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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지더라도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6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카페를 통해 손에 쥔 <벚꽃이 지더라도>의 표지는 일본의 한적한 마을을 담고 있었어요. 신록이 우거진 기와집,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 곁을 지켜보는 식구들, 사방으로 흩날리는 벚꽃. 잘 만든 애니메이션 한 장면 같은 그림이라 포근한 가족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생각보다 한참 더 안쪽까지 데려가는 책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한 가족이 부서졌다가 오랜 시간을 건너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낚시를 좋아하던 타다히코가 구와바타라는 작은 마을과 인연을 맺고, 자신이 다니는 건설회사가 바로 그 마을을 개발한다는 사실 앞에서 흔들립니다. 그러다 한 사고를 목격하고 목소리를 잃어요. 말을 잃은 한 사람의 침묵은 곧 가족 전체의 침묵이 됩니다. 아내 아사미, 딸 리나, 아들 켄토가 각자의 자리에서 상처를 감추고 견디는 사이,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전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납니다.
제가 오래 들여다본 건 책의 앞쪽, 아직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던 봄날이었습니다. 비 그친 오후에 타다히코가 네 살배기 켄토를 데리고 장을 보고 돌아오는 장면이요. 물웅덩이를 뛰어넘으며 "하나, 두울", "점프", "야호" 하고 부자가 목소리를 겹치는 그 놀이가 참 환했습니다. 입덧으로 지친 아사미를 위해 꽃을 한 송이 꺾어 가려는 켄토에게 타다히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는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유를 묻는 아이에게 돌아온 대답이 "이대로 둬두면 곧 씨앗이 맺혀서 내년에 또 피어날 테니까"였어요. 그저 화단 앞 대화일 뿐인데, 이 한마디가 이야기 전체에 두고두고 울립니다.

그 꽃이 소래풀, 일본어로 무라사키하나나라고 불리는 연보라색 들꽃입니다. 꽃말이 '지혜의 샘', '우수', '치유'예요. 이 꽃은 타다히코와 아사미가 처음 사랑을 키우던 시절부터 등장합니다. 요통 때문에 들른 치료실에서 둘은 만났고, 타다히코는 다 나은 허리를 두고 "아직 조금 아픈 것 같아요"라며 통원을 이어 가다 끝내 용기를 내요. 데이트하던 길가에서 우연히 본 그 꽃의 이름과 꽃말을 알려 주던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연애의 시작에도, 단란하던 식탁 가운데에도 늘 같은 꽃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의미가 차오릅니다.
후반부로 가면 시점이 어른이 된 켄토에게로 옮겨 갑니다. 여기서 책의 공기가 확 달라져요. 켄토가 다니는 곳은 개발과 정비를 명분으로 권력에 기대어 굴러가는 공익사단법인입니다. 그는 "일의 보람도, 정의감도 버리고" 묵묵히 다니면 "과거의 아버지처럼 직장을 잃고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 걱정은 없다"고 스스로를 비꼬며 출근합니다. 한때 개발 논리와 부딪혀 무너졌던 아버지의 자리에, 아들이 정반대의 체념을 두르고 들어가 앉아 있는 셈이에요. 자연을 지키려던 마음과 먹고사는 현실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한 세대가 어떻게 꺾이고, 그 그늘이 다음 세대로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조용하고 서늘하게 그려집니다.

그러던 어느 점심시간, 켄토에게 낯선 전화가 걸려 옵니다. "어젯밤에 부친이신 타다히코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작가는 이 충격을 단 한 줄로 받아냅니다. "내 주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한때 목소리를 잃었던 아버지처럼, 그 아들도 부고 앞에서 세상의 소리를 잃어요. 아버지는 비 내리는 밤에 길가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가족과는 20년 가까이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 히야마는 켄토의 번호를 알고 있었어요. 생전에 타다히코가 일러두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연락해 달라고. 집을 떠난 뒤로도 아버지는 아들의 번호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켄토 역시 그 번호를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더군요. 끊어진 줄 알았던 선이 실은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었다는 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켄토의 화법도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는 친구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예전에 내 아버지였던 사람"이라 칭하고는 "참, 어이가 없지?" 하며 웃어 보여요. 슬픔을 농담 뒤로 숨기는 그 방식이,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침묵과 닮아 있습니다. 이 가족은 분명 서로를 아끼는데, 그 마음을 똑바로 건네는 법만은 끝내 서툴러요. 출판사가 인용한 한 문장, "아버지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아"가 떠올랐습니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마음을 동시에 품어도 괜찮다는, 이 소설이 끝내 하고 싶은 말이 거기 담겨 있는 듯합니다.

에필로그에 이르면 흩어졌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봄 햇살 가득한 정원, 세 살배기 딸 리리, 팬케이크에 생크림을 묻혀 '작은 산타클로스'가 된 아이를 바라보는 부부. 이 다정한 풍경의 남편이 다름 아닌 켄토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책의 첫 봄날이 통째로 돌아옵니다. 비 그친 오후도, 목말도, 화단 앞에서 꽃 이름을 가르쳐 주는 장면까지요. 켄토는 리리에게 말합니다. "이 꽃은, 우리 가족의 꽃이야." 아버지가 심고 가꾸던 소래풀이 아들의 손을 거쳐 손녀에게로 흘러갑니다. 켄토가 아끼는 라이카 카메라 밑면에 가족의 이니셜을 한 글자씩 새겨 왔다는 대목에선 마음이 오래 멈췄어요. 흩어져 있던 시간에도 그는 가족을 한 사람씩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거예요. 책의 끝자락에서 아내가 "산에 벚꽃이 질 무렵에" 다 함께 가자고 하자, 켄토는 어머니와 여동생 부부까지 부르고 싶어 합니다. 그 약속에서 제목의 뜻이 온전해집니다. 벚꽃이 지더라도, 흩어져 있어도,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요.
읽고 나서 곱씹게 되는 건 "그때 다른 선택은 가능했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 책은 누가 옳았는지를 가리지 않아요. 무엇을 잃었고 그 상실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갈 것인가를 더 오래 묻습니다. 따뜻한 작가로 알려진 모리사와 아키오지만, 이번 작품에는 후회와 죄책감의 결이 한결 짙게 배어 있어 여운이 길었어요. 그러면서도 끝내 절망에 머물지 않고, 불완전한 사랑도 형태를 바꿔 다시 꽃핀다고 다독여 줍니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습니다. 여러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구성 탓에, 한 인물에 막 정이 들 무렵 시점이 바뀌어 호흡이 끊기는 듯한 순간이 더러 있었어요. 다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니, 끝까지 읽는 이에게는 단점이라기보다 설계의 일부로 다가올 듯합니다.
가족과 오래 살아오며 어딘가 말로 다 풀지 못한 매듭을 품고 있는 사람, 사랑하면서도 표현이 서툴렀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이 책이 조용히 손을 잡아 줄 거예요. 거창한 화해를 권하는 책은 아닙니다. 끊어진 듯 보이던 마음도 실은 가늘게 이어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슬며시 일러 줄 뿐이에요. 서평단으로 받아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가 예상보다 안쪽까지 다녀온, 봄에서 초여름으로 건너가는 이 무렵에 잘 어울리는 한 권이었습니다.
벚꽃은 이미 다 졌지만, 그 자리에 돋아난 신록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계절입니다. 책장을 덮고 창밖을 보니, 꽃이 진 자리에도 어김없이 다음 계절이 차오른다는 게 새삼 다르게 보였어요. 져버린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그 자리에 무엇이 다시 피어나는지를 보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벚꽃이 지고 가족이 흩어져도 사랑은 형태를 바꿔 다시 피어난다고, 서툰 우리에게 조용히 건네는 치유의 가족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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