의 권유로 군에 들어가게 된다.  뻬쩨르부르크로 가길 기대했지만 변방 오렌부르그 요새로 가서 수비대 근무를 하게 된다.    이곳 지역의 까자끄인들은 최근에 러시아 정부의 통치권을 인정한 야만족으로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까자끄인들에 의해 이웃 요새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가 무섭게 그리뇨프가 근무하는 요새까지 함락된다.  요새의 사령관인 대위 이반과 부인은 바로 처형되고, 대위의 딸 마샤는 신부님 댁에 피신한다.   대위의 딸과는 서로 결혼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리뇨프는 귀족 장교로서 처형되기 직전이었으나 주동자 뿌까초프와 인연이 있어 구사일생으로 살게 된다.   귀족 뿐만 아니라 농노나 하인에게도 뿌까초프 일당은 폭동을 일으킨 무리이고, 뿌까초프는 참칭자, 반란자였다.  뿌까초프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한다.  그리뇨프는 의무와 명예를 소중히 하는 군인으로 여제를 배신하지 않고,  뿌까초프를 진심으로 대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이웃 요새로 피신하게 된다. 

 

그리뇨프는 도덕적인 시험에 처해진다.   이웃 요새도 곧 함락되기 직전에 신부의 집에 숨어 있던 대위의 딸 미샤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군인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 봉쇄된 요새를 지켜야 할지 결혼을 약속한 마샤를 구하려 나서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명예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뇨프는 군인으로서의 직분을 지켜야만 했고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내야만 했다.    남자로서 무엇을 먼저 구해내야 할까.  ㅎㅎ

 

그리뇨프의 하인 싸벨리치의 충성심도 재밌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도 주인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주인을 향한 진심어린 행동은 코믹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뿌까초프는 성공할 수 없는 반란의 주동자였다.  그리뇨프는 뿌까초프에게 친구로서의 동지감도 느끼고, 그를 악당들의 무리 가운데서 끌어내주고 싶었다.   반란 주동자에게도 진심을 다하면 통하는데, 어느 누구에겐들 진심이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18세기 말 제정 러시아의 혼란스럽던 시대상과 그 시대 귀족들의 삶도 살펴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소설을 읽어내어 숙제를 끝마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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