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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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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까. 묘하게도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시체놀이를 통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재준을 보고도, 그 재준의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답답해하고 허망해하다 결국 작별을 고했던 유미의 모습에서도 나는 중학교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청춘과 죽음이라는 단어가 질리지 않는다는 유미의 말처럼 그 시절의 나에게 죽음은 끝없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친구와 만날 때면 언제나 그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을 해왔던 것 같다. 아마, 베르나르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를 접하게 되어 그런 영향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탐구해 나간다는 것이 어떤 이야기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오던 때였다. 그 때문일까, 재준과 유미의 모습은 내게 너무 친근하게 다가왔다.


 2학년 담임이 말한다. 귀를 뚫은 유미를 보고 너 같은 애가 크면 술집여자가 되는 거라고. 중학교 시절 성적으로만 학생의 모든 걸 평가하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 아이가 성적이 높다고 착각했다가 진실을 알고 나서 돌변해 버리는 그의 행동을 보며 기분 나빴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들은 과연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들인가. 이런 일부 선생님들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상처받고 있는지 그들은 알까.


 “현재의 학교 교육은 고양이고, 금붕어고, 뱀이고, 코끼리고 모두 모아다가 각자 잘 하는 걸 더 잘 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동물들을 똑같이 만들게 하는 교육이라고, 고양이더러 물속에서 헤엄도 치고, 똬리도 틀고, 코로 물도 뿜으라고 요구하는 교육이라고.” 우리는 현재의 교육제도에서 ‘나’를 잃어버린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어야 하는 ‘나’일 뿐이다. 재생산. 학생은 미래의 빈자리를 채울 인적자원이 아니다. 학생은 세상을 이해하고, 고민하여 다음을 창조해갈 미래 그 자체다.


 유미는 재준의 죽음을 끝내 받아들인다. 작별한다. 그것은 어이없고 하찮은 것일 수도 있는 죽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생성된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의 끝은 어디에 있을까, 나와 다음 세계는 이어질까 수많은 물음들을 던져 놓고도 나는 아직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다. 유미처럼 평생을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네 죽음의 의미는 내가 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지.’라는 말처럼 현재의 나는 그 물음들을 탈피해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소년의 죽음을 통해 썼다는 글을 읽으며 작가의 바람처럼 어이없이 사라져간 소년들이 글 속에 머물러 아기자기한 삶의 한 자락을 잠시나마 누리다 같다고 생각한다. 이곳이 아니라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을 수많은 재준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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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12-28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바로 보았구나.
학생은 미래를 잉태한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인데도, 자원이 아닌 학생은 존재로 취급하지 않으니... 이 책 내가 오늘 아침에 도서관에 갖다 준건데...

가을눈 2007-01-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이 고장나서 댓글이 늦었습니다.
우연히 그 책을 제가 빌리게 되었습니다. ㅎㅎ 내일 책을 반납하고 대여하러 갈 생각입니다. ㅎㅎ
살아가면서 점점.. 제 존재의 소중함을 잊어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으며 잊지 않고 살아가려 노력해야겠습니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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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 철학사전을 읽으며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에 비해 이 책은 독자의 접근성이 용이한 대중을 위한 철학의 다가섬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 접했던 철학은 딱딱하고 복잡하기만 했다. 그것은 앎을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암기를 위한 책 같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는 철학은 색다른 재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영화를 작품work이 아닌 텍스트text로 만나는 것은 생각했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속뜻을 철학으로 풀이함으로서 영화를 보면서 주의 깊게 보지 못했던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게 하고, 보지 못했던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철학의 관심까지 높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철학의 어원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고 알고 있다. 일생동안 ‘있음’과 ‘있는 것’에 대해 사색했던 하이데거나 고전철학의 이데아 개념을 거부하며 현재를 이야기했던 니체의 이론들이 이곳에서 깊이 다뤄진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함에 있어서 깊이를 알게 하는 부분들을 보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이런 내용들을 복잡하게 엮지 않고 알기 쉽게 표현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빠져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평론가와 관객의 사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종종 접할 수 있다. 작가가 영화를 통해 철학과 독자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다가섬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관객은 평론가의 아는 채를 배앓이 하고, 평론가는 관객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는 괴리에서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이렇게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즐기려는 입장에서 각기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반대편에 대해 ‘판단중지’를 해주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생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늘은 외부의 시선이나 판단에 의해 단정 지어진 나의 ‘표층자아’를 떠나 자유롭게 내 속을 거닐고 있는 ‘심층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싶다. 과연 내 속에는 뭐가 잠들어 있을까. 살아가면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의 철학은 어디서 쿨쿨 거리며 잠들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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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12-2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어렵지 않든?
철학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겠지. 영화 보면서도 이생각저생각 하고, 소설 읽어도 마찬가지고... 또 그 생각들이 영화가 되고 소설도 되고.
이제 졸업이구나. 올해는 너희들이 있어 행복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여기서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문학샘-

가을눈 2006-12-2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작가 분께서 쉽게 설명을 해주셔서..
2학년 때는.. 학교 내 문학의 길이 꽉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선생님이 계셔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ㅎㅎ 평생독서프로그램.. 잘 부탁드립니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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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인터넷 서재에서 보고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해 빌려본 책이다. 의사라면 좀 거만하고 의기양양한 사람을 곧잘 떠올리고는 했는데 글 전체에 겸손함과 순박함이 두루 묻어 있어서 불편함 없이 글을 읽었던 것 같다.

 병이라는 것이 누구하나 사연이 없겠나 싶지만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특히나 더 구구절절 하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사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린 생명의 죽음 등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고 싶은 이야기 들이다. 하지만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안심되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 곁에서 애쓰는 이런 의사 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 이야기가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한 환자의 죽음을 보고 자신으로 인해 살아난 환자를 카운트 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말에서 왠지 지은이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흔히 뉴스거리로 들을 수 있는 노인문제. 하지만 실질적인 대책은 어디에도 없이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 땅뙈기 한 뼘에 생활보호대상자에 들지 못한다는 말이나, 병수발들 여건이 되지 않거나 부양하고 싶어도 부양하거나 장기입원 시킬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식들이 있다는 말들, 그리고 치매노인의 잔혹한 사례는 그 문제를 새삼 떠올리게 만든다. 이 땅에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자식들을 뒷바라지 한 그분들이 마지막 가는 길까지 순탄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 누구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빠른 시일 내에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큰할머니께서 1종 의료보험 혜택자인데 의사들과 간호사들 눈치 때문에 병원에 못 간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분들이 돈을 안 받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을까 싶지만 새로 지은 종합병원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자아내는 거만함 자체가 끼친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에 비해 시골병원에서 있었던 '훌러덩' 할머니들의 에피소드는 함박웃음을 짓기에 모자람이 없는 특유의 정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난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인지 의사가 환자를 '고객'으로 보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소신과 제도 사이에서 고민하는 지은이의 모습에서 나는 의사 이전에 그의 마음이 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아름답게 교유하게 되는 심리적 기제를 프랑스어로 '라뽀'라고 한단다. 비록 그 만큼은 아니더라도 환자를 한 번 쯤은 생각하는 의사들이 많아진다면 이 사회도 조금은 밝하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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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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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고는 한다. 그러면 내 주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혼자 있음을 느낀다. 모모를 읽으면서 그렇게 멍하니 서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시간 속에서 이득을 찾으려는 많은 사람들. 나도 그 곳에서 절대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을 시간으로서 보지 않게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이 책은 예전의 순수함을 다시 일깨워 준다. 정작 우리가 시간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삶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록, 정해진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은 상대적일 뿐이다. 시간을 계산속에 포함시키지 말고 시간위에 존재함으로서 우리는 시간 뒤에 숨어 인간의식을 좀먹고 있는 어둠에 저항항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시간의 꽃을 되찾아 주는 것은 모모 한사람의 몫이었지만 현실에서 그 시간의 꽃을 지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바쁜 세상에서 여유를 가지고 세상과 자신을 되돌아 보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내 시간이 회색신사들의 시가가 되어 타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내 시간의 꽃이 언제나 새롭게 피어나기 위해 나는 좀 더 나의 시간을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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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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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를 뒤집어쓰고 구치소에 갇혀 있는 윤수의 모습은, 아픔이 감춰지고 가족을 용서하지 못하는 유정과 닮아 있었다. 교수나 사형수가 아니라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잊어버린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른 채 잊어버리고 관심을 꺼버리는 우리들에게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모른 척 고개 돌려서 상처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의 문제는 이들 것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 학대 받으면 뇌가 5내지 10퍼센트 정도는 망가져 있다는 글을 읽으며 백화점 앞에서 학대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던 대학생들이 생각났다. 퍼렇게 멍든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그들도 아마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은 것이다. 아마 또 잊혀진 만큼 그들은 힘겹게 자랄 것이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렇게 둔감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존치론자가 되고, 사형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건, 얼마나 뼈아픈 말인가.

 윤수의 기사(記事)는 윤수를 살인범으로 몰았다. 하지만 윤수를 만난 사람들은 윤수를 윤수로 보았다. 그래서 모니카 수녀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유정은 자신의 아픔을 털어 놓고, 교도관은 자신도 꼴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삭막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따스한 빛들이 잠시나마 반짝이는 것은 아마 그 진짜들의 힘이라 생각하고 싶다. 사람은 얼마나 포장되어서 남에게 소개 되는가. 알고 보면 부잣집에서 태어난 여교수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형수나 자신만의 고통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아픔을 딛고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때로는 남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낼 만큼 인간은 강하지 못하니까.

 불쌍한 딸을 죽인 사형수를 용서하려 노력하는 삼양동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배운 것이 없어도, 아는 것이 없어도, 신앙심이 없어도 할머니는 용서하려 했다. 그것은 자신도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가 가진 슬픔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아로 자라 길거리에서 동생을 잃은 윤수를 자신도 고아로 자랐고 딸이 남겨두고 간 두 애들도 이젠 고아이기 때문에 고아로 자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용서라는 손길을 뻗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윤수와 유정의 만남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슬픔을 드러내는 일. 그것은 슬픔을 참는 것보다 순간 더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온통 드러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을 드러냄으로서 그들은 ‘진짜’대화를 할 수 있었다. 용서를 받아 본 사람만이 용서를 할 수 있다는 말처럼. 그들은 서로를 이해해 같던 것이 아닐까.

 사형수를 사형수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용서하기 힘든 살인. 하지만 그들에게도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어떤 계기로 해서 그들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전부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블루노트를 보며 눈물 흘린 것처럼, 윤수의 죽음을 보고 눈물 흘린 것처럼 그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관심도 가지지 않고 모른 채 지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혹시 다시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제껏 그들에 대해 ‘모르고’ 지내왔던 것에 왠지 용서를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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