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괴담 - 기괴하고도 불길한 일본 실화 100
마츠바라 타니시 지음, 김지혜 옮김 / 시원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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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무서운 괴담 서평, 사고물건에 사는 개그맨이 모은 실화 백 편, 사진 보고 나니 더 서늘해요



무섭다는 건 뭘까? 괴담이란 뭘까?

책 제목과 똑같은 이름을 단 꼭지 (무서운 괴담)에는 이 두 줄만 실려 있어요. 실화 괴담 백 편을 모은 <무서운 괴담>의 일곱 번째 자리에 질문 두 줄만 놓여 있는 거죠. 귀신도 사고물건도 비명도 없는 그 빈 페이지가 이상하게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앞뒤로 빼곡한 이야기들이 결국 이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대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10월도 중순을 넘기니 해가 눈에 띄게 짧아졌어요. 월요일 저녁, 바깥이 벌써 어둑한 걸 보면 괴담 얘기를 꺼내기 딱 좋은 계절이구나 싶습니다.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를 틀어 놓고 꾸벅꾸벅 졸다 잠드는 사람이었어요. 서평단을 시작하고 나서는 새 책이 오는 날을 은근히 기다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번 책은 제목이 너무 정직해서 처음 보고 웃음부터 났어요. 무서운 괴담. 에둘러 말할 생각이 전혀 없는 제목이더군요.



저자 마츠바라 타니시는 일본에서 '사고물건에 사는 개그맨'으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집에 직접 들어가 사는 방송 기획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열일곱 채를 거쳤다고 해요. 개그맨이 쓴 괴담집이라 장난기가 섞여 있을 줄 알았어요. 막상 읽어 보니 웃기려는 기색은 거의 없고, 겪거나 전해 들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옮겨 놓는 쪽이라 그게 더 서늘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저자의 책이 누적 40만 부 넘게 팔렸다고 하네요.


<무서운 괴담>이 그냥 읽고 지나가는 괴담집과 다르게 느껴진 건 중간중간 실린 사진과 평면도 덕분인 거 같아요. (산속의 여고생)에서는 폐허 마니아 마사 씨를 따라 한밤중에 오사카 북부의 험한 산길을 오릅니다. 손전등 불빛 너머로 여고생처럼 보이는 형체가 나타나는데, 다가가 보면 스카프와 블라우스가 걸쳐진 나무 그루터기예요. 마사 씨는 지난주에 왔을 때는 치마뿐이었다고 하고, 교복은 올 때마다 위치와 모양이 바뀌어 있다고 하죠.


누가, 무엇 때문에.

그 물음 옆에 "올라갈 때는 없었던 체육복"이라는 설명이 달린 실제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글로만 그리던 장면을 흑백 사진으로 마주하니 느낌이 또 달랐어요.

(몸 위를 넘어가는 사람들)에는 S 씨네 단독주택 평면도가 한 장 들어 있어요. 산과 밭, 정원, S 씨 방과 여동생 방, 부모님 방까지 그려져 있는데, 밤마다 산 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S 씨의 몸 위를 넘어갔다는 대목을 읽고 나면 S 씨 방이 산 쪽에 바짝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방 배치를 괜히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더군요. 이런 장면도 나와요. 방 입구에 자기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는 걸 알아챈 S 씨가 놀라기도 전에 말부터 걸어 버리는 대목입니다.



"뭐 하고 있어? 이리 와." 그러자 여자아이는 미끄러지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 왜 말을 걸었지……?'

마지막 혼잣말이 이상할 만큼 현실적이었어요. 사람이 무서운 걸 마주했다고 늘 앞뒤 맞게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요.

저자 본인도 은근히 웃긴 사람 같습니다. (급수탑의 여인)에 나오는 센다이 구즈오카 묘지에는 급수탑을 반시계 방향으로 세 번 돌면 차 엔진이 멈추거나 무언가가 따라온다는 소문이 있는데, 저자는 그걸 열세 바퀴나 돌아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죠. 야기야마 다리에서는 "영적인 능력이 없는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덤덤하게 털어놓기도 합니다. 사고물건 열일곱 채에 살아 본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믿음이 가더라고요. 그러다 다이하쿠산 터널 입구에서 발견한 긴 머리카락 뭉치 사진이 툭 나오고, 동행한 PD가 고등학생 때 급수탑을 향해 손을 흔들던 여자 이야기를 꺼내는데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기록 담당)이었어요. 영화 현장에서 기록 담당을 맡은 E 씨는 촬영지인 폐교가 너무 불쾌해서, 다른 스태프들이 묵는 호텔 대신 두 시간 거리의 집에서 차로 오갑니다. 감독은 "또 조연이 있잖아! 기록 담당은 뭐 하는 거야!" 하고 화를 내는데, 모니터 속 2층에 서 있던 사람은 그날 현장 어디에도 없었다고 하죠.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E 씨의 남자 친구와 차 뒷자리 창문 쪽으로 번져 가요.



이 꼭지에서 자꾸 눈이 간 건 E 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장까지 삼십 분쯤 남은 지점만 지나면 속이 뒤집히는데도, 운전석 옆에 쓰레기통을 두고 토해 가며 현장에 나가 기록 일을 붙들어요. 40대 후반까지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가기 싫은 현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래도 결국 차 키를 집어 드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어요. 겁나는 마음과 책임감이 한 사람 안에서 같이 버티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직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다정한 주임님)은 짧은 꼭지인데, 직장인이라면 읽고 나서 뒤통수가 서늘할 거 같습니다. 음식점 2층 연회장에서 뒷정리를 하던 직원의 등 뒤로 주임의 목소리가 들려요. "너, 진짜 적당히 좀 해라." "장난하냐? 일도 느리고 말이야."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1층에 내려가 보면 주임은 아르바이트 아주머니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일을 가르치고 있어요. 방금 소리치지 않으셨느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저는 화낸 적 없는데요."


저도 이제 후배들 앞에 설 일이 많은 나이라, 웃는 얼굴 뒤에서 제 목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더라고요.

출판사 소개에 귀신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던데, 읽어 보니 정말 그랬어요. (문제가 생기는 집)에서 Y 씨는 지은 지 칠십 년 된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 사는데, 이웃과의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풍수에 밝은 사람에게 물어보니 현관이 귀문을 향해 있다고 해서, 지역 신사에 오천 엔을 내고 방위 액막이 기도를 받아요.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이 한 줄 다음부터 이야기가 슬쩍 다른 쪽으로 기우는데, 그 뒤는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훨씬 나을 거 같아요.

(반드시 죽는 집)은 결이 조금 무겁습니다. 니가타현의 단층 단독주택에 살던 사람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난 이야기가 차례로 이어지는데, 기록하듯 건조한 문장이라 더 조용히 스며들었어요. 마지막으로 그 집에 살았던 남성이 자주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밤에 잠에서 깨면 발치에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어."


(부적 동네)는 읽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어요. D 씨의 아버지는 지방 생활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시골로 이사 가자"고 선언합니다. 가족이 모두 반대하자 몇 달 뒤 "아, 이 집은 이미 팔았어"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고요. 같은 또래 남자로서 TV 속 시골 풍경에 마음이 동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가족 얼굴은 한 번쯤 돌아봤어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시코쿠 산속 N 마을로 이사한 첫날부터 노파의 신음이 들리고, 1층 주방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식기 건조기 쪽에서 "이보게! 이보게!"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요. 하필 그 자리가


(가미사마라 불린 할머니)의 스즈키 씨도 쉽게 지나쳐지지 않았어요. 할머니 장례식 도중 외삼촌이 몸을 흔들며 할머니 같은 말을 웅얼거리자, 스즈키 씨는 할머니가 독경할 때 쓰던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누릅니다. 신기한 걸 남겨 두고 싶은 조카와 그 테이프를 기어이 태워 버리는 큰이모, 두 사람 마음이 다 이해가 가더라고요.


무거운 집 이야기들 사이사이에는 숨 돌릴 꼭지도 섞여 있습니다. (신의 사진)에서 저자는 방송 전에 괴담 연습을 하려고 촬영 차량 운전기사님에게 듣는 역할을 부탁하는데, 알고 보니 이분이 괴담 고수예요. 저자가 들려준 산 괴담에서 "이봐요, 이봐요" 하고 부르는 대목을 짚어 내더니, 휴대폰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입니다. 그 사진도 "지붕 위에 주목"이라는 설명과 함께 책에 실려 있어요. 이어지는 (거대한 뱀)도 이 운전기사님, 사쿠라코 씨의 이야기입니다. 수학여행에서 친구와 귀신을 잔뜩 데려와 영매사를 찾아갔더니 첫마디가 "둘이서 많이도 데리고 왔네." 수호령이 강림해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왠지 혼날 것 같아서 거절했는데, 영매사는 "하지만 이미 강림했어" 하더니 두 팔을 흐느적거리며 딱 한마디를 남겨요.


"힘내라."

월요일마다 모든 직장인에게 필요한 말이라 피식 웃었습니다. 수호령님, 저희 사무실에도 한 번 강림해 주시면 안 될까요.

(사모예드)는 무섭다기보다 귀여웠어요. 메구미 씨는 어릴 적부터 큰집 뒷마당의 작은 이나리 사당을 해마다 청소했는데, 어느 설날 숨바꼭질을 하다가 사모예드를 닮은 커다란 흰 개를 만나요. 동물 알레르기 때문에 늘 만지면 안 된다는 말을 듣던 아이가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하며 실컷 쓰다듬는데, "손!" 해도 개는 힐끗 쳐다보고는 콧방귀 뀌듯 무시해 버립니다. 그 개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꼭지 끝에 가서야 알게 돼요.


솔직히 처음엔 조금 버벅였습니다. 가미다나, 이나리, 이타코, 야마히메처럼 일본의 신앙이나 요괴 이름이 연달아 나오는데, 이쪽 사정에 어두운 아재한테는 낯설었거든요. 다행히 각주와 본문 설명이 바로바로 붙어 있어서 몇 꼭지 지나니 금세 익숙해졌어요.

<무서운 괴담>은 판형이 손에 쏙 잡히는 크기인데, 두께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도톰한 편이에요. 짧게는 두 줄, 길게는 여러 장에 걸친 이야기 백 편이 들어 있으니 처음부터 차례로 읽어도 좋고, 아무 데나 펼쳐서 한 편씩 꺼내 읽어도 좋습니다. 둥근 테이블 위에 행성, 유리 플라스크, 분홍 유니콘, 버섯 같은 기묘한 물건이 빼곡한 표지 그림도 볼거리가 많아서 책장에 꽂아 두고 싶은 책이에요.


이런 이야기는 읽고 나면 은근히 즐겁더라고요. 요즘 부쩍 으슬으슬한 게 가을을 타나 했는데, 아무래도 <무서운 괴담> 때문인 거 같습니다. 해가 짧아지는 10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월요일인데도 기분이 꽤 괜찮네요.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어디서 누가 "이봐요, 이봐요" 하고 부르면 한 번쯤은 미리 정해 둔 호칭인지 확인해 보세요.


사진과 평면도까지 실린 실화 괴담 백 편, 귀신보다 사람이 더 서늘해지는 가을밤 괴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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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자본 - 인공지능 시대 당신을 위한 마지막 신분이동의 사다리
황유선 지음 / 예미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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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같아요"가 입버릇인 아재가 뜨끔했던 책, 언어자본 서평


"대체로 그런 방향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회사 다니는 분이라면 회의 자리에서 한 번쯤은 꺼내 봤을 말이죠. 저도 입에 착 붙어 있는 문장인데, 이게 언어자본을 깎는 습관 목록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인 것 같습니다"처럼 확률을 높이고 책임을 흐리는 말투가 AI의 언어 생성 방식과 닮았다는 설명을 읽다가 웃음이 터졌습니다. 제 블로그 말투가 "같아요"로 굴러가거든요. 오늘은 좀 줄여볼까 하다가도 그러면 제 글이 아닌 것 같아서… 아, 방금 또 같아요네요.


10월도 어느새 셋째 주 월요일이에요. 주말에 잠깐 풀렸던 몸이 다시 출근 모드로 굳는 날인데, 바깥 공기가 제법 서늘해서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계절에 손에 쥐기 좋은 책이 황유선 작가의 <언어자본>이에요. 부제가 '인공지능 시대 당신을 위한 마지막 신분이동의 사다리'인데, 사다리라는 단어에 중년 직장인 귀가 쫑긋하더군요.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로 대학 강단에 섰고, 지금은 기업과 개인을 상대로 커뮤니케이션 컨설팅을 하고 있어요. 저자 소개는 "말이 직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요. 말을 잘하는 것과 언어가 힘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깨달음에서 출발한 책이라고 하니, 첫 장부터 방향이 또렷한 책 같았습니다.


<언어자본>의 프롤로그는 질문 두 개로 문을 엽니다. "과연 인간의 쓸모는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끝내 대체되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마흔 후반쯤 되면 이 질문을 속으로 한 번도 안 해본 직장인은 드물 거예요. 저자는 여기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데려와요. 언어를 권력이자 자산으로 봤던 학자인데, 그 생각이 AI 시대에 와서 이론을 넘어 현실이 됐다는 이야기죠.


누가 더 많이 아는가에서, 누가 남는가로.

프롤로그를 끌고 가는 축이 이 질문 같아요. AI가 수천 년의 기록을 몇 초 만에 다시 짜 맞추는 시대에 남는 건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 만들어낸 흔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신뢰, 관계, 감정, 맥락 같은 것들이요. 저자는 이걸 AI가 경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차원이라고 부릅니다.


프롤로그 끝자락에서는 솔직히 살짝 움찔했어요.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당신의 자리는 좁아질 것이다. 이제 그 격차는 되돌릴 수 없다." 어조가 꽤 단호해서 처음엔 등 떠밀리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장이 넘어갈수록 그 단호함이 겁주는 데서 멈추지는 않더군요. 다음 회의에서 바로 써먹을 만한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지니까요.


책은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제목에 자본이 들어가서 그런지 손에 드는 무게도 자본급이더라고요. 그래도 장마다 짧은 절로 나뉘어 있어서 끊어 읽기에 부담은 없었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장 끝의 '언어자본을 축적하는 습관'이에요. 시작부터 이렇습니다. "이제 말의 생산은 경쟁력이 아니다." 표현력과 설득력을 연습하는 게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언어가 자본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짧게 못 박아요. 언어자본은 기술이 아니라 습관이다.


쌓는 습관 열 가지 가운데 제일 찔렸던 건 세 번째였어요. "제 생각에는요"에서 그치지 말고 "제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요"까지 말하라는 것. 보고 자리에서 의견만 먼저 던지고 근거는 질문이 들어와야 꺼내던 버릇이 떠올라서 뜨끔했습니다. 네 번째도 좋았어요. "해야 할까요?"를 "우리가 피해야 할 결과는 무엇인가요?"로 바꿔 묻는 것. 질문 하나 손봤을 뿐인데 회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장면이 그려지더라고요.


두 번째 습관은 바로 반응하지 말고 일부러 한 박자 늦추라는 거예요. "이 짧은 지연이 말의 무게를 만든다." 젊을 땐 빠른 대답이 곧 능력인 줄 알았는데.

여섯 번째부터는 결이 한층 섬세해집니다. 상대 말을 요약하는 대신 의도를 짚어주라면서, "그러니까 이런 말이지?" 말고 "네가 걱정하는 건 결과보다 과정인 것 같아."라고 말해 보라는 예시가 나와요. 여덟 번째는 AI가 쓴 초안을 자기 경험과 가치관이 담긴 언어로 바꾸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그럼 이 부분은 제가 맡겠습니다."처럼 말을 행동으로 잇는 것이에요.


이어지는 깎는 습관 목록은 웃다가 찔리다가 하면서 읽었어요. "요즘 트렌드는 이거라더군요." "전문가들이 그렇게 말하던데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냥 한 말인데요." 회사 복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리는 말들이 고스란히 예문으로 실려 있습니다. 저자 말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말을 꽤 잘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대요. 논리도 표현력도 괜찮은데, 시간이 갈수록 말의 무게를 잃어 간다는 거죠.


"신뢰를 쌓는 데는 수년이 걸리지만, 대체 가능한 존재로 분류되는 데는 단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회사 밥을 오래 먹다 보면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차곡차곡 쌓은 평판이 회의 한 번, 메일 한 통에 흔들리는 장면은 다들 하나쯤 떠올리실 거예요.


요즘은 보고서 초안을 AI로 뽑는 일도 흔하잖아요. 그래서인지 깎는 습관 아홉 번째가 유독 맵게 다가왔어요. 생각은 하지 않고 AI에게 최종안까지 맡기면 빠르긴 하지만, 결국 "굳이 이 사람이 아니어도 되겠는데?"라는 인상을 남긴다는 거예요. 그 맞은편에는 초안은 AI가 쓰더라도 마무리는 자기 언어로 하라는 쌓는 습관 여덟 번째가 서 있고요. 이야기가 AI를 도구로 잘 부리는 쪽으로 흘러가서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언어자본>만의 재미는 LCI, 그러니까 언어자본지수 자가진단이 들어 있다는 점이에요. 책 속 QR코드로 진단을 하면 내공형과 발현형, 사유형과 감응형, 책임형과 형성형을 조합한 여덟 가지 유형이 나와요. 쌓인 정도에 따라서는 샘, 시내, 여울, 강, 바다의 다섯 단계로 위치를 알려준다고 하고요. 이름부터 물줄기가 점점 넓어지는 그림이라 보기 좋더군요. MBTI 좋아하는 요즘 분위기와도 잘 맞아서 팀 사람들끼리 돌려 해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형 설명이 장면으로 펼쳐지는 것도 좋았어요. ITE, '진중한 사색가'는 카페에 모인 친구들 사이에서 등장합니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져야 할 것 같다는 친구에게 다들 한마디씩 거드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ITE가 입을 열어요.


"근데 너, 헤어지는 게 두려운 거야, 아니면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 없이도 괜찮았다는 게 증명될까 봐 두려운 거야?"

집에 가는 길에 그 친구에게서 "오늘 네가 한 말 계속 마음에 남는다."라는 카톡이 오는 대목까지 읽고 나니, 이 유형이 어떤 사람인지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더라고요. ITE 설명 중에는 이 문장도 있어요. "틀렸을 때 책임지는 사람의 말은 맞았을 때도 다르게 들린다." 직장에서 오래 따르고 싶었던 선배들이 다 이런 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책임질게" 한마디를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요.


ITS, '조용한 설계자'의 무대는 단톡방이에요. 제주는 비싸고, 강릉은 작년에 갔고, 부산은 멀다는 이야기가 한 시간째 빙빙 돌아요. 그때 ITS가 한마디 던집니다.

"우리 지금 얘기 들어보면 예산은 1인 15만 원 이하, 당일치기는 싫고, 새로운 데 가고 싶은 거잖아. 그럼 경주 어때?"

동창 모임 총무를 한 번이라도 맡아 본 분들은 이 장면에서 무릎을 치실 거예요. 저자는 ITS가 사람들을 설득한 게 아니라 다들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을 정리해 준 것뿐이라고 해요. AI 요약이 기성품이라면 ITS가 만든 결과물은 맞춤 수제 양복 같다는 비유도 찰떡이었고요.


유형마다 '함정'을 꼭 붙여두는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다 자리가 끝나 버리고, 나중에 혼자 "나도 그 생각 했었는데" 하고 만다는 ITE의 함정. 회의 끝나고 엘리베이터에서 혼잣말하는 아재들 얼굴이 몇 명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고요.

<언어자본>은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아까운 책 같아요. 쌓는 습관과 깎는 습관 스무 가지는 큰 회의나 어려운 면담을 앞두고 다시 펼쳐 보기 좋은 목록이에요. 회사에서 말 한마디가 점점 무거워지는 나이라면 더 크게 와닿을 테고,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이는 후배에게 건네도 반가워할 것 같더라고요.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래지는 10월이에요. 단풍 드는 속도만큼은 아니어도 제 말에도 조금씩 제 색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회의에서는 "같아요" 대신 "제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요"로 한번 시작해 볼 참이에요. <언어자본> 덕분에 이 가을, 말버릇 하나 손볼 핑계가 생겨서 든든합니다.


AI가 누구에게나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 주는 시대에, 결국 남는 건 내 경험과 책임이 실린 나만의 언어라는 걸 회의실 말버릇까지 짚어가며 보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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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자기 엄마가 되었고, 당신은 서서히 아빠가 되었다 - 서툰 가족을 지켜 내는 다정한 대화의 힘
지지부부 지음 / 필름(Feelm)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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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가장은 무거운 짐을 먼저 드는 사람, 10월에 만난 부부 에세이 <나는 갑자기 엄마가 되었고, 당신은 서서히 아빠가 되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부모가 된 것 같아?"

아이가 생긴 뒤 남편 지원 씨가 아내 지희 씨와 나눴다는 이 질문이 책 한가운데쯤에 놓여 있어요. 저는 이 대목에서 제목의 비밀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고 하더군요.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을 때도, 아내의 배가 불러 올 때도 아빠가 됐다는 실감이 좀처럼 따라오지 않았다는 남편 쪽 고백을 읽고 나니, 이 긴 제목이 참 정직하게 붙은 거 같았어요.


<나는 갑자기 엄마가 되었고, 당신은 서서히 아빠가 되었다>.

10월도 어느새 중순이고, 한 주를 여는 월요일이에요. 아침 공기가 제법 서늘해져서 겉옷을 하나 더 걸치게 되는 요즘, 한 가족이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꺼내 놓으니 마음 한쪽이 괜히 데워지는 거 같습니다.


지은이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지지부부'로 알려진 김지원, 안지희 부부입니다. 띠지에 적힌 41만 크리에이터라는 문구를 보고, 솔직히 처음엔 화면 속 밝은 부부의 웃긴 일화 모음쯤이겠거니 넘겨짚었거든요. 막상 펼쳐 보니 카메라가 꺼진 뒤의 이야기가 훨씬 많더군요. 연애할 때부터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웃으면서도 서운했던 순간들을 꽤 솔직하게 꺼내 놓아서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엄마가 되었고, 당신은 서서히 아빠가 되었다>만의 재미는 꼭지마다 제목 위에 붙은 이름표에 있는 거 같아요. '지희', 그리고 '지원'. 누가 쓴 글인지 먼저 알려 주고 시작하니까 같은 시절을 아내 자리와 남편 자리에서 번갈아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꼭지 끝에는 QR코드가 있어서 그날의 영상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고, 장마다 끝에는 '지지부부 TIP'이 따로 실려 있습니다. 책 한 권이 영상 채널과 손을 잡고 있는 모양새라 참 요즘 책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장의 '싸움을 만들지 않는 두 가지 룰'은 지희 씨가 쓴 꼭지예요. 두 사람이 12년 동안 제대로 싸운 건 다섯 번 정도라 한 손으로 다 셀 수 있다고 하네요. 둘 다 한번 마음먹으면 좀처럼 휘지 않는 성격이라 오히려 더 조심한다는 거죠. 휘지 않는 것끼리 세게 부딪히면 한쪽은 부러진다는 걸 아니까요.

첫 번째 룰은 '상대방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입니다. "나는 그 부분에서 기분이 나빴어."라는 말에 "왜 그게 기분이 나빠?" 하고 되묻는 순간, 상대가 꺼내 놓은 마음을 받아 주는 대신 저울 위에 올려 자격 심사를 하게 된다는 얘기가 이어져요. 그리고 이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영수증이 없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에서 피식 웃음이 날 거 같아요. 영수증 없으면 아무것도 처리가 안 되는 세상에서 하루 종일 지내다 보니, 사람 마음에까지 증빙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두 번째 룰은 '너는!' 안 하기예요. "신발 정리 좀 잘해 줘."라는 말에 "너는 안 하면서 나한테만 뭐라고 하네."로 받아치면, 그때부터 누가 더 티끌 없는 사람인지 겨루는 시합이 시작된다고 하더군요. "심판도 없고, 이겨도 남는 게 없는 시합이다." 사무실에서도 이 시합은 꽤 자주 열리는 거 같은데 말이죠.

두 사람은 이 룰을 집 안에 놓아둔 낮은 문턱에 빗대요. 그냥 넘어가려고 하면 꼭 발이 걸린다고요. 룰을 깜빡했을 때 한 사람이 "내가 그렇다면?" 하고 슬쩍 물으면 반대쪽에서 "아, 그런 거지. 오케이! 맞아." 하는 답이 돌아온다는 대목은 귀여워서 웃음이 났습니다.


다른 꼭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2장의 '가장의 무게'였어요. 지희 씨가 초록색 배가 불룩 나온 임산부 체험 조끼를 빌려 오는데, 7kg 남짓이라 지원 씨는 그리 힘들지 않았대요. 그런데 아내가 그 조끼를 입은 채로 대형 마트에 가자고 합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내가 너무 신나 보여서 따라나섰다는데, 마트에 계신 분들이 보기 좋다면서 당신 딸도 저런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네요.


집에 돌아와 "어때! 이제 나를 좀 이해할 수 있겠어?" 하고 묻는 아내의 표정이 너무 좋아서, 지원 씨는 조끼를 입은 채로 잠까지 자고 다음 날 반납 직전까지 벗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고는 이렇게 씁니다. "하지만 아주 잠깐, 그 무게의 끄트머리 정도는 만져 본 셈이었다."

끄트머리. 다 안다고 하지 않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꼭지 끝에서 지원 씨는 '가장'이라는 말을 다시 들여다보는데, 제 또래 직장인한테는 이 단어가 유독 크게 들리잖아요. 그 시절 우리 집 가장은 분명 아내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은 가족을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먼저 드는 사람이라고." 월급 들고 오는 사람이 가장이라고 배우며 자란 세대라 그런지, 이 문장 앞에서는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지더군요.


지원 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대목도 있었어요. 수영을 처음 배우는 지희 씨 곁에 있고 싶어서, 본인은 수영을 꽤 하는데도 기초반에 같이 들어갔다고 해요. 수영 선생님은 금세 눈치채셨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 주셨다고요. 헤엄치는 척하면서 실은 아내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는데, 읽는 제가 다 쑥스러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3장의 '서로가 모르는 시간'은 지희 씨 꼭지예요. 남편이 새벽에도 알람 없이 깨서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며 물티슈를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사 둘 만큼 육아는 5:5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집에서 일하다 보니 두 사람은 24시간을 붙어 지냈고, 바로 그게 갈등의 씨앗이 됐대요.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니 굳이 물어볼 것도, 대화할 거리도 점점 사라졌다는 거죠.

"하다못해 한 명이 직장에 다닌다면 밤늦게 치킨을 뜯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라도 할 텐데 우리에게는 그조차도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출퇴근하는 사람의 하루가 조금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밖에서 지쳐 돌아온 하루도 집에서 풀어놓을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얘기니까요.


그래서 두 사람이 찾은 답은 '내가 모르는 상대만의 시간'이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돌아와서 조잘조잘 이야기해 주기로 한 거죠. 지희 씨의 첫 외출은 미용실에서 시작돼요. 단발로 자르고 펌을 하면서 속으로 "안지희, 아직 죽지 않았어." 하고 생각했다는데, 그 한마디에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카페에서 혼자 즐기는 게 왠지 미안해서 남편 줄 쿠키를 두 상자 더 샀는데, 사실 남편은 쿠키를 잘 먹지 않는다는 고백. 홈캠 속에서 아기와 까꿍 놀이를 하는 남편을 보고 당장 뛰어가고 싶은 걸 꾹 참는 마음. 집까지 한 시간을 걸으며 최유리의 (숲)만 반복해 듣고, 오랜만에 들어간 코인 노래방에서 고음마다 목이 갈라졌다는 이야기까지.

"노는 데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쓴 문장인데, 일만 하다 중년이 된 사람한테도 그대로 들어맞는 거 같더라고요. 저도 얼마 전까지는 퇴근하면 유튜브만 보다 잠들던 사람이라 남 얘기 같지가 않았어요.


밤 11시에 들어온 아내를 남편은 "우와, 너무 예쁘다!" 하고 반겨 주고, 두 사람은 잠든 아기에게 조용히 입을 맞춘 뒤 거실로 나와 수다를 시작해요. 그렇게 만들어 낸 '적당한 거리감, 적당한 긴장감, 적당한 궁금함'이 모두 아이를 낳은 부부이기 전에 연인이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지희 씨는 말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여백이 필요하다는 얘기.

솔직히 마음에 걸렸던 꼭지도 있어요. 3장의 '애기가 애기를 낳았다'입니다. 남자 입장에서는 쉽게 읽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는 뜻이에요. 병원 로비의 미닫이문이 등 뒤에서 닫히는 순간부터 얇게 닳은 병원 가운, 침대 아래 놓인 아무 장식 없는 스테인리스 양동이까지 하나하나가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그 양동이를 보고서야 정말 아이가 나온다는 실감이 몰려왔다는 대목에서는 읽는 속도가 확 줄더라고요.


진통이 이어지는 동안 남편은 좁은 간이침대에 몸을 접듯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다고 해요.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잔 걸 알기에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는데, 지희 씨는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나를 조금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씁니다. 아홉 시간이 지나 결국 제왕절개를 하게 되고, 척추에 무통 주사를 맞던 그 몇 초를 출산 과정 전체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꼽아요. 몸의 절반이 나에게서 조용히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는 문장을 읽으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끝내 다 알 수 없는 시간이 그 안에 흐르고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엄마가 되었고, 당신은 서서히 아빠가 되었다>라는 제목에서 '갑자기'라는 말이 어떤 무게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에필로그에서 지희 씨는 자신을 편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요. 찍은 영상에서 어떤 장면을 남기고 어떤 장면을 버릴지 고르는 게 일이라서, 이 책도 처음엔 재밌는 하이라이트 위주로 쓰려고 했대요. 진통 중에 자궁 수축 수치를 보고 비트코인 시세냐며 던졌던 농담 같은 것들로요. 그런데 쓰다 보니 손이 자꾸 다른 샛길로 빠져서, 하루 대여료가 400만 원인 드레스 앞에서 위축됐던 마음 같은 것들이 새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아, 이건 편집된 장면 뒤에 있던 진짜 이야기들을 쓰는 일이구나.' 하고 깨달았다고요.


이 책이 이만큼 솔직해진 건 아마 그 샛길 덕분인 거 같아요. 마지막 장에서는 책을 덮고 나면 곁의 누군가에게 이 말을 건네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좋은 장면 말고, 잘려 나갔을 법한 쪽부터."

책은 한 손에 가볍게 들리는 크기라 부담이 없어요. 7kg짜리 조끼 체험을 이 책으로 하려면 몇십 권은 쌓아 들어야 할 판이니, 저는 그냥 한 권씩 읽는 걸로 만족할게요. 출산 후 처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찍은 지희 씨의 셀카, 마지막 장에 실린 세 식구 가족사진까지 들어 있어서 남의 집 앨범을 넘겨보는 기분도 듭니다.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나는 갑자기 엄마가 되었고, 당신은 서서히 아빠가 되었다>를 식탁 한쪽에 올려 두고 부부가 번갈아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단풍이 하나둘 물들기 시작하는 10월 중순, 월요일부터 좋은 책 이야기로 한 주를 여니 기분이 괜찮네요. <나는 갑자기 엄마가 되었고, 당신은 서서히 아빠가 되었다> 덕분에 저도 곁에 있는 사람한테 편집되지 않은 쪽부터 먼저 물어보고 싶어졌어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요즘 저는 사계절 내내 책을 끼고 다니니, 이것도 아재 나름의 '책임감'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좋은 책 만나서 마음 한쪽이 든든해진 월요일이에요.


마음에는 영수증이 없다고 말하는 부부가, 서로 다른 속도로 부모가 되어 가며 다시 같은 편으로 돌아오는 법을 솔직하게 들려주는 가족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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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기술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김옥림 지음 / 미래북(MiraeBook)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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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말솜씨는 목록에 없었다, 책사 15인에게 배우는 <설득의 기술>


회의실에서 "예스"를 말하는 쪽은 대개 직급이 낮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자기 참모 앞에서 무조건 "예스!"라고 하는 게 상책이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책사 루이 하우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의 기술>은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책이 되어버렸어요.


<설득의 기술>은 김옥림 작가가 동서고금의 책사 15인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책이에요. 중국에서는 제갈량, 순욱, 장량, 위징이 나와요. 서양에서는 루이 하우부터 조르주 퐁피두까지 다섯 사람, 우리나라에서는 을파소부터 박문수까지 여섯 사람이 등장합니다. 목차만 보면 역사 인물 열전 같은데, 장을 열면 흐름이 조금 달라요. 한 사람의 생애를 먼저 들려주고, 그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 방식을 첫째, 둘째, 셋째 하고 꼽아요. 그 사이사이에 어울리는 명언을 한 줄씩 끼워 넣는 식이거든요. 역사책과 자기계발서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보통 자기계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손에 들면 팔뚝이 먼저 설득당하는 거 같아요. 책장을 열기도 전에 이미 "예스"입니다. 그래도 열다섯 사람이 장별로 나뉘어 있어서, 마음 가는 인물부터 골라 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훌륭한 책사가 갖춰야 할 조건을 일곱 가지로 꼽아요. 지혜, 예지력, 판단력, 분석력, 논리력, 통찰력, 그리고 품격 있는 인품.

말솜씨는 그 목록에 없더라고요.

설득이라고 하면 저도 늘 말 잘하는 사람부터 떠올렸던 터라 이 목록이 꽤 신선했어요. 작가가 인용한 아이젠하워의 말도 한 번 더 읽게 되더라고요. "설득은 그를 계속 자리에 남게 하지만, 위협은 겁먹은 동안에만 머무르게 할 뿐이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 두 가지를 다 겪어 보게 되잖아요. 목소리 큰 사람 앞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나온 회의가 몇 번이었는지, 그렇게 정해진 일이 얼마나 갔는지.


서양 편 첫 장 (상대의 마음을 꿰뚫고 대응하는 소울 설득법)의 주인공 루이 하우는 처음부터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어요. 작은 키에 허약한 몸인데, 한번 마음먹은 일은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악바리였다고 해요. <뉴욕 헤럴드> 기자 시절에는 두 달밖에 못 산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현장을 뛰어다녔다고 하고요. 루스벨트가 주 상원의원 선거를 앞두고 장티푸스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자, 후보 없는 선거판에 뛰어들어 농민과 노동자를 공략해 당선시켜 버립니다. 선거 참모 드라마를 한 편 보는 거 같아서 이 부분은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마음에 남은 건 그다음 설명이었어요. 루이 하우는 감을 타고난 사람인데도 감에만 기대지 않았다고 해요. 자료와 사례를 모아 철저히 분석하고, 잘된 것은 더 잘되게, 잘못된 것은 왜 잘못됐는지 따져서 대안을 내놓았다는 거죠. 회의 자료 만드는 사람으로선 괜히 찔리더라고요.


다른 장보다 속도를 늦춰 읽게 된 건 루스벨트가 소아마비로 쓰러진 뒤의 이야기였어요. 루이 하우는 7년 동안 곁에서 그를 보살폈고, 루스벨트는 다리를 절면서도 다시 정계로 돌아옵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고 1년 뒤, 루이 하우는 병으로 눈을 감아요. 66년을 사는 동안 20년 넘게 한 사람을 위해 살았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더군요.

책은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설득을 '보디 설득법'이라고 불러요. 이름은 좀 낯선데 뜻은 금방 들어왔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행동은 말보다 강하다"를 7년이라는 세월로 증명한 사람이 있었던 셈이니까요. <설득의 기술>이 처세서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거 같아요.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루이 하우는 41세, 루스벨트는 30세였다고 해요. 작가는 11살 차이 나는 두 사람을 조선의 이항복과 이덕형에 빗대는데, 그 비유가 꽤 잘 맞는 거 같아요. 루스벨트는 루이 하우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다고 하니까요. 마흔 넘어 만난 사람과도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게, 중년 직장인 입장에서는 은근히 든든하게 읽혔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대목도 있었어요. 루이 하우는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루스벨트에게도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고 해요. 그럴 때 루스벨트는 무조건 "예스!"라고 하는 게 상책이었다는 거고요. 처음엔 이걸 설득법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었습니다. 회사에서 그대로 따라 했다간 곤란해질 게 뻔하니까요.


그런데 작가가 바로 뒤에 붙여 놓은 한 문장.

"사실 대개의 직설적인 표현은 사심이 없는 충언일 때가 많다."

7년의 보살핌과 20년의 헌신이 먼저 쌓여 있었으니, 루스벨트도 그 거친 말을 받아낼 수 있었겠구나 싶더라고요. 결국 순서의 문제 같아요. 신뢰가 먼저고, 직언은 그다음.

우리나라 편으로 넘어오면 분위기가 또 달라집니다. (문무를 겸비한 지략과 믿음의 설득법)의 주인공은 신라 진흥왕의 책사 거칠부예요. 내물마립간의 5대손인 왕족인데, 어려서 큰 뜻을 품고 승려가 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다니며 그곳 사람들의 삶과 나라 구석구석을 살폈다고 해요. 승려가 된 이유도 다니기 수월해서였다는 설명이 붙어 있어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고구려에 잠입해 혜량법사의 설법을 듣던 거칠부에게, 어느 날 법사가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어요.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가련한 인생일 뿐입니다." "사실대로 말해보거라."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끝내 신라에서 왔다고 털어놓자, 혜량법사는 밤에 그를 선방으로 불러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어서 신라로 떠나라고 일러줍니다. 관상을 보니 크게 될 사람이니, 훗날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오거든 자기를 해치지 말아 달라는 약조와 함께요. 짧은 문답인데 사극 한 장면 같더라고요. 이 약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는 쪽이 훨씬 재미있을 거 같아요.

작가가 꼽은 거칠부의 첫 번째 설득법은 발로 뛰며 쌓은 정보예요.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 주면 상대는 그 고마움에 함께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먼저 교류를 청하게 된다는 설명이 이어지는데요. 회사에서도 결국 사람이 모이는 쪽은 뭔가 아는 사람 쪽이더라고요. 묻기도 전에 필요한 걸 먼저 챙겨 주는 선배가 어디든 한 명쯤은 꼭 있잖아요.


세 번째로 꼽은 문무 겸비 대목에서는 실력을 '그 사람만의 라이선스'라고 표현해요. 실력을 갖춘 사람은 훈장 노릇을 해서라도 밥은 먹고 살았다는 대목에선 괜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명함에 박힌 직함은 언젠가 내려놓아야 하지만, 몸에 붙은 실력은 끝까지 따라온다는 얘기로 들렸거든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문장은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두 장에 똑같이 컴퓨터가 나온다는 점이었어요. 루이 하우 장에서는 그의 머리가 컴퓨터처럼 작동했다고 하고, 거칠부 장에서는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작동되지 않는 컴퓨터와 같다고 하거든요.


한 대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한 대는 전원도 안 켜진 채.

그 사이에 끼워 둔 조 카를로조의 말이 요즘 제 처지랑 딱 맞아서 반가웠어요. "날마다 한 가지씩 새로운 것을 배우면 경쟁자의 99퍼센트를 극복할 수 있다." 퇴근하면 유튜브만 틀던 사람이 서평단 하면서 새 책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됐으니까요. 99퍼센트까진 몰라도 어제의 저 정도는 이기고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전원 안 켜진 컴퓨터로 남지 않으려면, 읽은 걸 써먹는 데까지 가 보고 싶고요.

<설득의 기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어도 좋지만, 손 닿는 데 꽂아 두고 필요할 때 한 사람씩 꺼내 보기 좋은 책 같아요. 중요한 보고를 앞두고 말이 자꾸 겉도는 거 같을 땐 루이 하우 장을, 뭘 알아야 할지 막막할 땐 거칠부 장을 펴 보는 식으로요. 장마다 명언이 촘촘히 박혀 있어서 밑줄 칠 곳도 넉넉하고, 양장이라 오래 두고 봐도 끄떡없겠더라고요.


10월도 중순을 넘기면서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어요. 가을이 깊어 가는 토요일, 프롤로그의 한 문장이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인생의 책사가 되어야 한다." 제 인생 책사 자리는 일단 제가 맡아 보기로 했습니다. 월급은 안 나오지만요.


좋은 사람 열다섯 명을 한꺼번에 소개받은 기분이라 이번 주말은 꽤 든든합니다. 단풍 구경 가시기 전에, 옆 사람 마음 한번 읽어 주는 연습부터 같이 해 보시죠.


말솜씨보다 마음을 읽는 눈, 그리고 행동으로 쌓은 신뢰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걸 책사 15인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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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ADHD가 뭐길래 - 뇌 구조부터 인간관계 팁까지, 딱 한 권으로 이해하는 성인 ADHD 가이드북
알렉스 코너 외 지음, 성세희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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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대체 ADHD가 뭐길래>는 표지부터 귀여운 책이에요. 하늘색 볼펜으로 마구 휘갈긴 실뭉치 속에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팔다리만 삐죽 내민 채 파묻혀 있거든요. 줄무늬 꼬리는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있고요. 그 위에 "나는 왜 늘 인생을 벼락치기로 살까?"라는 질문까지 붙어 있으니, 마감 앞에서만 사람 구실 하는 직장인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조합입니다.


10월도 중순을 넘긴 토요일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계절인데, 이런 주말에 새 책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즐겁습니다.


원서 제목은 예요. 꽁꽁 싸맨 짐을 풀어헤친다는 느낌이라 엉킨 실뭉치 표지와 짝이 잘 맞는 거 같더라고요. 쓴 사람은 알렉스 코너와 제임스 브라운입니다. 둘 다 생의학과 신경생리학을 공부한 과학자이고, 서른이 넘어서야 ADHD 진단을 받았대요. 지금은 팟캐스트 (성인 ADHD인들)을 함께 진행하면서 'ADHDadultUK'라는 자선단체도 꾸려가고 있습니다. 번역은 성세희 님이 맡았고, 미래의창에서 이번 10월에 나왔어요.


두께는 보통 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처음엔 냄비 받침으로 써도 손색없겠다 싶었는데, 펼쳐보니 냄비보다 제 머리가 먼저 데워지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만의 특이한 점은 괄호예요. 과학 이야기를 하다가도 괄호만 열리면 꼭 농담이 하나씩 튀어나옵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의 영어 이름 Alexithymia를 소개하면서 "아쉽게도 알렉스의 이름을 따서 붙은 말은 아닙니다"라고 덧붙이고, 모닥불 비유 끝에서는 "고슴도치가 진짜 사람을 무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며 슬쩍 발을 빼요. 뇌과학 용어가 줄줄이 나오는데도 <대체 ADHD가 뭐길래>가 가볍게 읽히는 건 아마 이 괄호들 덕분인 거 같아요.


프롤로그는 두 저자의 자기소개인데, 여기서부터 벌써 정이 들어버렸어요.


제임스는 어릴 때 주치의에게 "크면 괜찮아질 겁니다"라는 말을 들었대요. 본인 말로는 헛소리였다고요. 지금도 통화할 때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하고, 본가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도 내내 서서 돌아다니며 이야기한다니까요. 일곱 살에 열두 살 수준으로 책을 읽었다면서 "마흔아홉이 된 지금도 독서 수준은 열두 살에 머물러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라고 자기를 놀리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마흔아홉이면 거의 제 또래거든요. 생활기록부에 '진득하게만 노력하면 성공할 아이'라고 적혔던 사람이 박사가 되고 강단에 선 뒤에도 남들과 다르다는 감각을 내내 안고 살았다는 얘기는 남 일 같지가 않았어요.


제임스가 스스로를 요약한 문장도 있습니다. "타인은 돕지만, 자신은 돕지 않음." 동료에게는 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기 검사 결과는 몇 년을 묵혀뒀다는 거예요. 승진도 했으니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고백이 이어지는데, 중년 직장인이라면 이 착각이 어떤 건지 대충 감이 오실 것 같아요.


팬데믹 시기에 크게 무너졌던 이야기도 나와요. 저자는 그 시간을 꾸밈없이 털어놓고, 2021년 2월 2일 진단받은 날을 생일이나 졸업식, 결혼식만큼 중요한 날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따라가게 되더군요. "단 한 사람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 책이 왜 쓰였는지가 이 문장 하나에 다 담겨 있는 느낌이었어요.


알렉스 쪽은 조금 더 경쾌해요. 진단을 받은 뒤 어머니에게 티가 났었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아니?" 하셨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음,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라고 하셨대요. 알렉스가 제일 좋아하는 어머니 어록이라는데 저도 이 대답이 참 좋았습니다. 집에서만큼은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고백한 바로 뒤에 "이 문장은 갑자기 낯간지러운 말을 한다며 가족이 제가 어디 아픈 건지 걱정할까 봐 적었습니다"라는 괄호가 붙어 있는 것도 딱 이 사람답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0장 (도파민 도둑)이에요. 어떤 일을 하려면 먼저 그 일이 할 만하다고 뇌를 설득해야 하는데, ADHD인의 뇌에는 그 설득이 잘 먹히지 않는대요. 그래서 남들 눈에는 게을러 보여도 본인에게는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일종의 마비 상태가 찾아온다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비유가 기가 막힙니다. '의지력만 있으면 다 된다'는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이, 열심히 1km를 달렸더니 "의지력만 있으면 100km 더 뛸 수 있어"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대요.



1km 뛰고 나서 듣는 100km 소리.

회사 다니는 사람이면 이 기분은 다들 한 번쯤 맛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스마트폰 이야기도 나옵니다. 도파민이 가장 많이 나오는 건 성패가 불확실한 바로 그 상태래요. 그래서 알림을 확인하려고 화면을 아래로 쭉 당기는 동작이 카지노 기계를 닮았다는 거고요. 저자들이 거대 기업들을 향해 "참 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하고 한소리 하는데, 읽는 사람도 괜히 뜨끔해지는 대목이었어요.


맛보기로 이런 대목이 있어요.


"지금 당장 아주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얻는다고 칩시다. 그런데 1년을 기다리면 더 큰 케이크 한 판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당연히…… 지금 당장 먹는 케이크겠죠!"


그러고는 만족 지연은 "우리 전공이 아니란 뜻이죠"라고 쿨하게 정리해요. 그래놓고 불가능한 건 아니고 덜 효과적일 뿐이라고 다독이는 데까지가 이 책의 화법인 거 같습니다.


11장 (ADHD의 유리 멘탈과 거절의 두려움)에는 '제임스와 버거 분노' 사건이 나와요.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에서 뽑은 주문 번호가 89번이었는데, 얌전한 주머니곰처럼 기다리던 제임스 앞에서 91번 손님이 먼저 음식을 받아 간 거예요. 제임스는 죄 없는 직원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했대요. 그 가게엔 다시는 못 가게 됐다는데, 그 뒤에 "다른 이유로 못 가는 가게들도 몇 군데 더 있고요"라는 한 줄이 붙어 있어서 또 웃었습니다.


그렇다고 웃고만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욱하고 돌아서서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순간은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오잖아요. 저자들은 그 순간의 정체를 설명해주면서도 선은 분명히 긋습니다. "ADHD는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변명이 될 수는 없어요." 감싸주기만 하는 책이었다면 이만큼 믿음이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비-ADHD인이 상대의 감정 반응에 화내는 것도 정당하고 ADHD인이 감정을 완벽히 다스리지 못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대목처럼, 어느 한쪽 편만 들지 않는 시선이 좋았습니다.


14장 (ADHD의 4대 적)은 읽는 내내 피식피식 웃게 되는 장이에요. 직장에서 단골로 듣는 "플래너 써봤어? 할 일 목록은?"이라는 질문에 저자들은 "어휴, 네, 그럼요, 당연하죠"라고 대답합니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몰입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 걸 '쌍곡선으로' 일한다고 표현하고, 처음에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늘 불을 끄러 다니는 소방관 신세가 된다고도 해요. 마감 전날 밤의 초인적인 집중력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흔한 자기계발 조언인 '개구리부터 먹기'에도 할 말이 많더라고요. 어려운 일부터 해치우라는 그 전략 대신 따기 쉬운 열매로 작은 승리를 맛보고 '도파민 한 방'을 얻으라고 권해요. "남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꼭 개구리부터 먹진 마세요"라는 말이 유독 시원했습니다. 제임스의 이 말도 빼놓을 수 없고요.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싶다면, ADHD인에게 다른 일을 시켜라!" 물론 반쯤 농담이래요.


솔직하게 걸렸던 대목은 따로 있어요. 찔린 쪽이 오히려 저였거든요.


16장 (신경전형인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에서 저자들이 코치로서 가장 자주 듣는다는 말이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닌 것 같다"래요. 괄호 안에는 '그리고 우리도 생각했던'이라고 덧붙여 놓았고요. 마흔 줄 후반에 들어서도 이 문장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움직이면 안 되는 회의실에서 들썩이는 몸을 붙들어 매고 버텼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기대되는 방식'대로 반응하려고 애쓰는 일이 무척 피곤하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진단과 상관없이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남 얘기로만 들리지 않을 대목이에요.


그래서인지 이 장의 비유가 더 크게 들렸어요. 성인 ADHD인은 네모난 못 같아서 사회가 기대하는 동그란 구멍에 잘 맞지 않는대요. 그러니 억지로 자기를 깎지 말고, "사회가 네모난 구멍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만들어봅시다!"라고 말해요.


직장 이야기도 꽤 구체적이에요. 유연 근무, 헤드폰, 자율 좌석제가 어떤 사람에게 맞고 어떤 사람에게 안 맞는지까지 나옵니다. '인정의 대화' 대목에서는 "매주 3시간씩 미팅을 하거나 뜨거운 포옹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라면서 짧은 '엄지척' 하나면 충분하다고 해요. ADHD가 있든 없든 회사 다니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 같았어요.


소장 가치는 넉넉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ADHD가 유행'이라는 말을 쉽게들 하는데, 이 책에는 성인 약 40명 중 1명꼴이고 1형 당뇨병보다 적어도 5배는 흔하다는 이야기부터 원인, 진단, 약물, 공존 질환까지 차근차근 담겨 있어요. <대체 ADHD가 뭐길래>는 책상 가까이 두고 그때그때 필요한 장을 다시 펴보기 좋은 구성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옆자리 동료나 가족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든든한 참고서가 될 것 같아요.


창밖 은행잎이 하나둘 노랗게 물드는 걸 보니 가을이 제대로 왔나 봅니다. <대체 ADHD가 뭐길래> 덕분에 올가을엔 '정리하기'처럼 막연한 목표 말고 '식기세척기 비우기'처럼 눈에 보이는 일부터 하나씩 해볼 생각이에요. 개구리는 당분간 연못에 그대로 두고, 저는 따기 쉬운 군고구마부터 먹으러 가볼게요. 웃으면서 배운 게 많아서 주말이 든든한 기분입니다. 다들 선선한 가을 주말 잘 보내세요.


게으름 탓만 하던 산만한 뇌에게, 같은 고민을 먼저 겪은 과학자들이 웃으며 건네는 친절한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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