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죄를 뒤집어쓰고 구치소에 갇혀 있는 윤수의 모습은, 아픔이 감춰지고 가족을 용서하지 못하는 유정과 닮아 있었다. 교수나 사형수가 아니라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잊어버린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른 채 잊어버리고 관심을 꺼버리는 우리들에게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모른 척 고개 돌려서 상처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의 문제는 이들 것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 학대 받으면 뇌가 5내지 10퍼센트 정도는 망가져 있다는 글을 읽으며 백화점 앞에서 학대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던 대학생들이 생각났다. 퍼렇게 멍든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그들도 아마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은 것이다. 아마 또 잊혀진 만큼 그들은 힘겹게 자랄 것이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렇게 둔감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존치론자가 되고, 사형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건, 얼마나 뼈아픈 말인가.
윤수의 기사(記事)는 윤수를 살인범으로 몰았다. 하지만 윤수를 만난 사람들은 윤수를 윤수로 보았다. 그래서 모니카 수녀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유정은 자신의 아픔을 털어 놓고, 교도관은 자신도 꼴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삭막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따스한 빛들이 잠시나마 반짝이는 것은 아마 그 진짜들의 힘이라 생각하고 싶다. 사람은 얼마나 포장되어서 남에게 소개 되는가. 알고 보면 부잣집에서 태어난 여교수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형수나 자신만의 고통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아픔을 딛고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때로는 남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낼 만큼 인간은 강하지 못하니까.
불쌍한 딸을 죽인 사형수를 용서하려 노력하는 삼양동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배운 것이 없어도, 아는 것이 없어도, 신앙심이 없어도 할머니는 용서하려 했다. 그것은 자신도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가 가진 슬픔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아로 자라 길거리에서 동생을 잃은 윤수를 자신도 고아로 자랐고 딸이 남겨두고 간 두 애들도 이젠 고아이기 때문에 고아로 자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용서라는 손길을 뻗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윤수와 유정의 만남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슬픔을 드러내는 일. 그것은 슬픔을 참는 것보다 순간 더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온통 드러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을 드러냄으로서 그들은 ‘진짜’대화를 할 수 있었다. 용서를 받아 본 사람만이 용서를 할 수 있다는 말처럼. 그들은 서로를 이해해 같던 것이 아닐까.
사형수를 사형수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용서하기 힘든 살인. 하지만 그들에게도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어떤 계기로 해서 그들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전부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블루노트를 보며 눈물 흘린 것처럼, 윤수의 죽음을 보고 눈물 흘린 것처럼 그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관심도 가지지 않고 모른 채 지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혹시 다시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제껏 그들에 대해 ‘모르고’ 지내왔던 것에 왠지 용서를 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