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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 : AI 시대의 새로운 화폐 - 투자가 아닌 부를 지키는 방패
신종현 지음 / 새로운제안 / 2026년 7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재테크서라고 하면 대개 '얼마를 벌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그런데 이 책은 표지부터 결이 달랐어요. 짙은 남색 우주 공간 한가운데 방패가 하나 떠 있고, 그 안에 달러 기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레로는 금괴와 자물쇠, 악수하는 손 같은 것들이 회로처럼 이어져 있고요. "투자가 아닌, 부를 지키는 방패"라는 부제를 읽는 순간, 아 이건 돈 버는 법이 아니라 지키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이구나 싶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아 들었을 때 432쪽이라는 두께가 손목에 먼저 전해졌어요. 단숨에 읽을 책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는 책이라는 걸, 무게가 먼저 알려주더라고요.

신종현 저자의 <스테이블코인 : AI 시대의 새로운 화폐>는 제목만 보면 낯선 기술서 같지만, 펼쳐 보면 결국 '돈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책입니다. 저자는 채권 펀드매니저와 증권사 IB를 거친 실무자이고 지금도 대학에서 재무를 가르친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유행어를 파는 대신 화폐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짚어 나갑니다.
책이 던지는 첫 질문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누가 장부를 기록하는가." 얍 섬에서는 마을 공동체가, 메디치 시대에는 은행가가, 1694년 이후로는 중앙은행이 그 권력을 쥐었다고 저자는 정리해요. 그리고 장부를 쥔 자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장부를 고쳐 썼고, 그 비용은 늘 장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넘어갔다고 말하죠. 여기서 세종의 저화가 백성에게 외면받은 일, 흥선대원군의 당백전이 민생을 무너뜨린 일, 1971년 닉슨이 달러와 금의 연결고리를 끊은 장면이 나란히 놓입니다. 먼 나라 이야기 같던 금융사가 우리 역사와 겹쳐지니 갑자기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특히 발걸음이 오래 멈춘 건 3장의 '2026년의 경고'였습니다. 부제가 '이자가 국방비를 집어삼키다'예요. 미국 국가 부채가 38조 달러를 넘었다는 사실보다 무서운 건 그 빚을 유지하는 이자라고 저자는 짚습니다. 2025년 기준 국채 순이자 비용이 약 9,700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고,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이 이제 나라를 지키는 데 쓰는 돈보다 국채 이자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아졌다는 겁니다. 빚을 갚으려고 또 빚을 내는 악순환.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조차 이런 처지라면 평범한 사람의 통장은 대체 어디에 기대야 하나, 책장을 넘기다 문득 답답해졌습니다.
책의 뼈대는 '창과 방패'라는 하나의 비유로 세워져 있어요. 저자는 비트코인을 창이라고 부릅니다. 국가가 장부를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날카로운 무기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 역설이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강력할수록 일상의 화폐에서는 멀어진다는 겁니다. "창은 날카로울수록 다루기 어렵다"는 문장이 그래서 기억에 남아요. 가치가 오르는 자산은 쓰지 않고 쥐고만 있게 되니까요. 실제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 되었고, 저자는 그 빈자리에서 등장한 것이 스테이블코인이라고 설명합니다. 4장 앞머리에 적힌 한 줄이 이 흐름을 잘 요약해 줍니다. "시장은 스스로 닻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닻이 내려진 자리에, 새로운 금융의 항구가 들어섰다."

이 책의 핵심을 응축한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창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방패다." 뒤이어 나오는 한 줄도 좋았어요. "비트코인이 '왜 지금의 시스템은 틀렸는가'를 증명하는 창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답하는 방패다." 세상을 바꾸는 선언보다 매일의 거래와 결제를 조용히 떠받치는 쪽에 시선을 두는 태도. 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공격보다 견고한 방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는데, 저자의 시선이 딱 그 지점에 놓여 있었습니다.
실물 경제로 내려오는 부분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계은행 데이터 기준 2025년 전 세계 평균 송금 수수료가 약 6.49%라고 해요. 해외에 있는 가족에게 200달러를 보내면 13달러 넘게 은행 시스템 속으로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우리의 불편이 곧 그들의 수익 모델이었다"고 담담하게 적어요. 이 한 문장이 낡은 금융 인프라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이 통행료를 사실상 0원에 가깝게 만든다는 대목에서는, 기술이 결국 누군가의 삶에서 새어나가던 돈을 되돌려주는 방향으로도 쓰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한국 독자로서 가장 피부에 닿은 건 원화 이야기였습니다. 저자는 원화가 자칫 갈라파고스처럼 글로벌 장부에서 밀려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개인 차원의 방어법도 구체적으로 제안해요. 이를테면 월급 생활자라면 비상금의 일부를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나눠두는 방식입니다. 원화가 갑자기 약세로 돌아설 때 은행 환전은 영업시간과 한도에 묶이지만 스테이블코인에는 그 제약이 없다는 거죠. 환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출렁이는 사람이라면, 이런 대목이 막연한 불안을 조금은 실질적인 선택지로 바꿔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간 건 책의 끝자락이었어요. 저자는 스테이블코인을 만병통치약처럼 포장하지 않습니다. "방패를 신뢰하려면 그 방패의 약한 부분을 먼저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못 박고, 발행사 리스크, 알고리즘 붕괴(72시간 만에 사라진 테라루나 이야기가 여기 나옵니다), 그리고 2025년 7월 미국에서 지니어스 법안이 확정되며 본격화된 규제 리스크, 개인 키 분실 같은 온체인 리스크까지 하나씩 열어 보입니다. 달러가 녹아내리면 달러에 묶인 스테이블코인도 똑같이 녹아내리는 것 아니냐는 반문을 저자 스스로 던지고 그렇다고 인정하기도 하고요. 자기 논지의 허점을 먼저 드러내는 책은 오히려 더 신뢰가 갑니다.

15장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하는 대목은 채권운용역 출신다운 냉정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위기가 감지되면 자산이 묶이는 시간을 극한으로 줄인다는 현장의 방어 원리를 그대로 개인의 통장에 옮겨 놓아요. 그러면서도 "완벽한 해법은 없다. 합리적인 균형을 설계하는 것이 개인의 몫이다"라고 말합니다. 정답을 안기는 대신 판단의 근거를 건네는 방식이라, 다 읽고 나면 조급함보다 차분함이 남습니다.
읽는 내내 두 얼굴이 떠올랐어요. 암호화폐를 한탕의 도박쯤으로 여겨 아예 등을 돌렸던 사람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이 왜 투기가 아니라 인프라인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납득하게 될 겁니다. 성실히 벌어 성실히 모아왔는데 통장 잔고가 왜 자꾸 가벼워지는지 답답했던 사람이라면, "통장 잔고가 녹아내리는 방식은 언제나 조용하다"는 문장 앞에서 걸음이 멎을 거고요. 마이클 세일러가 법정화폐를 "햇볕 아래 놓인 얼음"이라 불렀다는 대목처럼,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조용히 세금을 내는 일이라는 감각을 이 책은 또렷하게 남겨줍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두께에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챕터마다 문을 여는 짧은 선언들이 다음 장으로 등을 떠밀어 주고, 역사와 비유가 촘촘해서 생각보다 잘 읽혀요. 다만 하루 만에 삼키는 책은 아니니 커피 한 잔 곁에 두고 며칠에 걸쳐 천천히 걸어가시길 권합니다.
여름의 한복판입니다. 매미 소리가 길게 늘어지는 이 계절에 시원한 곳에 자리 잡고 돈의 미래를 조금 앞당겨 들여다보는 시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남들이 무엇을 벌었는지 좇느라 지쳤다면, 잠시 방향을 돌려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지킬지 헤아려 보는 일. 이 책은 그 조용한 전환의 첫걸음이 되어줍니다.
돈을 버는 법이 아니라 지키는 법을, 창이 아니라 방패의 시선으로 설득해내는 보기 드문 금융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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