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유어 마인드 - 반복되는 루틴에 가려진 내 안의 잠재력과 마주하는 법
마리오 알론소 푸이그 지음, 성소희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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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자기계발서라는 분류에 솔직히 좀 시큰둥했습니다. 의지를 더 짜내라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책은 이미 충분히 봤으니까요. <리셋 유어 마인드>는 그 기대를 비껴갑니다. 마음을 다잡는 요령을 가르치는 대신,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뇌의 작동 원리로 파고드는 책이거든요. 저자 마리오 알론소 푸이그는 하버드에서 외과 펠로우십을 마치고 25년을 수술실에서 보낸 의사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을 다루는 손길이 위로보다 해부에 가까워요. 환자의 몸을 들여다보던 사람이 이번엔 사람의 마음을 같은 태도로 절개해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책은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가. 저자의 답은 아니라는 쪽이에요. 좌뇌는 실제 세계의 요소를 제거하고 왜곡하고 일반화하는 데 능숙한데, 우리는 그렇게 가공된 상을 진짜라고 믿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는 이걸 안경과 지도라는 비유로 풀어냅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지도 한 장을 들고 살아가고, 비슷한 지도를 가진 사람하고만 쉽게 통한다는 거죠. 같은 회의실에서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른 결론을 들고 나오는 일이 흔한데, 그게 단순한 입장 차이가 아니라 애초에 서로 다른 세계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면 '작화'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좌뇌가 정보의 빈틈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메우는 능력이에요. 저자는 우뇌에 뇌졸중이 온 환자가 자기 팔다리를 남의 것이라 우기는 사례를 의사의 시선으로 끌어옵니다. 이게 특수한 병리가 아니라 누구의 뇌에서나 늘 돌아가는 기본 습성이라는 거예요. 화가 났을 때 스스로 대는 이유와 진짜 이유가 어긋난다는 지적,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암류가 생각보다 많다는 문장 앞에서는 등이 서늘했습니다. 그가 못 박는 한 줄이 있어요. "무지와 오만의 결합보다 더 나쁜 조합은 없다. 좌뇌는 자신의 한계를 모르며, 이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좌뇌는 권한을 남용한다."


흥미로웠던 건 이 왜곡이 늘 바깥을 향하지만은 않는다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누군가를 강하게 미워하거나 까닭 없이 존경하는 마음을 '투사'로 설명해요. 싫어하는 면을 타인에게 비추면 그 사람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정작 내 안에 있지만 알아채지 못한 좋은 특성을 비추면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된다는 겁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유독 거슬리는 사람, 까닭 모르게 따르고 싶은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감정의 출처가 상대가 아니라 제 안쪽일 수 있다는 말은 한참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어요.


이 책이 뇌과학 교양서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이 메커니즘을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끌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내면 아이를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클리블랜드의 한 박물관에서 본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단면을 이야기합니다. 수백 년 묵은 거목도 처음엔 작은 나무였고, 첫 나이테부터 마지막까지 상처가 관통하고 있더라는 거죠. 우리가 겪은 감정의 상처도 나무 속 균열처럼 오늘까지 이어진다는 비유에는, 자기계발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무게가 실려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을 때 책임을 다하지 않은 어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탓한다는 통찰이 깊게 와닿았어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사랑받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이 평생 무의식에 남아 같은 자리를 맴돈다는 겁니다. 좌뇌가 미성숙한 시기에 잘못 새겨진 자기 정의가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굳어진다는 설명을 읽다 보면, 유난히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일수록 이 책이 아프게 읽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께 저자가 건네는 말이 따뜻해요. 당신의 실수는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과감하게 다른 길을 시도했기 때문이고, 당신이 버림받은 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적었을 뿐이라고요.


다행히 저자는 진단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처방의 핵심은 '재해석'이에요. 좌뇌가 충분히 자란 지금이라면 같은 기억을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는 거죠. '나는 잘못된 존재가 아니야, 나를 괴롭히던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을 뿐이니까'로 서사가 뒤집히는 순간을 그는 치유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익숙한 고통을 안전함으로 착각해 비슷한 상처를 주는 관계로 자꾸 끌려가는 습성을 짚는 장도 인상적이에요. 운이 나쁜 게 아니라 우뇌가 어린 시절의 익숙한 신호를 좇은 결과라는 분석은, 왜 사람이 늘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지를 드물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자녀를 키우는 입장에서 새겨둘 대목도 있습니다. 아이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과 '너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구분이에요. 규범은 가르치되 행동과 존재 방식은 엄격히 분리해야 한다는 원칙인데, 양육뿐 아니라 직장에서 누군가를 평가하고 피드백하는 자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가장 자주 곱씹은 문장도 비슷한 결이었어요. 자기가 받은 대우에 따라 남을 대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구절입니다.


책의 끝자락에는 직접 따라 해볼 수 있는 명상록이 부록으로 붙어 있습니다. 호흡과 몸의 감각으로 좌뇌의 해석을 잠시 내려놓는 안내인데, 이론으로만 끝내지 않으려는 저자의 배려가 읽혔어요. 거기 놓인 한 문장이 결국 이 제목의 정확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의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 일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달라지면 더는 우리를 옭아매지 못한다는 것. 리셋이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읽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어요. 부록으로 갈수록 창조적 무의식이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와 연결된다는 식의 표현이 잦아지면서, 앞부분의 단단한 과학적 어조에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다소 들뜨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명상이라는 형식의 특성으로 이해하면 크게 거슬리진 않지만, 두 어조의 낙차가 있다는 점은 미리 일러두고 싶어요.


판형이 손에 쏙 들어오는 핸드북 크기라, 가방 어디에 넣어도 부담이 없고 짧은 짬에 한 챕터씩 넘기기 좋습니다. 단숨에 읽기보다 천천히 곱씹는 책이라 이 작은 크기가 오히려 잘 맞아요.


이 책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흔한 말을, 뇌라는 구체적인 기관의 작동 원리로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막연한 다짐 대신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 오래된 자기 비난의 습관에서 조금 비켜서고 싶은 사람에게 닿을 책이에요. 위로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다르게 읽어내기 위해 펼치기 좋은 한 권입니다.


서평단으로 이 책을 받아 읽는 동안, 정작 바꿔야 할 것은 바깥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는 제 안의 시선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그 한 가지를 짚어준 것만으로도 곁에 오래 둘 이유는 충분했어요.


여름이 본격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시기입니다. 바깥 더위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머릿속이 자꾸 시끄러워지는 이런 계절에 한 번쯤 생각의 회로를 식히고 정리하고 싶다면, 이만한 동행도 흔치 않을 듯합니다.


현실을 바꾸는 가장 실질적인 길은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읽어내는 내 안의 해석을 다시 쓰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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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 쓰고 복수 좀 하고 오겠습니다 ㅣ 나비클럽 소설선
홍선주 지음 / 나비클럽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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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창밖으로 마천루가 늘어선 도심 사무실, 흩날리는 결재 서류, 그리고 한쪽에서 불길이 치솟는 와중에 단정한 셔츠 차림의 여성이 라이플을 들고 서 있습니다. <반차 쓰고 복수 좀 하고 오겠습니다>의 표지를 처음 봤을 때, 책상 위에 한참 세워두고 들여다봤어요. 일본 애니메이션 한 장면을 잘라 붙인 것처럼 강렬한 일러스트라, 평범한 회사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펴기도 전에 전해집니다. 일상과 비일상이 한 화면에서 부딪치는데 그 충돌이 어쩐지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요.


제목도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로 누군가 반차를 내고 복수를 하러 가요. 다만 그 복수가 험악한 그림이 아니라서, 책장을 넘길수록 자꾸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주인공 최혜주의 인생 모토는 '재미'입니다. 효율을 앞세우는 인물 선웅과 정확히 대척점에 선 사람이죠. 이 사람이 회사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을 풀어가는데, 그 방식이 좀 독특해요.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관찰합니다. 작은 챕터 하나만 봐도 그 방식이 드러나요. 탕비실 커피믹스가 사라지는 시시한 사건을 두고 팀장이 사자성어까지 동원하며 거창하게 포장하는데, 혜주는 그 호들갑을 받아넘기면서도 정작 사건 자체는 숫자를 들여다보며 차분히 풀어냅니다. 예년 구매량과 올해 소비량을 맞춰보고 버려진 봉지 수의 어긋남을 짚어내는 식이죠. 영화처럼 용의자를 쫓게 됐다며 혼자 신나하는 대목에선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읽다 보면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마주쳤을 인물들이 줄줄이 나와요. 효율에 집착하는 사람, 남의 맞춤법을 물고 늘어지다 정작 자기 글에선 어색하게 단어를 굵게 처리하는 사람, 사소한 비용까지 회사에 청구하려는 사람까지. 작가가 실제 경험과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상당 부분 녹였다고 밝혔는데, 그래서인지 과장이 아니라 어디서 본 듯한 생생함이 있습니다. 내 얘기가 아니라서 마음 편히 웃을 수 있고, 내 얘기 같아서 속이 후련해지는 묘한 지점에 이 소설이 있어요. 소설가 청예가 "복수와 유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매력적인 코지 미스터리"라고 한 말이 빈말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웃기고 끝나는 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길게 적지는 않았을 거예요. 뒤로 갈수록 온도가 달라집니다. 무대가 한국을 떠나 호주의 작은 카페로 옮겨가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혜주가 아닌 다른 인물이 전면에 나서요. 밝고 명랑하게 손님을 대하다가도 혼자 있을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인물의 뒷모습에, 앞선 챕터들의 유쾌함과는 사뭇 다른 쓸쓸함이 배어 있습니다. 밤늦게 홀로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리움에 잠기는 장면에 이르면, 이 책이 처음부터 가볍기만 한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돼요. 웃음으로 시작해 마음 한켠을 데우며 닫히는 흐름이 참 좋았습니다.


작가의 말도 책과 잘 맞물려요. 유머를 사랑해 손글씨로 농담을 모으던 아버지와, 향유에는 큰 관심이 없으셨다는 어머니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그 둘이 섞여 자신이 되었다는 고백이 따뜻하면서도 능청스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인생 뭐 있습니까. 우리 모두 혜주처럼 재미있게 살아요(찡긋)." 이 문장 하나에 책 전체가 담겨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고 정치를 견디는 일의 연속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대신 가볍게 비틀어 보여줍니다. 그 비틀기가 후련하면서도 어느 순간 마음을 데워줘요. 매일 비슷한 하루를 견디며 어딘가 출구가 필요한 분이라면, 또 미스터리 특유의 긴장과 한 방의 시원함을 좋아하면서 가벼운 줄 알고 펼쳤다가 끝에서 뭉클해지는 책을 만나고 싶은 분이라면, 어느 쪽이든 기분 좋게 빠져들 만합니다.


비가 내리는 주말, 창에 빗줄기가 그어지는 걸 바라보며 펼치기 딱 좋은 책이었어요. 따뜻한 음료 한 잔 곁에 두고 혜주가 빌런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걸 따라가다 보면, 빗소리에 묻혀 어느새 한 권을 다 넘기게 됩니다. 그렇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재미있게 살자'는 가벼운 말 한마디가 의외로 단단한 삶의 태도로 남더라고요.


실컷 웃다가 시원했다가 끝에서 가만히 뭉클해지는, 직장인을 위한 가장 유쾌한 대리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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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장에서 바로 써먹는 한자어 문해력 80
김진형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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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입니다. 가방 한쪽에 넣어도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워서, 처음 받아 들었을 때는 이 작은 한 권에 무얼 얼마나 담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표지는 연한 분홍 바탕에 초록 별빛이 점점이 박혀 있어 시험서라기보다 차분한 학습 노트에 가까운 인상이었고요.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작은 몸피 안에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가 꽤 단단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한자어 문해력 80>은 김진형 작가가 10대를 위해 쓴 문해력 안내서입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아 읽게 되었는데, 표지 띠지에 적힌 "헷갈리는 단어 하나가 정답과 오답을 가른다"는 카피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는 걸 다 읽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단어를 많이 외우게 하는 책이 아니라, 단어 하나가 놓인 자리를 읽게 하는 책이거든요.


구성이 단정합니다. 한 단어를 풀어낼 때 먼저 한자의 생김새에서 출발하는 어원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 단어가 실제 지문에서 어떤 논리로 쓰이는지 짚은 다음, 칼럼 끝에 '이 단어가 시험지에 나올 때'를 두어 출제자가 파놓은 함정을 일러줍니다. 사고의 기초부터 문학, 사회, 과학, 인문, 심화까지 여섯 장으로 나뉘어 있어서, 국어 한 과목이 아니라 비문학 전 영역을 고르게 훑는다는 점도 미더웠습니다.


저는 1장이 특히 좋았습니다. 전제, 추론, 타당이 차례로 이어지는데, 마치 글 한 편이 어떻게 세워지고 검증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설계도 같았어요. 전제를 설명하는 대목이 특히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눈이 내리니 축구 시합은 취소다"라는 한 문장에 '눈이 내리면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약속이 숨어 있다는 거죠. 책은 이걸 두고 작가가 직접 언급하지 않고 당연하게 깔아둔 '생략된 전제'를 찾아내는 것이 독해의 핵심이라고 짚습니다. 그러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 바탕 위에 놓여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라고 권하더군요. 시험 이야기로 시작해 어느새 사람의 마음까지 데려가는 흐름이 좋았습니다.


추론으로 넘어가면 결이 또 달라집니다. 추(推)라는 글자가 손으로 물체를 앞으로 밀어내는 동작에서 왔다는 설명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남았어요. 이미 아는 지점을 발판 삼아 아직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힘이라는 거죠. 책은 필자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결론의 빈칸을 논리적으로 채워 넣는 것이 독해의 완성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답이 눈앞에 없을 때 섣불리 단정하지 말고 숨겨진 방향을 읽어내려는 질문을 멈추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였고요. 일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자료에 다 적혀 있지 않은 결론을 끌어내야 하는 순간을 자주 만납니다. 그런 자리에서 떠올릴 만한 문장이었습니다.


오래 마음에 걸린 건 3장의 매몰 칼럼입니다. 이미 손을 떠난 과거의 자원에 집착하다가 더 나은 기회를 놓치는 상황을 매몰의 늪이라 부르는데,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판단력이 서서히 마비된다는 문장이 그랬습니다. 책은 학생에게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공부법을 단지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워서 붙들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라고 하지만, 이 조언이 어디 공부에만 해당될까 싶었어요. 들인 시간과 비용이 아까워 잘못된 선택을 끌고 가는 일은 어른의 일상에도 흔하니까요. 이어지는 합리 칼럼에서, 모든 내용을 똑같은 힘으로 외우기보다 무엇이 중요한지 그 이치를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시간과 노력을 배분하라는 말과 나란히 읽으니 한층 또렷해졌습니다.


곁에 두고 싶었던 건 6장의 맥락입니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만 그대로 옮겨놓은 선택지로 흐름을 놓친 학생을 유혹하는 게 출제자의 흔한 함정이라는 설명인데, 결국 단어 하나도 앞뒤 문장의 기운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도 책은 시험 너머로 한 걸음 더 갑니다. 오늘의 실패가 당장은 아픈 점 하나일지라도 훗날 돌아보면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소중한 연결고리였음을 알게 될 거라고요. 학습서의 한 칼럼 끝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니 책장을 넘기던 손이 잠깐 느려지더군요.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단어마다 시험에 어떻게 나오는지 짚어주는 구성이 일관돼서 든든한데, 그만큼 칼럼의 틀이 반복되다 보니 뒤로 갈수록 형식이 익숙해지는 면은 있었습니다. 다만 이건 휴대하며 필요할 때 펼쳐 보는 책이라는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기보다, 막히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해당 칼럼을 펼쳐 보는 식으로 쓰면 이 작은 판형이 제값을 합니다.


다 읽고 나니 누구에게 어울릴 책인지 자연스럽게 그려졌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어휘에서 자꾸 막히는 중고등학생이라면 당장 손에 쥘 만한 도구가 되겠지요. 아이가 문제를 읽고도 확신을 못 하는 모습에 답답했던 부모에게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가늠하는 실마리가 되어 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제 마음에 남은 건, 글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단어를 그냥 흘려보내던 어른에게 이 책이 건네는 환기였습니다. 익숙한 단어 하나의 무게를 다시 재게 만드니까요.


빗소리가 창을 두드리는 주말입니다. 이런 날 두꺼운 책은 어쩐지 손이 무거워지는데, 그럴 때 이렇게 가벼운 한 권을 쥐고 단어 몇 개를 천천히 곱씹는 것도 꽤 괜찮은 독서가 됩니다. 서평단으로 받아 든 책이었지만, 읽는 내내 단어를 대하는 제 태도를 점검하게 했다는 점에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한 줄로 줄이면, 단어를 외우는 책이 아니라 단어를 읽는 눈을 길러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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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랑받는 1등의 언어
유미라 지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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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게 도대체 뭘까.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윗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붙드는 동료, 한마디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푸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원래 저렇게 타고났나 싶었던 적이 있거든요. <결국, 사랑받는 1등의 언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진심이 엉뚱하게 도착하지 않도록 전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로요.


저자 유미라는 연합뉴스TV 현직 아나운서이자 기업 임직원을 대상으로 스피치와 이미지를 가르쳐온 분입니다. 이 책은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았는데, 표지부터 마음이 차분해지더군요. 옅은 미색 바탕에 보랏빛 음파가 잔잔히 번지는 디자인이, 제목이 말하는 '말의 온도'를 눈으로 먼저 느끼게 해 주었어요. 띠지의 한 줄도 오래 눈에 남았습니다. "말을 조금 바꿨을 뿐인데, 내게 다가오는 세상의 온도가 달라졌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깊이 머문 자리는 뜻밖에도 뒤쪽, 경청을 다루는 장이었습니다. 처음엔 직장인다운 마음으로 회의와 협상 파트를 기대하며 펼쳤거든요. 실제로 그 부분도 알찼습니다. 기 센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 게 목소리 크기 때문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에서 주도권이 나온다는 설명, 날카로운 반대를 부정으로 받지 않고 푹신하게 흡수하는 쿠션 언어, '하지만' 대신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를 써서 두 의견이 함께 가는 모양새를 만들라는 조언까지. 당장 다음 회의에서 시험해보고 싶을 만큼 손에 잡혔습니다. 협상은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예술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기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결과가 따라온다는 역설이 자기계발서답지 않게 담백했고요.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무게 중심이 슬며시 옮겨갑니다. 비즈니스의 날카로움으로 문을 열어놓고, 뒤로 갈수록 사람 쪽으로, 관계 쪽으로 걸음을 돌리거든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기도 하고 가장 큰 위로를 얻기도 한다는 대목 앞에서 읽는 속도가 한 번 느려졌습니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예의를 잊거나,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방식을 밀어붙이며 사랑의 온도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영 남 얘기 같지 않더군요.


경청을 진정한 의미에서 다시 정의하는 부분이 그래서 오래 남았습니다. 저자는 그것을 입을 닫고 온몸으로 상대의 세계에 들어가는 환대의 행위라고 부릅니다. 특히 상대를 위한답시고 건네는 "나도 그런 적 있어"가 실은 대화의 주인공 자리를 내 쪽으로 슬쩍 가져오는 가로채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읽으면서 뜨끔했습니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오히려 듣기를 멈추게 만든다는 걸 짚어주거든요. 경청은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가 길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걷는 시간이라는 말. 세상 모두가 자기 말만 하려 할 때 묵묵히 끝까지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문장에 이르면, 이 책이 말하기 기술서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 따라오면 앞쪽의 진단 이야기가 새삼 다르게 읽힙니다. 성격을 보는 검사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인생을 좌우하는 말하기 방식에는 무심하지 않았느냐는 물음, 그동안 입만 열면 손해 봤던 게 인격 탓이 아니라 그저 유형과 상황이 어긋났을 뿐이라는 진단.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일과 남을 듣는 일이 한 뿌리였던 셈입니다.


말의 내용 못지않게 몸짓이 먼저 말을 건다는 후반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펜을 딸깍이거나 다리를 떠는 무심한 습관, 저자가 비주얼 노이즈라 부르는 것들 말이죠. 품격은 화려한 제스처를 더하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소음을 덜어내는 정돈된 멈춤에서 시작된다는 관점이, 더하기보다 빼기에 가깝다는 점에서 표지의 그 한 줄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미팅 자리에는 따뜻한 파스텔 톤이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다는 조언을 읽으며, 표지의 부드러운 색감을 한 번 더 들여다보기도 했고요.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영어로 정리된 개념이 더러 많아 처음에는 빠르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하나 일상의 장면으로 풀어주는 구성이라, 천천히 따라 읽으면 결국 손에 잡히게 정리되더군요.


읽고 나서 떠오른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회의실에서 늘 한 박자 밀린다고 느끼며 스스로를 탓해온 사람, 그리고 정작 가까운 이 앞에서 말이 자꾸 엇나가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 서평단으로 만난 책이지만, 다 읽고 나니 책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가끔 펼쳐볼 안내서가 한 권 늘었습니다.


창밖으로 비가 종일 내리는 주말입니다. 빗소리에 바깥의 소음이 한 겹 걸러지니, 평소보다 말과 마음을 들여다보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더군요. 말의 온도를 다룬 이 책이 이런 날과 잘 어울리는 건, 빗소리에 기대 가만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 어떤 건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건네는 말의 결을 차분히 점검해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런 주말 오후에 곁에 두기 좋은 한 권입니다.


말을 조금 바꾸는 일이 결국 사람과의 거리를 바꾼다는 것. 이 한 권이 담담하게 일러주는 건 그 한 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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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지더라도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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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카페를 통해 손에 쥔 <벚꽃이 지더라도>의 표지는 일본의 한적한 마을을 담고 있었어요. 신록이 우거진 기와집,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 곁을 지켜보는 식구들, 사방으로 흩날리는 벚꽃. 잘 만든 애니메이션 한 장면 같은 그림이라 포근한 가족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생각보다 한참 더 안쪽까지 데려가는 책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한 가족이 부서졌다가 오랜 시간을 건너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낚시를 좋아하던 타다히코가 구와바타라는 작은 마을과 인연을 맺고, 자신이 다니는 건설회사가 바로 그 마을을 개발한다는 사실 앞에서 흔들립니다. 그러다 한 사고를 목격하고 목소리를 잃어요. 말을 잃은 한 사람의 침묵은 곧 가족 전체의 침묵이 됩니다. 아내 아사미, 딸 리나, 아들 켄토가 각자의 자리에서 상처를 감추고 견디는 사이,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전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납니다.


제가 오래 들여다본 건 책의 앞쪽, 아직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던 봄날이었습니다. 비 그친 오후에 타다히코가 네 살배기 켄토를 데리고 장을 보고 돌아오는 장면이요. 물웅덩이를 뛰어넘으며 "하나, 두울", "점프", "야호" 하고 부자가 목소리를 겹치는 그 놀이가 참 환했습니다. 입덧으로 지친 아사미를 위해 꽃을 한 송이 꺾어 가려는 켄토에게 타다히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는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유를 묻는 아이에게 돌아온 대답이 "이대로 둬두면 곧 씨앗이 맺혀서 내년에 또 피어날 테니까"였어요. 그저 화단 앞 대화일 뿐인데, 이 한마디가 이야기 전체에 두고두고 울립니다.


그 꽃이 소래풀, 일본어로 무라사키하나나라고 불리는 연보라색 들꽃입니다. 꽃말이 '지혜의 샘', '우수', '치유'예요. 이 꽃은 타다히코와 아사미가 처음 사랑을 키우던 시절부터 등장합니다. 요통 때문에 들른 치료실에서 둘은 만났고, 타다히코는 다 나은 허리를 두고 "아직 조금 아픈 것 같아요"라며 통원을 이어 가다 끝내 용기를 내요. 데이트하던 길가에서 우연히 본 그 꽃의 이름과 꽃말을 알려 주던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연애의 시작에도, 단란하던 식탁 가운데에도 늘 같은 꽃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의미가 차오릅니다.


후반부로 가면 시점이 어른이 된 켄토에게로 옮겨 갑니다. 여기서 책의 공기가 확 달라져요. 켄토가 다니는 곳은 개발과 정비를 명분으로 권력에 기대어 굴러가는 공익사단법인입니다. 그는 "일의 보람도, 정의감도 버리고" 묵묵히 다니면 "과거의 아버지처럼 직장을 잃고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 걱정은 없다"고 스스로를 비꼬며 출근합니다. 한때 개발 논리와 부딪혀 무너졌던 아버지의 자리에, 아들이 정반대의 체념을 두르고 들어가 앉아 있는 셈이에요. 자연을 지키려던 마음과 먹고사는 현실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한 세대가 어떻게 꺾이고, 그 그늘이 다음 세대로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조용하고 서늘하게 그려집니다.


그러던 어느 점심시간, 켄토에게 낯선 전화가 걸려 옵니다. "어젯밤에 부친이신 타다히코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작가는 이 충격을 단 한 줄로 받아냅니다. "내 주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한때 목소리를 잃었던 아버지처럼, 그 아들도 부고 앞에서 세상의 소리를 잃어요. 아버지는 비 내리는 밤에 길가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가족과는 20년 가까이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 히야마는 켄토의 번호를 알고 있었어요. 생전에 타다히코가 일러두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연락해 달라고. 집을 떠난 뒤로도 아버지는 아들의 번호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켄토 역시 그 번호를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더군요. 끊어진 줄 알았던 선이 실은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었다는 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켄토의 화법도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는 친구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예전에 내 아버지였던 사람"이라 칭하고는 "참, 어이가 없지?" 하며 웃어 보여요. 슬픔을 농담 뒤로 숨기는 그 방식이,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침묵과 닮아 있습니다. 이 가족은 분명 서로를 아끼는데, 그 마음을 똑바로 건네는 법만은 끝내 서툴러요. 출판사가 인용한 한 문장, "아버지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아"가 떠올랐습니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마음을 동시에 품어도 괜찮다는, 이 소설이 끝내 하고 싶은 말이 거기 담겨 있는 듯합니다.


에필로그에 이르면 흩어졌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봄 햇살 가득한 정원, 세 살배기 딸 리리, 팬케이크에 생크림을 묻혀 '작은 산타클로스'가 된 아이를 바라보는 부부. 이 다정한 풍경의 남편이 다름 아닌 켄토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책의 첫 봄날이 통째로 돌아옵니다. 비 그친 오후도, 목말도, 화단 앞에서 꽃 이름을 가르쳐 주는 장면까지요. 켄토는 리리에게 말합니다. "이 꽃은, 우리 가족의 꽃이야." 아버지가 심고 가꾸던 소래풀이 아들의 손을 거쳐 손녀에게로 흘러갑니다. 켄토가 아끼는 라이카 카메라 밑면에 가족의 이니셜을 한 글자씩 새겨 왔다는 대목에선 마음이 오래 멈췄어요. 흩어져 있던 시간에도 그는 가족을 한 사람씩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거예요. 책의 끝자락에서 아내가 "산에 벚꽃이 질 무렵에" 다 함께 가자고 하자, 켄토는 어머니와 여동생 부부까지 부르고 싶어 합니다. 그 약속에서 제목의 뜻이 온전해집니다. 벚꽃이 지더라도, 흩어져 있어도,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요.


읽고 나서 곱씹게 되는 건 "그때 다른 선택은 가능했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 책은 누가 옳았는지를 가리지 않아요. 무엇을 잃었고 그 상실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갈 것인가를 더 오래 묻습니다. 따뜻한 작가로 알려진 모리사와 아키오지만, 이번 작품에는 후회와 죄책감의 결이 한결 짙게 배어 있어 여운이 길었어요. 그러면서도 끝내 절망에 머물지 않고, 불완전한 사랑도 형태를 바꿔 다시 꽃핀다고 다독여 줍니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습니다. 여러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구성 탓에, 한 인물에 막 정이 들 무렵 시점이 바뀌어 호흡이 끊기는 듯한 순간이 더러 있었어요. 다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니, 끝까지 읽는 이에게는 단점이라기보다 설계의 일부로 다가올 듯합니다.


가족과 오래 살아오며 어딘가 말로 다 풀지 못한 매듭을 품고 있는 사람, 사랑하면서도 표현이 서툴렀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이 책이 조용히 손을 잡아 줄 거예요. 거창한 화해를 권하는 책은 아닙니다. 끊어진 듯 보이던 마음도 실은 가늘게 이어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슬며시 일러 줄 뿐이에요. 서평단으로 받아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가 예상보다 안쪽까지 다녀온, 봄에서 초여름으로 건너가는 이 무렵에 잘 어울리는 한 권이었습니다.


벚꽃은 이미 다 졌지만, 그 자리에 돋아난 신록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계절입니다. 책장을 덮고 창밖을 보니, 꽃이 진 자리에도 어김없이 다음 계절이 차오른다는 게 새삼 다르게 보였어요. 져버린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그 자리에 무엇이 다시 피어나는지를 보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벚꽃이 지고 가족이 흩어져도 사랑은 형태를 바꿔 다시 피어난다고, 서툰 우리에게 조용히 건네는 치유의 가족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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