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장 일본어 쓰기 습관 100일의 기적 첫걸음 (스프링) ㅣ 매일 1장 일본어 쓰기 습관 100일의 기적
핫크리스탈(허수정)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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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민트빛 표지에 연필 한 자루가 곧게 서 있는 걸 보고,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책은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표지에 적힌 대로 하루 딱 1장, 10분, 100일. 그 숫자들이 어쩐지 마음을 놓이게 했어요. 무언가를 다시 배워보고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이렇게 작게 쪼개준 안내서가 있으면 시작이 한결 가벼워지니까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매일 1장 일본어 쓰기 습관 100일의 기적> 첫걸음 편을 받았습니다. 일본어 강사이자 유튜버로 활동하는 핫크리스탈(허수정) 님이 쓴 책인데, 하루 세 문장씩 100일 동안 총 300개를 손으로 따라 쓰며 기초 회화와 문법을 함께 익히도록 만들어졌더군요. '첫걸음→레벨업→마스터'로 이어지는 시리즈의 입문에 해당하는 도서입니다.


책을 받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제본이었습니다. 스프링으로 엮여 있어서 180도로 활짝 펼쳐도 손으로 눌러가며 편하게 쓸 수 있어요. 펼친 면이 자꾸 접혀 손등으로 눌러야 했던 예전 문제집들을 떠올리면, 이건 확실히 '쓰라고 만든' 물건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연습장 같은 결이라 부담 없이 펜을 대게 되고, 그 편안함 덕분에 오래 앉아 있게 되더라고요.


첫 장을 넘기면 곧바로 어려운 걸 들이밀지 않고,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부터 차근히 깔아줍니다. 청음·탁음·반탁음·요음을 한글 발음과 나란히 표로 정리해두었고, 왜 그렇게 소리가 바뀌는지까지 짧게 덧붙여 놓았어요. か행이나 た행이 두 번째 글자부터 된소리처럼 들린다든지, 조사로 쓰인 は가 '와'로 읽힌다든지 하는 것들이요. 완전히 처음 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막막한 지점을 먼저 다독여주고 출발하는 셈이라, 이 앞부분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본격적인 Day 001의 첫 문장이 '저는 회사원입니다(私は会社員です)'인 걸 보고는 잠깐 미소가 났어요. 하필 회사원이라니. 매일 같은 자리로 향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살가운 출발점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통째로 외우게 하는 대신 '문장 파헤치기'라는 코너에서 조사 は와 종결어미 です를 따로 떼어 설명하고, 낱말 뜻을 붙인 다음 다시 하나로 조립해 보여주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덩어리를 삼키는 게 아니라 조각을 이해하고 스스로 붙여보는 감각이라, 왜 이런 말이 되는지 납득하며 넘어가게 됩니다.


쓰기 페이지의 구성도 군더더기가 없어요. 대표 문장을 세 번 따라 쓰고, 응용 두 개를 옮겨 적은 뒤, QR 코드를 찍어 원어민 음성으로 듣고 따라 말하는 것까지 한 면에서 끝납니다. 모범 답안이 같은 자리에 있어서 바로 확인할 수 있고요. 읽고 쓰고 소리 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니 배운 것이 몸에 조금씩 배는 느낌이 듭니다.


날을 넘겨가며 보다가 마음에 걸린 대목이 몇 개 있었습니다. 부정형을 배우는 자리에서 나온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あなたはひとりじゃありません)'가 그중 하나였어요. 문법을 익히려고 만든 예문일 뿐인데, 지친 저녁에 읽으니 어쩐지 위로처럼 다가왔습니다. い형용사 과거형을 다루는 곳의 '고등학교 선생님은 상냥했어요(高校の先生は優しかったです)'도 그랬고요. 문법책 예문에서 지나온 시절이 잠깐 스치는 경험은 흔치 않은데, 이 책엔 그런 다정한 표현들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동사를 활용해 '방 전등을 끄지 않았습니까', '휴대폰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어요' 같은, 배우자마자 곁의 누군가에게 건넬 법한 안부 표현들이 늘어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책의 끝자락에는 챕터별 핵심 문법을 한자리에 모아둔 부록이 있습니다. 100일 동안 흩어져 배운 문형을 명사·형용사·동사 순으로 나란히 정리해두어서, 나중에 헷갈릴 때 사전처럼 펼쳐볼 수 있게 해두었어요. 긍정형과 부정형을 짝지어 비교할 수 있는 배치라 복습에도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이 공을 들인 지점은 '꾸준함'인 것 같습니다. 앞쪽에 실린 일일 학습 체크 일지에 날짜를 적고 완료 표시를 하나씩 채워가게 되어 있는데, 그 작은 칸들이 100일을 한눈에 보이는 지도처럼 펼쳐져 있어요. 페이지 구석구석에 흐릿하게 적힌 일본어 응원 문구도 그 마음과 이어집니다. 연습이 완벽을 가져온다는 뜻의 練習が完璧をもたらす, 준비가 됐다는 準備ができました 같은 글귀가 배경처럼 놓여 있어서, 오늘 한 장을 마친 사람의 등을 조용히 두드려주는 듯합니다.


거창한 각오 없이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책입니다. 학창 시절 이후로 펜을 놓았던 이도, 여러 번 일본어에 도전했다가 번번이 멈췄던 이도 이 정도 분량이라면 오늘 한 장은 해볼 만하다고 느낄 거예요. 손으로 쓰는 공부가 주는 차분함이 그리웠던 사람이라면 더 반가울 테고요.


장마가 오락가락하는 요즘, 빗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리는 계절에는 마음이 유독 안쪽으로 향합니다. 그런 때 대단한 진도가 아니어도 오늘 무언가 하나를 마쳤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든든한 것이더군요. 서평단으로 만난 여러 책 가운데, 읽고 덮는 게 아니라 함께 오래 써 내려가고 싶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 한 권이 그랬습니다.


하루 세 문장, 100일. 부담을 덜어낸 자리에 꾸준함과 다정함을 채워 넣은 일본어 첫걸음 필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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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들)
클레르 마랭 지음, 류재화 옮김 / 사람in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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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파란색이 이렇게 세게 다가올 줄 몰랐습니다. 코발트블루가 표지를 가득 메우고, 오른쪽 위 붉은 칸에는 검은 새 한 마리가 오렌지빛 부리를 들이밀고 있어요. 아래엔 목선을 드러낸 흑백 사진과 오렌지 색면이 겹칩니다. <단절(들)>, 그리고 원제 Rupture(s). 복수의 s를 굳이 괄호에 가둔 그 표기가 처음엔 눈에만 걸렸는데, 마지막 장을 넘길 즈음엔 왜 저렇게 써야 했는지 수긍이 갔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 활동으로 받은 책입니다. 핸드북 사이즈에 얇고 가벼워 가방 한구석에 넣고 다니기 좋겠다 싶었어요. 실제로 그렇게 읽었습니다. 두께에 비해 한 페이지에 붙들리는 시간이 길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의 인문 에세이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단절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이 한 문장을 축으로, 진로를 바꾸고 거처를 옮기고 병을 앓는 내밀한 균열부터 결별과 절연, 사별 같은 관계의 끊어짐까지를 훑습니다. 니체와 키르케고르, 뒤라스와 에르노가 쉴 새 없이 불려 나오는데도 벽처럼 느껴지진 않았어요. 결국 다루는 게 우리 모두가 한 번쯤 통과하는 일이라 그런가 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단절을 실패나 상처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게 서서히 드러납니다. 「연인과의 결별」에서부터 그래요. 헤어짐을 관계의 파탄이 아니라 정체성의 사건으로 봅니다. 우리가 끝내기로 마음먹는 건 이미 내면에서 무언가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고, 그 갈라진 틈은 상대가 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내 안에 있던 것이라는 거죠. "내가 도망치는 대상은 옛 애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미셸 뷔토르의 <변경>을 끌어오는 대목이 오래 눈에 밟혔습니다. 아내를 떠나 로마의 연인에게 가려던 남자가 여정 내내 떨쳐 내지 못하는 불안이, 알고 보니 상대에게서 온 게 아니라 이미 제 안에 나 있던 균열이었다는 이야기예요. 장소를 바꾸고 사람을 바꿔도 그 불안은 짐처럼 따라옵니다. 떠나는 사람도 떠나오는 사람만큼 상처받는다는 말이, 이 나이가 되니 오히려 담백하게 들렸습니다.


여러 장 가운데 제가 가장 자주 되짚은 곳은 「분산의 기쁨」이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앞서 깔아 둔 판을 스스로 뒤집어요. 우리는 진짜 자아가 하나 있고 나머지는 가면이라 믿지만, 앙리 미쇼를 빌려 "우린 단 하나의 자아를 위해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아가 하나여야 한다는 믿음조차, 주어를 앞세워 문장을 짓는 유럽 언어의 문법이 만든 습관일 수 있다는 니체의 통찰이 뒤따르고요.


이 장에서 저를 붙든 건 넥타이 이야기였습니다. 퇴근한 사람이 넥타이를 풀어헤치는 장면을 두고, 저자는 그것이 실은 목줄이나 밧줄이었을지 모른다고 씁니다. 재킷을 벗고 소파에 몸을 던지는 그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필요를 느낀다고요. 하나의 역할로만 오그라든 삶을 "자동인형처럼 사는 죽은 삶"이라 부르는 문장에서 마음이 서늘하게 걸렸습니다. 오래 일해 온 사람으로서 남 일 같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저자는 이 여러 겹의 나를 흠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로 읽습니다. "내 정체성의 팔레트는 넓다." 돌릴 때마다 무늬가 달라지는 만화경처럼, 나라는 사람도 그렇게 여러 얼굴을 품고 있어도 된다는 허락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무게가 가장 무거운 장은 「가족과의 절연」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이야기를 저자는 피하지 않아요. 안 뒤푸르망텔의 <모성의 야만성>을 인용하며 어머니와 아이의 피부가 겹쳐 아이가 숨 막히는 관계를 그립니다. 다만 짚어 둘 게 있어요. 이 장이 말하는 건 흔한 가족 갈등이 아니라 학대와 폭력이라는 극단의 자리이고, 저자가 꺼내는 근본적 단절도 그런 관계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이탈로 제시됩니다. "어머니 추방은 정신적 재생이며,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밀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끊어냄이 파괴가 아니라 비로소 나로서 태어나는 일일 수 있다는 것. 관계가 늘 지켜야 할 미덕만은 아니라는 사실, 어떤 끊어냄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이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책은 「계약 파기」에서 나직이 닫힙니다. 저자는 우리가 저마다 상상의 울타리를 세워 두고 그 안이 안전하다 믿는다고 말해요. 성실히 일하면 보상받고, 바르게 살면 큰불행은 비껴가리라는, 신이나 운명과 은밀히 맺었다고 여기는 계약 말입니다. 병이나 사고, 가까운 이의 죽음은 그 계약을 예고도 없이 찢어 버리죠. "계약서에는 없었잖아." 병원 부속 사제로 일하던 마리옹 밀러콜라르가 정작 제 아이와 함께 중환자실에 들어서며 내뱉는 이 항변 앞에서, 저 역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내미는 답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회복이 아니에요. 단절을 통과한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 자리에서만 새로운 결속과 신뢰가 싹튼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뜻밖에 기쁨으로 향합니다. "비극적인 밤을 보낼 때조차, 자신 안에 깃든 기쁨의 작은 불꽃을 기억하는 힘을 갖기." 확신도 완벽함도 절대적 안전함도 없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다시 몸을 일으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의 웃음 같은 데서 존재할 용기를 되찾는다는 것. 이 온기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남았습니다.


아쉬움을 굳이 들자면, 인용되는 프랑스 문학과 철학의 결이 촘촘해서 배경이 낯선 독자는 초반에 걸음이 더뎌질 수 있다는 정도예요. 그 간극은 옮긴이 류재화 님의 역주가 성실히 메워 줍니다. 번역가 스스로 역주를 "소맷부리 같은 것"이라 했다는데, 막히는 자리마다 슬쩍 당겨 정돈해 주는 그 손끝이 고마웠습니다.


크고 작은 끊어짐을 이미 여러 번 지나온 사람이라면, 그 경험이 나를 무너뜨린 실패가 아니라 다시 빚어낸 사건이었다고 말해 주는 이 책에서 조용한 위안을 얻을 겁니다. 지금 무언가를 놓아야 할지 저울질하는 중이라면, 끝이 곧 파국은 아니라는 담담한 목소리가 곁을 지켜 주고요.


장마가 시작된 한여름입니다. 매미 소리가 창을 넘고 해가 길게 늘어진 계절에, 이런 책을 느리게 읽는 일이 뜻밖의 그늘이 되어 주었어요. 무언가를 끊어 내고 지나온 자리마다 결국 다른 계절이 오더라는 것을, 이 얇은 한 권이 나직이 일러 주는 듯했습니다.


잃어버린 것 앞에서도 우리는 계속 우리를 새로 지어 갈 수 있다고, 낮은 목소리로 건네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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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 무기가 될 때 - 선행 없이 하위권으로 시작한 과학고 실전 분투기
김현주 지음 / 청림Life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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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표지를 한동안 바라봤습니다. 새하얀 바탕에 잘 깎인 연필심 하나. 화려한 장식도, 요란한 색도 없이 그저 뾰족하게 다듬어진 흑연 끝이 놓여 있을 뿐인데, 그 담백함이 오히려 많은 걸 건네더군요. 결국 손으로 밀어붙인 시간이 아니면 저렇게 깎일 수 없으니까요. 김현주 작가의 <노력이 무기가 될 때>는 그 연필 한 자루의 인상 그대로, 요령이 아니라 우직함으로 채운 3년의 기록입니다.


이 책은 선행 없이 하위권에서 출발해 과학고에 진학한 아들과 지은이가 함께 건넌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중학교 때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던 아이가 입학과 동시에 중하위권으로 내려앉고, 비상한 아이들이 1분 1초를 다투는 곳에서 낯선 방대함과 씨름하는 이야기죠. 흔히 상상하는 성공 신화와는 결이 다릅니다. 콘크리트 내신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6학기 연속 우상향을 이뤄 냈다는 결과가 있긴 하지만, 정작 오래 들여다보는 건 성적 그래프가 아니라 흔들리는 부모의 마음과 아이의 내면입니다.


제게 오래 남은 건 '노력에 건네는 꽃다발'이라는 장이에요. 작가는 애씀이 결과를 얻기 위한 필수 전제일 뿐 필연적인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담담히 적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아이가 받아 든 결과를 아이가 덜 애쓴 탓으로 가장 많이 돌린다는 거예요. 자기 잣대로 재단하다 보니 터무니없는 성적표 앞에서 화가 나기까지 한다는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00점이나 A만 박수받을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특히 그랬어요. 40점이 50점이 되었다면 그 10점 사이에 아이의 남모르는 고군분투가 숨어 있고, C를 받던 아이가 B를 받았다면 거기에도 마땅한 인정과 칭찬이 따라야 한다고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알아봐 주는 언어, 그것이 아이를 지키는 일이라는 태도가 책 전체를 관통합니다.



이 장에서 밑줄을 여러 번 그었습니다.

"성적과 공부의 고민을 부모에게 안심하고 털어놓으며 상의하는 아이의 안정감은 결코 아이의 착한 성정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긴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견고한 신뢰가 바탕이 된 결과입니다."


성적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아이의 태도가 착해서가 아니라 오래 쌓은 믿음 때문이라는 이 문장은, 사실 아이 키우는 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른들의 관계에서도 누군가 제 약점을 편히 털어놓는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무던해서가 아니라 그만한 신뢰가 오간 뒤일 테니까요.



'성적 말고 마음이 걱정'이라는 장도 마음을 붙듭니다. 아이가 성적 차이가 별로 없다는 말을 변명처럼 꺼냈을 때, 작가는 그것을 점수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로 읽습니다. 기약 없는 시간을 홀로 헤맸을 아이의 속, 오직 그것만이 걱정이었다고요. 이미 마음이 꺾인 상태에서 성적표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는 저도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반 동기의 못된 언행에 아이가 온라인 끝말잇기라는 게임으로 도피했던 시기의 서술은 특히 아프게 읽혔어요. 이 국면을 지은이는 부모의 힘만으로 건너지 않았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알렸고, 선생님이 건넨 처방은 뜻밖에도 '산책'이었죠. 아이를 살리는 데는 부모의 노력뿐 아니라 아이를 마음으로 지켜봐 줄 또 다른 어른의 연대가 필요했다는 서술이, 각자도생처럼 굳어 가는 요즘 정서에 잔잔한 반문을 던집니다.


제목이기도 한 '노력이 무기가 될 때'에서는, 세상이 애씀을 대하는 이중성부터 짚습니다. 부족하면 게으르다 질타하고, 부단히 매달리는데도 결과가 없으면 미련하다며 동정한다고요. 그래서 아이들조차 결과만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상처받지 않으려 서서히 노력을 거두어들이다 끝내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된다는 진단은 서늘할 만큼 정확했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무기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제가 말하는 무기는 성적을 올리는 기술이 아닙니다. '노력을 기울일 줄 아는 태도'와 '노력하는 나에게 만족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오늘의 나를 긍정하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노력을 무기로 삼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읽으면서, 이건 입시를 지나는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흘린 땀 한 방울, 미루다 끝낸 정리, 다 읽어 낸 책 한 권 같은 매일의 작은 성취가 자존감의 뿌리가 된다는 말은, 성과로만 사람을 재는 세상에서 오래 버텨 온 이라면 누구나 조용히 끄덕일 만한 문장이었어요.




책이 마냥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골수까지 빼먹을 모양새'라는 장에서는 대치동 내신학원의 공포 마케팅을 꽤 날카롭게 벗겨 냅니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도 쏟아지는 문자, 시험 끝난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내신 대비 수업, 추석 연휴가 성수기라 '추특'이라는 줄임말까지 생겼다는 대목은 우리 사교육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상위권은 추특을 듣고, 하위권은 친척을 만난다"는 광고 문구까지 등장하니까요. 그럼에도 지은이가 내놓는 결론은 냉소가 아니라 중심 잡기입니다. 공포 마케팅의 소음 속에서도 내 아이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거친 사교육 시장에서 부모가 아이를 지켜 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요. 불안을 파는 시장 한복판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세워 두는 일. 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 그 균형을, 작가는 자신의 시행착오까지 다 드러내며 보여 줍니다.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만났는데, 함께 온 별책부록 <과학고 졸업생의 114문 114답>도 반가운 구성이었습니다. 본책이 엄마의 시선이라면 부록은 아이의 시선을 담은 인터뷰집이에요. 과학고 입시와 입학 초기, 친구 관계, 방황과 회복, 기숙사 생활, 부모와의 관계, 대학 입시까지 열 가지 주제를 아이의 목소리로 풀어 두어서, 같은 3년을 부모와 아이가 얼마나 닮게, 또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 나란히 견줘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진학을 앞둔 자녀를 둔 분이라면 실질적인 참고 자료로도 요긴하겠습니다.


판형은 보통이고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아 손에 잡고 편하게 넘기기 좋았습니다. 입시서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다 읽고 나면 남는 건 공부법이 아니라 태도에 관한 이야기예요. 성적표 숫자보다 마음을 먼저 살피는 시선, 결과의 공을 가로채지 않는 겸손,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어른들이 함께 아이를 건네는 연대. 지금 입시의 한복판에서 매 시험마다 흔들리는 부모라면 분명 위로를 얻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 없이 자기 일을 밀고 가는 어른이 읽어도, 성과 앞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이 안에 있습니다.


장마가 시작하고 매미 소리가 부쩍 짙어진 요즘, 후텁지근한 오후를 이 책과 함께 천천히 흘려보냈습니다. 뜨겁게 몰아붙이는 계절일수록,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안아 주는 이런 이야기 한 권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성적표가 아니라 마음과 애씀을 먼저 알아봐 주는 법에 관한, 담담하고 단단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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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막힐 때 꺼내 쓰는 대화의 기술 - 관계를 바꾸고 기회를 만드는 공감 소통의 원리
장신웨 지음, 하은지 옮김 / 알토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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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어떤 날은 대화가 부드럽게 풀리고, 어떤 날은 분명 잘 설명했는데 상대의 표정이 굳습니다. 나이가 들면 이런 일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말 한마디를 고르는 일이 예전보다 조심스러워졌어요. <말문이 막힐 때 꺼내 쓰는 대화의 기술>은 그 미묘한 어긋남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게 하는 책입니다.


저자 장신웨는 바이두, 레노버를 비롯해 300여 개 기업에서 1만 명이 넘는 직장인을 가르쳐 온 커뮤니케이션 트레이너예요. 교육심리학이 바탕에 깔려 있어서 그런지, 화술을 뽐내는 흔한 자기계발서와는 결이 다릅니다. 이 책이 붙잡고 있는 질문은 단순해요. 왜 어떤 사람과는 쉽게 통하고, 어떤 사람과는 늘 어긋날까. 그리고 저자의 대답은 더 단순합니다. 사람은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


'바른말'을 다루는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요리에 소질 없는 아내가 피곤한 남편을 위해 실패할 확률이 적은 밀키트로 찌개를 끓였는데, 남편이 한 숟갈 맛보고는 고개도 안 든 채 "이런 게 영양가가 있겠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내는 그날 저녁 내내 우울했다고 하죠. 저자는 이렇게 정리해요. "'바른말'은 감정을 공유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문제는 본인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몸에 밴 사고방식이라는 설명이 뼈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나쁜 뜻 없이 던진 정확한 지적이 누군가의 저녁을 통째로 가라앉힐 수 있다는 걸, 그동안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이 책이 사람을 함부로 편 가르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매사 트집 잡고 찬물 끼얹는 사람을 저자는 '배척형'이라 부르는데, 그저 피곤한 유형으로 낙인찍지 않아요. 오히려 이들이 남들 못 보는 각도에서 리스크를 먼저 예견하고, 오랜 '문제 경험'으로 분석에 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지지나 위로가 필요할 땐 굳이 이들과 대화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함께 붙여요. 사람을 이해하되 무조건 감싸지는 않는 이 균형이 책 전체에 신뢰를 더해줍니다.


가장 실용적으로 다가온 건 사실과 감정, 요구를 구분하라는 부분이었어요. 우리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내 생일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인데, 입에서는 "당신 날 사랑하긴 해?"가 튀어나온다는 거죠. 저자는 이걸 뇌과학으로 풉니다. 편도체에 쌓인 '암묵 기억'을 호랑이에 비유하는데, 호랑이 얘기만 꺼내도 얼굴빛이 달라지듯 비난받고 무시당했던 오래된 상처가 평가나 원망이라는 말에 건드려지면 순식간에 폭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처방이 사실은 많이, 평가는 적게 말하라는 것이에요. 여기에 이어지는 ABC 표현법은 현실 상황을 사실로 설명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을 담담히 고백하고, 바꾸고 싶은 바를 분명히 제시하는 순서로 짜여 있습니다. "당신이 날 이해해줬으면 해" 대신 "대화는 다음에 하면 안 될까? 요즘 매일 퇴근이 늦었잖아. 집에 오면 좀 쉬고 싶어"로 바꿔보라는 예시는, 이론이 아니라 오늘 저녁 식탁에서 곧바로 꺼내 쓸 수 있는 말이었어요.


책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역할'로 옮겨갑니다. 중국인 아내와 미국인 남편이 손주 양육을 두고 부딪히는 일화가 있는데, 같은 '할아버지'라는 말도 'grandpa'로 옮겨지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책임과 거리감이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저자는 여기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을 내놓습니다. "언어의 이면에는 감정이 숨겨져 있다. 감정 뒤에는 가치가 숨겨져 있으며 가치의 배후에는 역할인지가 숨겨져 있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팀장에서 부모로, 손님에서 자녀로 역할을 갈아입으며 산다는 걸 떠올리면, 소통이 어려운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능한 사람도 자녀 앞에서는 그저 걱정이 앞서는 부모일 뿐이라는 대목이 그래서 더 와닿았습니다.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사례 상당수가 중국의 직장과 가정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호칭 문화를 다룬 부분은 우리 정서와 살짝 결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다만 대화의 원리 자체는 국경을 타지 않아서, 읽는 사람이 자기 상황으로 옮겨 읽으면 충분히 통합니다.


판형도 두께도 보통이라 부담 없이 넘길 수 있는 책이에요. 단원마다 직접 채워보는 연습 칸이 있어서, 눈으로만 읽고 덮는 대신 내 대화를 한 번쯤 종이 위에 꺼내보게 만드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관계가 자꾸 어긋나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분, 옳은 말을 하는데도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 같아 답답한 분이라면 조용히 기댈 만한 안내서라고 생각해요. 화려한 말솜씨보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결국 더 멀리 간다는 걸, 이 책은 차분하게 일러줍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만난 책인데, 더위에 다들 예민해지기 쉬운 요즘 같은 계절에 먼저 읽어볼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무더운 오후, 시원한 카페 한구석에 앉아 천천히 넘기다 보면 그동안 무심코 건넸던 말들을 한 번쯤 되돌아보게 됩니다.


옳은 말보다 통하는 말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상대를 이해하는 태도가 곧 대화의 기술임을 담담히 일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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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 : AI 시대의 새로운 화폐 - 투자가 아닌 부를 지키는 방패
신종현 지음 / 새로운제안 / 202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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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재테크서라고 하면 대개 '얼마를 벌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그런데 이 책은 표지부터 결이 달랐어요. 짙은 남색 우주 공간 한가운데 방패가 하나 떠 있고, 그 안에 달러 기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레로는 금괴와 자물쇠, 악수하는 손 같은 것들이 회로처럼 이어져 있고요. "투자가 아닌, 부를 지키는 방패"라는 부제를 읽는 순간, 아 이건 돈 버는 법이 아니라 지키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이구나 싶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아 들었을 때 432쪽이라는 두께가 손목에 먼저 전해졌어요. 단숨에 읽을 책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는 책이라는 걸, 무게가 먼저 알려주더라고요.


신종현 저자의 <스테이블코인 : AI 시대의 새로운 화폐>는 제목만 보면 낯선 기술서 같지만, 펼쳐 보면 결국 '돈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책입니다. 저자는 채권 펀드매니저와 증권사 IB를 거친 실무자이고 지금도 대학에서 재무를 가르친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유행어를 파는 대신 화폐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짚어 나갑니다.


책이 던지는 첫 질문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누가 장부를 기록하는가." 얍 섬에서는 마을 공동체가, 메디치 시대에는 은행가가, 1694년 이후로는 중앙은행이 그 권력을 쥐었다고 저자는 정리해요. 그리고 장부를 쥔 자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장부를 고쳐 썼고, 그 비용은 늘 장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넘어갔다고 말하죠. 여기서 세종의 저화가 백성에게 외면받은 일, 흥선대원군의 당백전이 민생을 무너뜨린 일, 1971년 닉슨이 달러와 금의 연결고리를 끊은 장면이 나란히 놓입니다. 먼 나라 이야기 같던 금융사가 우리 역사와 겹쳐지니 갑자기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특히 발걸음이 오래 멈춘 건 3장의 '2026년의 경고'였습니다. 부제가 '이자가 국방비를 집어삼키다'예요. 미국 국가 부채가 38조 달러를 넘었다는 사실보다 무서운 건 그 빚을 유지하는 이자라고 저자는 짚습니다. 2025년 기준 국채 순이자 비용이 약 9,700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고,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이 이제 나라를 지키는 데 쓰는 돈보다 국채 이자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아졌다는 겁니다. 빚을 갚으려고 또 빚을 내는 악순환.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조차 이런 처지라면 평범한 사람의 통장은 대체 어디에 기대야 하나, 책장을 넘기다 문득 답답해졌습니다.


책의 뼈대는 '창과 방패'라는 하나의 비유로 세워져 있어요. 저자는 비트코인을 창이라고 부릅니다. 국가가 장부를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날카로운 무기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 역설이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강력할수록 일상의 화폐에서는 멀어진다는 겁니다. "창은 날카로울수록 다루기 어렵다"는 문장이 그래서 기억에 남아요. 가치가 오르는 자산은 쓰지 않고 쥐고만 있게 되니까요. 실제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 되었고, 저자는 그 빈자리에서 등장한 것이 스테이블코인이라고 설명합니다. 4장 앞머리에 적힌 한 줄이 이 흐름을 잘 요약해 줍니다. "시장은 스스로 닻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닻이 내려진 자리에, 새로운 금융의 항구가 들어섰다."


이 책의 핵심을 응축한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창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방패다." 뒤이어 나오는 한 줄도 좋았어요. "비트코인이 '왜 지금의 시스템은 틀렸는가'를 증명하는 창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답하는 방패다." 세상을 바꾸는 선언보다 매일의 거래와 결제를 조용히 떠받치는 쪽에 시선을 두는 태도. 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공격보다 견고한 방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는데, 저자의 시선이 딱 그 지점에 놓여 있었습니다.


실물 경제로 내려오는 부분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계은행 데이터 기준 2025년 전 세계 평균 송금 수수료가 약 6.49%라고 해요. 해외에 있는 가족에게 200달러를 보내면 13달러 넘게 은행 시스템 속으로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우리의 불편이 곧 그들의 수익 모델이었다"고 담담하게 적어요. 이 한 문장이 낡은 금융 인프라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이 통행료를 사실상 0원에 가깝게 만든다는 대목에서는, 기술이 결국 누군가의 삶에서 새어나가던 돈을 되돌려주는 방향으로도 쓰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한국 독자로서 가장 피부에 닿은 건 원화 이야기였습니다. 저자는 원화가 자칫 갈라파고스처럼 글로벌 장부에서 밀려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개인 차원의 방어법도 구체적으로 제안해요. 이를테면 월급 생활자라면 비상금의 일부를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나눠두는 방식입니다. 원화가 갑자기 약세로 돌아설 때 은행 환전은 영업시간과 한도에 묶이지만 스테이블코인에는 그 제약이 없다는 거죠. 환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출렁이는 사람이라면, 이런 대목이 막연한 불안을 조금은 실질적인 선택지로 바꿔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간 건 책의 끝자락이었어요. 저자는 스테이블코인을 만병통치약처럼 포장하지 않습니다. "방패를 신뢰하려면 그 방패의 약한 부분을 먼저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못 박고, 발행사 리스크, 알고리즘 붕괴(72시간 만에 사라진 테라루나 이야기가 여기 나옵니다), 그리고 2025년 7월 미국에서 지니어스 법안이 확정되며 본격화된 규제 리스크, 개인 키 분실 같은 온체인 리스크까지 하나씩 열어 보입니다. 달러가 녹아내리면 달러에 묶인 스테이블코인도 똑같이 녹아내리는 것 아니냐는 반문을 저자 스스로 던지고 그렇다고 인정하기도 하고요. 자기 논지의 허점을 먼저 드러내는 책은 오히려 더 신뢰가 갑니다.


15장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하는 대목은 채권운용역 출신다운 냉정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위기가 감지되면 자산이 묶이는 시간을 극한으로 줄인다는 현장의 방어 원리를 그대로 개인의 통장에 옮겨 놓아요. 그러면서도 "완벽한 해법은 없다. 합리적인 균형을 설계하는 것이 개인의 몫이다"라고 말합니다. 정답을 안기는 대신 판단의 근거를 건네는 방식이라, 다 읽고 나면 조급함보다 차분함이 남습니다.


읽는 내내 두 얼굴이 떠올랐어요. 암호화폐를 한탕의 도박쯤으로 여겨 아예 등을 돌렸던 사람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이 왜 투기가 아니라 인프라인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납득하게 될 겁니다. 성실히 벌어 성실히 모아왔는데 통장 잔고가 왜 자꾸 가벼워지는지 답답했던 사람이라면, "통장 잔고가 녹아내리는 방식은 언제나 조용하다"는 문장 앞에서 걸음이 멎을 거고요. 마이클 세일러가 법정화폐를 "햇볕 아래 놓인 얼음"이라 불렀다는 대목처럼,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조용히 세금을 내는 일이라는 감각을 이 책은 또렷하게 남겨줍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두께에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챕터마다 문을 여는 짧은 선언들이 다음 장으로 등을 떠밀어 주고, 역사와 비유가 촘촘해서 생각보다 잘 읽혀요. 다만 하루 만에 삼키는 책은 아니니 커피 한 잔 곁에 두고 며칠에 걸쳐 천천히 걸어가시길 권합니다.


여름의 한복판입니다. 매미 소리가 길게 늘어지는 이 계절에 시원한 곳에 자리 잡고 돈의 미래를 조금 앞당겨 들여다보는 시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남들이 무엇을 벌었는지 좇느라 지쳤다면, 잠시 방향을 돌려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지킬지 헤아려 보는 일. 이 책은 그 조용한 전환의 첫걸음이 되어줍니다.


돈을 버는 법이 아니라 지키는 법을, 창이 아니라 방패의 시선으로 설득해내는 보기 드문 금융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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