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모든 위대한 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ㅣ 사시사철 1
마하트마 간디 지음 / 사피엔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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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 꽂아도 표가 나지 않는 두께입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판형에 이백 쪽 남짓, 무게로 치면 얇은 노트 한 권 정도예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결국, 모든 위대한 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를 받았습니다. 부피가 작다고 읽는 속도까지 가벼워지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한 꼭지씩 끊어 읽으라고 만들어 놓은 판형에 가까웠습니다.


표지부터 성격이 분명합니다. 흰 종이 질감 위에 안경과 콧수염, 어깨를 감싼 숄의 윤곽선만 선 몇 개로 남겨 두었어요. 눈도 입도 없는데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게 됩니다. 얼굴을 그리지 않은 초상이라니, 인물을 성인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겠다는 편집자의 태도가 여기서 이미 읽힙니다. 실제로 책을 펼치면 간디는 자애로운 성인보다 냉정한 전략가에 가깝게 등장해요.


첫 장의 첫 꼭지가 이 한 권의 문을 여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는 권한과 권위를 갈라 놓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요. 누가 임명해서 생기는 것은 권한이고, 그 권한이 사라져도 남는 것이 권위다. 이 구분 하나로 앞의 네 장이 전부 설명됩니다. 간디가 총리도 장관도 아니었고 국민회의 의장직 한 차례를 빼면 평생 평당원으로 남기를 자처했다는 사실을 들고 온 뒤, 저자는 이렇게 적습니다. "직함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은 많지만, 직함 뒤의 인간 앞에서 마음을 여는 사람은 드물다."


조직에서 이십 년 넘게 버틴 사람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잠깐 멈추게 될 것 같아요. 승진하면 사람들이 말을 들어줄 거라 믿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자리가 높아질수록 진짜 마음은 더 멀어진다는 지적은 야박한데, 야박한 만큼 정확합니다.


네 번째 장의 불복종 이야기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제일 좋았던 건 실이라는 비유였어요. 저자는 간디가 적의 거대함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고, 그 거대함이 매달려 있던 가장 가는 실들을 하나씩 끊었다고 씁니다. 일상이라는 실, 협조라는 실, 습관이라는 실. 너무 가늘어서 적조차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실들이지요. 소금 행진도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 군대를 모으지 않고 바닷가로 걸어가 손으로 소금을 집은 것이 전부였는데, 그 한 줌이 실 하나를 끊었다는 겁니다. 룰은 사용될 때만 살아 있고 아무도 쓰지 않는 룰은 종이에 적힌 잉크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제도라는 것이 생각보다 허약한 물건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됐어요.


그런데 이 장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뒷부분에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모든 협조를 거둘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 다만 부당하다고 느끼는 단 하나만 오늘부터 조용히 거두면 된다는 것. 누군가의 험담에 같이 웃지 않는 일, 부당한 지시에 침묵으로 동의하지 않는 일 정도면 충분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큰 변화를 꿈꾸는 사람은 큰 행동을 준비하느라 평생 준비만 한다는 문장에 이르면, 이 책이 왜 영웅담을 피해 왔는지 알게 됩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톤이 한결 낮아집니다. 세바그람 아슈람에서 중증 한센병을 앓던 산스크리트어 학자를 자기 오두막 곁에 머물게 하고 매일 상처를 닦아 주었다는 일화가 나와요. 저자는 이걸 성자의 온정으로 부르는 해석을 한 번 밀어냅니다. 그러면서 군림하려는 마음을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중력의 문제라고 규정하지요.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가 사람을 끌어당기니, 매일 아침 그 힘을 거슬러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요. 어제의 복무는 어제로 끝났고 오늘은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위로처럼 들렸습니다. 어제 실패했어도 오늘 다시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읽혔거든요.


다만 읽는 내내 조금 갸웃한 대목도 있었어요. 이 책은 군림과 복무를 아주 선명하게 갈라 놓습니다. 방문 앞에 비서를 두느냐 문을 열어두느냐, 권한을 모으느냐 나누느냐 하는 식으로요. 읽는 동안에는 시원한데, 덮고 나면 현실이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문을 닫고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고, 나눌 수 없는 권한도 있으니까요. 새벽 네 시 기상과 정해진 시간의 침묵을 자기지배의 증거로 드는 부분도 그렇습니다. 자기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같은 무게로 적용되기는 어려울 듯해요. 이 경계를 책이 끝까지 다루지 않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문장은 짧은 단정문을 계단처럼 쌓아 올리는 방식입니다. 힘이 있는 대신 읽는 사람을 조금 몰아붙이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이 얇은 판형이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한 꼭지 읽고 덮었다가 며칠 뒤에 다시 펴도 흐름이 끊기지 않으니까요. 철학서보다는 실용서 화법에 가깝다는 점은 미리 알고 들어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간디 사상의 원전을 기대하면 결이 다를 수 있고, 조직 안에서 지친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쪽이라면 잘 맞을 겁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 왔지만, 이렇게 작고 얇은 판형에 이만한 밀도를 담은 경우는 드물었어요.


8월 첫 주, 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저녁 공기에는 미묘하게 다른 결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곧 입추라고 하지요. 계절이 바뀔 때 늘 무언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만, 실은 하루치씩 조용히 옮겨 간 결과일 뿐입니다. 이 책이 말하는 변화도 꼭 그런 모양이었어요. 큰 결심 하나를 준비하느라 애쓰는 대신, 오늘 거둘 수 있는 작은 협조 하나를 찾아보라는 이야기. 그 정도면 지금 계절에 어울리는 조언 같습니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책, 그리고 오늘 하루치의 작은 거절로 답하라고 권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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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컬러링 필사북 어린왕자 - 손을 쓰는 컬러링 필사가 뇌를 깨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서상원 옮김 / starlogo(스타로고)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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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한동안 들여다봤습니다. 아이보리 바탕에 금빛 별이 흩어져 있고, 그 가운데 어린 왕자가 둘 서 있어요. 앞에 선 쪽은 초록 외투와 붉은 안감까지 색이 다 들어갔고, 뒤에 선 쪽은 윤곽선만 남은 채 비어 있습니다. 완성된 그림과 아직 비어 있는 그림을 나란히 세워둔 구성인데, 이 책이 어떤 물건인지 표지 한 장으로 이미 설명하고 있더군요. 절반은 만들어져 있고, 나머지 절반은 읽는 사람이 채워야 합니다.


<시니어 컬러링 필사북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의 원작을 스물일곱 개 장면으로 추려 담았습니다. 각 장면은 채색이 끝난 삽화 한 점과 짧게 줄인 본문, 그 아래 대여섯 줄의 빈 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뒷면에는 같은 그림이 선화로 놓입니다. 읽고, 옮겨 적고, 칠하는 순서로 흘러가는 구조예요.


첫 장이 보아뱀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여섯 살 아이가 색연필을 들어 생애 첫 그림을 그리고, 어른들에게 무섭지 않으냐고 묻고, 모자가 뭐가 무섭냐는 대답을 듣는 장면이죠. 그리고 이런 조언이 따라붙습니다. "그런 그림은 그만두고 지리, 역사, 산수, 문법 공부나 해라." 화가의 꿈을 접었다는 문장으로 첫 장이 닫혀요. 색연필을 다시 쥐라고 만든 책이 색연필을 내려놓은 사연부터 꺼내는 배치가 재미있습니다.


이어지는 면에서 조종사가 된 그는 현명해 보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1호 그림을 내밀어 봅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모자였고요. 그럴 때면 보아뱀도 원시림도 접어두고 브리지게임과 골프와 정치와 넥타이를 이야기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속마음을 터놓을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살아왔다는 문장이 그 뒤에 옵니다. 어른의 대화 목록이 그대로 외로움의 목록이 되는 셈이죠.


책의 앞머리에는 컬러링 필사가 뇌 활성화와 기억력에 좋은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 안내가 실려 있습니다. 측두엽과 전두엽과 후두엽이 함께 작동한다는 설명, 손으로 쓸 때 해마가 강하게 자극된다는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대학교 연구, 알파파와 코르티솔 이야기까지 꼼꼼합니다. 다만 근거를 대는 방식에 편차가 있어요. 이름이 분명한 연구가 있는가 하면, 미국의 어느 저널이나 미국의 미술 치료 전문가들처럼 출처가 흐릿하게 처리된 대목도 섞여 있습니다. 밀도를 고르게 맞췄다면 설득력이 더 붙었을 것 같아요. 사실 손을 쓰는 동안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뇌 부위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은 이미 아는 감각이기도 하고요.


뒷부분으로 갈수록 문장이 조용해집니다. 사막에서 우물을 찾은 장면에서 도르래가 삐걱거리자 어린 왕자가 말해요. "우리가 이 우물을 깨우니까 우물이 노래를 부르잖아……" 별빛 아래를 걸어와 도르래 소리를 들으며 팔의 힘으로 길어 올린 물이었다고, 양식 이외의 어떤 다른 의미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오래 일해온 사람에게는 이 대목이 조금 다르게 읽힐 겁니다. 애써서 얻은 것에만 붙는 맛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지구에 닿은 어린 왕자가 사막이 쓸쓸하다고 하자 뱀이 답하는 말도 오래 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역시 외로워." 사막에 홀로 핀 꽃은 사람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바람에 실려 다닌다고 일러주고요. 뿌리 없음이라는 표현이 지금 우리 사는 모양과 겹쳐 보였습니다. 몇 년 단위로 사는 곳을 옮기고, 일자리를 따라 도시를 바꾸고, 은퇴 무렵에는 다시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고민하는 흐름이 낯설지 않으니까요.



마지막 장에는 그림이 없습니다. 글만 놓여 있어요. 별들이 5억 개의 방울과 같다는 문장이 나오고, 양이 꽃을 먹었을지 모른다는 걱정과 유리 덮개를 씌웠을 거라는 위안이 번갈아 이어지다가, 독자에게 청을 남기며 끝납니다. 언젠가 아프리카 사막을 지나게 되면 서두르지 말고 그 별 아래에서 잠시 기다려보라고, 금발의 아이가 웃으며 다가오면 친절을 베풀어달라고, 그리고 그 아이가 돌아왔다고 편지를 보내달라고요. 빈 줄이 계속 따라붙는 책이어서인지, 그 마지막 부탁이 답장을 기다리는 편지처럼 읽혔습니다.


부모님께 드릴 무언가를 고르고 있다면 후보로 올려둘 만합니다. 은퇴 이후나 자녀가 독립한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을 안내 글이 꽤 정확하게 짚고 있어서, 그 시기를 지나는 분들에게는 특히 맞을 듯해요. 시니어라는 단어가 아직 남의 옷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원작을 다시 읽는 기분으로 펼치면 그럭저럭 어울립니다. 색을 잘 칠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우를 초록으로 칠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책이니까요.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읽어오는 동안, 읽고 덮으면 끝나는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손을 움직이게 만드는 쪽은 드물었고요. 그런 점에서 이 한 권은 서가에 꽂히기보다 책상 위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8월로 넘어왔습니다. 한낮에는 바깥 일을 줄이고 실내에 머무르게 되는 철이죠. 색연필 몇 자루와 볼펜 하나면 시작되는 책이라, 에어컨 바람 아래 길게 늘어지는 여름 오후와 잘 맞습니다. 별이 잘 보이는 계절이기도 하고요.


원작의 문장을 손으로 옮기고 빈 그림을 채우는 동안, 어른의 언어에 밀려났던 감각이 조용히 돌아오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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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생각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 - 최고의 질문으로 결과를 바꾸는 문제해결의 기술
변창우 지음 / 세이코리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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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큼직한 쉼표였습니다. 위쪽은 흰 바탕에 짙은 청회색 글자가 화면을 꽉 채우고, 아래로 내려오면 바탕색이 따뜻한 베이지로 바뀝니다. 차가운 색과 사람 손때 묻은 색이 위아래로 나뉜 그 경계에 쉼표가 하나 찍혀 있어요. <AI 시대, 생각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라는 제목에서 그 부호가 단순한 문법 기호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달려가는 쪽을 잠깐 붙잡아 세우는 표시 같았거든요.


무게도 제법 나가고 두께도 있습니다. 처음 펼쳤을 때 며칠에 나눠 천천히 봐야겠다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판단이 책의 주장과 얼추 맞아떨어졌더군요.


1부 초반에는 신입사원 한 명이 등장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느 대학 출신에, 무슨 주제를 물어도 막힘없이 답을 내놓고, 주 7일 24시간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요. 보고서를 다시 써 오라 해도 금방 고쳐 오고 엑셀과 코딩도 능숙합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내보니 이상한 구석이 보이기 시작해요. 묻지 않으면 먼저 말하는 법이 없고, 없는 얘기를 그럴싸하게 지어내고, 결과물은 무난하지만 자기 관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체는 짐작하시는 대로 생성형 AI입니다. 능청스러운 설정이라 웃으며 읽었는데, 저자가 붙인 결론은 담백합니다. 아직 독립적으로 일을 맡기기엔 적합하지 않지만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부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는 것. 월 20달러 남짓이면 되는 비서라는 계산까지 함께요.


이어서 BCG와 미국 교수들이 경영 컨설턴트를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가 소개됩니다. AI를 쓴 쪽이 12.2퍼센트 더 많은 일을 25.1퍼센트 더 빠르게 처리했고 결과물의 질도 40퍼센트 이상 좋았다는 수치.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연구의 다른 면이 바로 뒤에 붙습니다. 데이터와 인터뷰를 세밀하게 통합해야 풀리는 문제에서는 AI를 쓰지 않은 그룹이 84퍼센트 정답을 맞혔고, 쓴 그룹은 오답이 더 많았다는 것. 결과를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사람이 상당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이 구성에서는 잠깐 갸웃했습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은퇴하기 전까지 AI가 자리를 빼앗는 일은 없다는 쪽에 한 표를 걸겠다고 해놓고, 곧바로 방심의 대가를 보여주는 연구를 붙여둡니다. 안심시키는 말과 경계하라는 말이 한 호흡 안에 나란히 놓여 있어서 어느 쪽에 무게를 실어야 할지 헷갈리는 자리가 있어요. 다만 읽어나가다 보면 그 배치가 의도였겠다 싶어집니다. 저자가 겨냥하는 대상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능숙하게 부리는 옆자리 동료의 성과니까요.


2부로 넘어가기 전, 2장에 실린 회의실 장면은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월요일 아침 여덟 시 반, 꼭대기 층 회의실에서 해외영업 활성화 전략을 놓고 임원 회의가 열립니다. 삼십 분짜리 발표가 끝나자 CEO의 첫마디가 뭐 새로운 거는 별로 없구먼, 이었어요. CFO는 숫자를 들어 예산과 인력 감축을 꺼내고, 해외영업 임원은 초기 투자가 필요하니 시기상조라고 맞서고, CMO는 온라인 채널과 브랜딩 투자를 말합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틀리지 않은 말을 하는데 대화는 도무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그 건으로 상의해봤느냐는 CEO의 물음에 돌아온 답은 "아직…, 요청이 오지 않아서…"였고, 몇 마디 뒤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얘기부터 먼저 하네."


장면 끝에 붙은 손그림 한 장이 오래 눈에 남습니다. CEO 말풍선에는 '맞는 질문 제일 많이 하실 분'이라 적혀 있고, 맨 아래 김 대리는 '좀 갑갑합니다' 한마디를 달고 있어요. 저자는 마지막에 김 대리가 임원들을 제치고 상황을 정리해내는 장면을 통쾌하게 그려놓고도, 현실에서 대리가 그렇게 나섰다간 뒷감당이 안 된다고 곧바로 인정합니다. 그 솔직함 덕분에 이 안내서를 좀 더 믿고 읽게 됐습니다.


책의 뼈대는 HIPS 프로세스입니다. 인간지능 문제해결이라는 뜻이고, 핵심 질문을 던져 문제를 구조화하는 1단계, 분석적 접근과 창의적 접근을 병행하는 2단계, 핵심 과제를 개발하고 실행하는 3단계로 이어집니다. 로직트리와 고객여정지도, 디자인 씽킹, 프로토타입처럼 현장에서 쓰이는 도구들이 차례로 나오는데, 실무서로 읽으면 이쪽이 본론일 겁니다. 다만 제 눈길이 오래 머문 자리는 조금 달랐어요.


2단계 후반에 '고뇌 구간'이라는 이름이 붙은 꼭지가 있습니다. 아이디어는 다 꺼내놨는데 답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저자는 당황하지 말라고 하면서, 문제해결 과정이 애초에 선형적이지 않다고 짚습니다. 하다가 막히면 되돌아가 반복해야 하고, 확산에서 수렴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구간이 있다는 것.


여기서 짧은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사과를 가득 실은 농부가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서둘러 가다 노인을 만나 장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묻습니다. 노인의 대답이 이랬어요. "천천히 가면 30분이고 지금처럼 가면 온종일도 걸릴 거요." 무슨 소리인가 싶던 농부는 노인이 길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짐칸에 실어주는 모습을 보고 뜻을 알아차립니다.


일터에서 흘리고 다닌 사과가 몇 개나 될지 세어보게 만드는 대목이었습니다. 급하니까 예전 하던 방식대로 결정하고, 불편하니까 어긋난 의견은 덮고 넘어가고, 그렇게 아낀 시간은 나중에 몇 배로 청구되곤 하지요. 저자는 불편함과 무력함 때문에 선택을 서두르면 과거의 익숙한 솔루션을 고르게 되고 그것이 지금에 적합한 답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적어두었습니다. 고뇌 구간을 지나는 요령 중에는 휴식과 숙려 기간도 들어 있어요. 우리의 두뇌는 근육과 같아서 무리한 후에는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면서, 쉬는 사이 뜻밖의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한다고요. 괄호 안에 붙은 한마디가 이 책의 온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고뇌 구간이 아니라 환희 구간이 된다.


1부에 나오는 π자형 인재라는 개념도 적어두고 싶습니다. 자기 전문 분야 하나에 다른 영역의 이해를 더해 서로 다른 지식을 연결해내는 사람을 가리켜요. 정형화된 문제는 AI가 더 잘 풀겠지만 여러 분야가 뒤엉킨 현실의 문제에는 여전히 사람의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래 붙들어온 사람에게는 이 부분이 조용한 응원처럼 읽힐 것 같습니다. 쌓아온 경력이 두 번째 기둥을 만날 때 비로소 값이 매겨진다는 이야기니까요.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의 개인적인 취향이 드러나는데, 핵심 과제를 고르는 단계를 설명하다 말고 역사 이야기로 빠지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역사 덕후라 밝히면서 런던의 커피하우스, 파리의 카페, 독일 바우하우스를 나란히 놓아요. 뉴턴과 핼리가 돌고래를 해부하며 놀던 자리에서 주식 거래소와 보험사가 태어났고, 파리의 카페에서는 헤밍웨이와 사르트르가 하루를 통째로 죽쳤습니다. 사르트르는 카페 드 플로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이상해 보이지만, 카페 드 플로르는 우리에게 집과 같은 곳입니다." 세 장소의 공통점을 저자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격 없이 수다를 떨었다는 데서 찾습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는지 살펴본 뒤 각자 만들어보자고 권합니다. 온라인 독서토론 모임도 좋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충분하다고요. 어딘가에 나만의 커피하우스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문장으로 이 꼭지를 닫습니다. 한국에는 아직 그런 공간이 없다고 단정한 부분에는 살짝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도서관과 크고 작은 독서모임, 이런저런 살롱 형태의 자리는 이미 여기저기 생겨나는 중이고, 다만 서로 다른 배경이 한자리에 섞이는 일이 드물 뿐이라는 쪽이 실감에 가깝습니다.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았습니다. 같은 한 권을 놓고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감상을 남기는 풍경이 저자가 말한 커피하우스와 크게 멀지 않겠더군요. 서평을 쓰는 일도 결국 남의 생각에 제 생각을 부딪혀보는 절차에 가깝고요.


이 안내서의 무게중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해결 절차에 놓여 있습니다. AI는 그 과정을 거드는 도구로 등장할 뿐이에요. 부록에 생성형 AI로 HIPS를 돌리는 프롬프트 설계 가이드가 실려 있어서 당장 써먹고 싶은 분이라면 그쪽부터 펴봐도 되지만, 앞을 건너뛰면 손에 도구만 남을 것 같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께 특히 할 말이 많은 책이고, 자기 일하는 방식을 한 번 점검해보려는 사람에게도 쓸모가 있습니다. 2024년에 나온 <인공지능 시대, 무기가 되는 생각법>의 개정판이라는 점도 적어둡니다. 초판이 HIPS라는 틀을 세웠다면 이번 판은 그 틀을 생성형 AI 위에서 굴려보는 예문을 더한 셈이에요.


저자가 던지는 맞는 질문은 하나로 정리됩니다. AI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제 우리가 뭘 하면 되지?"라는 물음이요. 그 뒤에 인용된 미래학자 로이 아마라의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술의 영향을 단기적으로는 과대평가하고 장기적으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8월 첫 주, 낮이고 밤이고 더위가 물러가지 않는 계절입니다. 이런 시기에는 진도가 더뎌도 조바심이 덜 나서, 두께 있는 한 권을 붙들기에 오히려 나쁘지 않겠다 싶어요. 서둘러 넘긴 페이지는 어차피 다시 돌아와 읽게 되니까요. 천천히 가면 30분이라던 노인의 말을 이 여름 내내 떠올릴 것 같습니다.


AI를 어떻게 쓸지 배우기 전에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부터 정하게 만드는, 사람을 위한 문제해결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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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도 자도 피곤한 당신을 위한 수면 처방 - 오늘 밤부터 달라지는 잠의 과학
이준용 지음 / 미래의창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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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위쪽은 거의 비워 두고 붓으로 눌러쓴 듯한 제목만 크게 얹었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푸른빛과 연둣빛이 안개처럼 번지고 그 위에 달이 초승에서 조금씩 차오르는 모양으로 작게 늘어서 있어요. 밤을 검게 칠하지 않고 새벽 직전의 옅은 빛으로 그렸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잠을 다루는 책이면서 겁을 주지 않겠다는 태도가 표지에서 먼저 읽혔거든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자도 자도 피곤한 당신을 위한 수면 처방>은 손에 쥐어보면 제법 묵직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준용 원장이 쓴 안내서인데, 페이지 수도 그렇지만 다루는 범위가 넓어서 하룻밤에 훑을 책은 아니더군요. 며칠에 걸쳐 나눠 읽었습니다.


가장 먼저 붙들린 곳은 야근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었어요. 밤 열한 시에 집에 들어와 씻고 바로 누웠는데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든다는 사람의 하소연으로 장이 열립니다. 저자는 여기에 자동차 비유를 붙입니다. 동네 마트에 다녀온 차는 시동을 끄면 엔진이 금방 식지만, 고속도로를 한참 달린 차는 시동을 꺼도 한동안 열이 남는다는 것이죠. 하루 종일 에너지를 쏟은 몸도 마찬가지여서 코르티솔 수치와 교감신경이 여전히 켜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못 박아요. "야근 후 귀가해서 2~3시간 동안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우리 몸의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벨기에 연구팀 실험도 곁들여지는데, 세 시간만 재워 극심한 졸음 상태로 만든 사람들을 카메라 앞에 세웠더니 잠드는 데 평소보다 사 분이 더 걸렸다고 합니다. 피로가 한계까지 쌓여도 각성이 내려가지 않으면 잠은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설명이 반가웠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잠들지 못한 밤을 자기 관리의 실패로 셈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꽤 깊게 배어 있어서요. 저자는 그 셈법 자체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올빼미를 다룬 장에서는 그 제안이 더 선명해집니다. 야근할 때 집중이 가장 잘 되고 학창 시절 일교시는 늘 비몽사몽이었던 삼십 대 직장인이 미라클 모닝을 시작했다가 무너지는 과정이 나오는데, 일어나는 시각만 당겨졌을 뿐 잠드는 시각은 그대로여서 수면 시간이 네다섯 시간으로 줄었다고 해요. 결국 무기력을 안고 진료실 문을 열고는 자기가 의지가 약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대답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이건 게으르거나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에요. 그저 몸의 생체시계가 조금 늦게 맞춰져 있을 뿐입니다."


이어지는 근거들이 흥미롭습니다. 크로노타입은 키나 몸무게처럼 타고나는 다양성이고, 탄자니아 하드자족 연구에서 부족 구성원 전체가 동시에 잠든 시간은 하룻밤에 평균 십팔 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저마다 잠드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에 별도의 당번 없이도 자연스럽게 불침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새벽형 인간을 성실함의 척도로 삼아온 우리 사회의 잣대가 여기서 한 번 흔들립니다. 저자 본인도 전형적인 올빼미형이라 국가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새벽 다섯 시에 잠들어 낮 열두 시에 일어났다고 고백하는데, 그때는 사회의 시간표와 부딪힐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다는 단서를 정직하게 붙여둡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갸웃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해법으로 유연근무제와 재택근무를 최선으로 꼽고, 오전에는 간단한 업무를 두고 집중력이 살아나는 오후로 중요한 일을 옮기라고 권하거든요. 원리는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회의 시각과 업무 순서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면 거리가 꽤 멀게 느껴졌어요. 아침 햇빛을 십 분에서 삼십 분 쬐라는 조언 역시 출근 동선이 지하로 이어지는 사람에게는 만만치 않고요. 저자가 타고난 올빼미의 경우 생체시계를 앞당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미리 인정해둔 만큼, 원인을 알게 되는 것과 상황이 달라지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빈칸이 남습니다. 그 빈칸을 메우는 건 결국 개인이 아니라 근무 제도 쪽 몫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중반, 수면무호흡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목소리의 결이 바뀝니다. 앞장들이 자책을 덜어주는 쪽이었다면 여기서는 병원에 가보라고 등을 미는 쪽에 가까워요. 주말에 열 시간씩 자고도 온몸이 무겁다는 사십 대 회사원의 사례가 나오는데, 수면 부족도 우울증도 불안도 아니라는 것이 하나씩 지워진 끝에 검사를 받고 진짜 원인을 찾습니다. 스노클링 비유가 오래 남았습니다. 대롱 끝이 물 밖에 있을 때는 숨을 쉴 수 있지만 아래쪽 물고기를 보려고 잠수하면 대롱이 잠겨 결국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는 것. 깊은 잠에 들수록 근육의 힘이 빠져 기도가 막히니, 열 시간을 통째로 자도 뇌가 실제로 회복한 시간은 거의 없는 셈이라고 합니다. 잠드는 것 자체는 누구보다 빠르기 때문에 본인은 문제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설명까지 읽고 나면, 코골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온 중년의 밤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참고 버티지 말라는 당부가 이 장의 마지막 문단에 놓여 있는데, 위로만 건네고 끝냈다면 이 책은 훨씬 가벼웠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에 이르러 표지의 문구가 착지합니다. 우산 없이 길을 걷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로 장이 열려요.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그냥 맞으며 걸어간다는 것이죠.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건 편안히 누워 몸을 쉬게 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침대에서 일곱 시간을 누워 있고도 다음 날 더 지치는 이유를 공회전에 빗대는데, 앞에서 나온 엔진이 여기서 다시 돌아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연료만 태우는 상태라는 것이죠.


책 끝자락의 비수면 깊은 휴식 가이드는 실제로 따라 해볼 만합니다. 불을 끄고 누워 사 초 들이쉬고 육 초 내쉬는 호흡을 몇 차례 반복한 뒤, 왼발부터 시작해 오른발과 배와 등, 어깨와 팔을 거쳐 얼굴까지 주의를 옮겨가며 힘을 빼는 십 분짜리 실습이에요. 신경과학자 앤드루 휴버먼이 대중화한 원리에 저자의 임상 경험을 더해 구성했다고 밝혀두었고요. 마지막 순서가 얼굴이라는 점이 오래 남았습니다. 미간이 풀리고 다물려 있던 턱이 느슨해지면서 하루 동안 지어왔던 표정이 서서히 풀린다고 적혀 있는데, 표정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리게 되더군요.


물론 여기에도 작은 의문은 남습니다. 잠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가 결국은 잠을 부르기 위한 우회로인 이상, 며칠 해보고도 못 자면 이 실습마저 성과로 재게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다만 저자는 그 어긋남을 먼저 인정하고 플랜 B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기댈 방법이 하나뿐일 때 상황이 더 막막해진다는 설명은 수긍이 갔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읽어왔지만 이렇게 밑줄이 자주 그어지는 실용서는 드물었습니다. 밤마다 알람을 앞당겨보려 애쓰다 실패한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올빼미 장에서 오래 머무를 테고, 오래 자는데도 아침이 무거운 분에게는 뒤쪽의 자가진단 문항이 병원 문턱을 낮춰줄 겁니다. 잠에 큰 문제가 없더라도 사춘기 자녀의 늦잠을 게으름으로 읽어온 어른들이 읽어두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한여름 밤이 이 책을 읽기에 유난히 알맞은 시기였습니다. 열대야가 이어지는 요즘은 누구나 한 번쯤 잠을 설치니까요. 창을 열어두고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뒤척이는 밤에, 오늘도 못 잤다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대신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려보시면 좋겠습니다. "잠이 와도 좋고,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저 눕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의지의 실패로 셈해온 사람에게, 몸의 언어로 다시 설명해주는 다정하고 단단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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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만줘요
이소베 지음, 백종민 그림 / 송송책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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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여름 한가운데에 제법 두꺼운 책 한 권이 도착했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살아만줘요>는 손에 들자마자 무게가 먼저 느껴지는 책이었어요. 표지에는 짧은 머리의 아이가 강가 난간에 기대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늘은 노을빛으로 부드럽고, 뒤로는 도시의 건물들이 나지막하게 이어져요. 아프게 그리려 애쓰지 않은 그림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그 절제가 책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이소베 작가가 자신의 십 대 시절을 '반디'라는 인물로 옮긴 자전 만화입니다. 그림은 정동장애를 오래 다뤄온 백종민 작가가 맡았고, 20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다양성만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송송책방에서 나왔어요. 만화니까 금방 읽히겠거니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한 챕터씩 끊어 읽게 되더군요. 종이는 빨리 넘어가는데 마음이 따라붙는 속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어린 반디가 살던 집에서 출발합니다. 신앙을 두고 부모가 부딪히고, 말싸움은 곧 몸싸움으로 번져요. 아이는 그 장면을 정면으로 목격하기보다 문 뒤에서 소리로 먼저 겪습니다. 그리고 맨발로 현관에 서 있는 엄마 곁으로 다가가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나이의 아이가 위로하는 쪽에 서 있는 구도인데, 이 장면이 책 전체의 출발점이자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질문의 씨앗이 됩니다.


오빠에 관한 장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오래 시달리다 자퇴한 오빠는 집 안에서 동생에게 화를 옮겨요. 작가는 이 대목을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라는 전언의 형식으로 씁니다. 직접 본 일이 아니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오빠를 멀리 두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혔어요. 욕설이나 폭력의 세부를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샴푸가 눈에 들어가 따가워도 씻어내지 못했다."라는 한 줄이, 무서움을 설명하는 대신 몸이 멈춰버린 상태를 그대로 적어 놓아서 오래 남았습니다.


더 무거운 것은 그 뒤의 침묵입니다. 일곱 살 무렵의 일이 밝혀졌을 때 엄마가 던진 짧은 물음 하나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동시에 드러나요. 검은 화면 위에 눈이 가려진 얼굴 넷이 놓인 컷은 그 집이 무엇을 택했는지 말없이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이 시기 내내 화면 바깥에 있어요. 반디의 표현대로 항상 방관자였습니다.


책의 중간은 애정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표지와 소개 글에 실린 문장은 이렇습니다. "엄마의 불안정함과 아빠의 무관심 속에서 나는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했다." 밴드 무대에서 만난 사람이 반디에게는 오래 유일한 빛이었고, 무대 위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언젠가 빛나고 싶다고 마음먹습니다. 짝사랑이 어긋나는 자리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태어나는 흐름이 인상적이었어요. 회복의 동기가 병원에서 오지 않고 공연장에서 온다는 점도요.


병동 이야기는 담담해서 더 잘 읽힙니다. 병실까지 가려면 문을 세 개 지나야 하고 그중 하나는 벨을 눌러야 열립니다. 소지품은 하나하나 확인받고, 안전을 위한 장치들은 동시에 사생활을 지워요. 그 안에서 열두 살 아이가 수줍게 초코파이를 건네는 장면이 나오는데, 반디가 병동에서 처음으로 웃습니다. 위로가 어디서 오는지에 관해 이 책은 계속 같은 답을 내놓는 것 같아요. 커다란 말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 도착합니다. 반대로 교회 선생님이 꺼낸 고난과 회복의 이야기 앞에서 반디의 말풍선은 점만 찍힌 채 비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건넨 말이 미끄러지는 순간을 이렇게 정직하게 그린 만화는 흔치 않습니다.


가운데쯤에서 반디가 소리치는 대사가 있습니다. "나 이제 18살이야! 그만 좀 해! 나도 살고 싶어!" 곧이어 이런 문장이 이어져요. 열여덟은 미성년자인데 자기는 늘 어른이 되어야 했다는 것. 어른 노릇을 떠맡아온 아이가 처음으로 아이의 자리를 요구하는 장면이라, 제목이 여기서 한 번 크게 울립니다.


결말은 화해가 아니라 분리로 향합니다. 반디를 집에서 꺼내준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이모였고, 이사 후의 서술은 소박합니다. 오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치약과 수건을 함께 쓰지 않아도 되는 생활. 안전이라는 말이 이렇게 생활적인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됐어요. 아버지는 떨어져 살게 된 뒤에야 전화와 문자로 자주 연락해옵니다. 그에 대한 반디의 대답이 이 책에서 제일 어른스러운 문장이었습니다. "아빠는 아빠의 인생을 사는 거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앞으로 나는 자주 넘어질 것이고, 또 많이 울겠지만, 또 그만큼 잘 웃고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어서 자신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묻고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약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어른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적어요. 마흔을 훌쩍 넘긴 제가 이 대목에서 멈칫했습니다. 열여덟이 내놓은 결론이 나이와 상관없이 맞는 말이어서요.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어렸던 나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고 씁니다. 그 뒤에 놓인 문장이 제목의 정체를 밝혀주는데, 그건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만 이 책의 부탁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읽고 나면 분명해집니다. 맨 뒷장에는 연필을 쥔 손과 함께 손글씨 한 줄이 남아 있어요. 겁에 질려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는 말이었습니다.


읽기 전에 알아두시면 좋을 점 하나. 초반부의 가정 폭력 묘사와 중반의 자해 관련 서술이 꽤 직접적입니다. 지금 마음이 많이 지쳐 있다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나눠 읽으시길 권해요. 혹시 책의 내용이 본인의 일처럼 겹쳐 힘들어진다면 혼자 견디지 마시고 가까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셨으면 합니다.


8월의 낮은 여전히 뜨겁고 저녁은 조금 길어졌습니다.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책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표지 속 노을과 강물이 이상하게 지금과 잘 맞았어요.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어른 노릇을 떠맡았던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살아만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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