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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만줘요
이소베 지음, 백종민 그림 / 송송책방 / 2024년 12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여름 한가운데에 제법 두꺼운 책 한 권이 도착했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살아만줘요>는 손에 들자마자 무게가 먼저 느껴지는 책이었어요. 표지에는 짧은 머리의 아이가 강가 난간에 기대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늘은 노을빛으로 부드럽고, 뒤로는 도시의 건물들이 나지막하게 이어져요. 아프게 그리려 애쓰지 않은 그림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그 절제가 책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이소베 작가가 자신의 십 대 시절을 '반디'라는 인물로 옮긴 자전 만화입니다. 그림은 정동장애를 오래 다뤄온 백종민 작가가 맡았고, 20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다양성만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송송책방에서 나왔어요. 만화니까 금방 읽히겠거니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한 챕터씩 끊어 읽게 되더군요. 종이는 빨리 넘어가는데 마음이 따라붙는 속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어린 반디가 살던 집에서 출발합니다. 신앙을 두고 부모가 부딪히고, 말싸움은 곧 몸싸움으로 번져요. 아이는 그 장면을 정면으로 목격하기보다 문 뒤에서 소리로 먼저 겪습니다. 그리고 맨발로 현관에 서 있는 엄마 곁으로 다가가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나이의 아이가 위로하는 쪽에 서 있는 구도인데, 이 장면이 책 전체의 출발점이자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질문의 씨앗이 됩니다.

오빠에 관한 장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오래 시달리다 자퇴한 오빠는 집 안에서 동생에게 화를 옮겨요. 작가는 이 대목을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라는 전언의 형식으로 씁니다. 직접 본 일이 아니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오빠를 멀리 두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혔어요. 욕설이나 폭력의 세부를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샴푸가 눈에 들어가 따가워도 씻어내지 못했다."라는 한 줄이, 무서움을 설명하는 대신 몸이 멈춰버린 상태를 그대로 적어 놓아서 오래 남았습니다.
더 무거운 것은 그 뒤의 침묵입니다. 일곱 살 무렵의 일이 밝혀졌을 때 엄마가 던진 짧은 물음 하나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동시에 드러나요. 검은 화면 위에 눈이 가려진 얼굴 넷이 놓인 컷은 그 집이 무엇을 택했는지 말없이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이 시기 내내 화면 바깥에 있어요. 반디의 표현대로 항상 방관자였습니다.
책의 중간은 애정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표지와 소개 글에 실린 문장은 이렇습니다. "엄마의 불안정함과 아빠의 무관심 속에서 나는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했다." 밴드 무대에서 만난 사람이 반디에게는 오래 유일한 빛이었고, 무대 위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언젠가 빛나고 싶다고 마음먹습니다. 짝사랑이 어긋나는 자리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태어나는 흐름이 인상적이었어요. 회복의 동기가 병원에서 오지 않고 공연장에서 온다는 점도요.
병동 이야기는 담담해서 더 잘 읽힙니다. 병실까지 가려면 문을 세 개 지나야 하고 그중 하나는 벨을 눌러야 열립니다. 소지품은 하나하나 확인받고, 안전을 위한 장치들은 동시에 사생활을 지워요. 그 안에서 열두 살 아이가 수줍게 초코파이를 건네는 장면이 나오는데, 반디가 병동에서 처음으로 웃습니다. 위로가 어디서 오는지에 관해 이 책은 계속 같은 답을 내놓는 것 같아요. 커다란 말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 도착합니다. 반대로 교회 선생님이 꺼낸 고난과 회복의 이야기 앞에서 반디의 말풍선은 점만 찍힌 채 비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건넨 말이 미끄러지는 순간을 이렇게 정직하게 그린 만화는 흔치 않습니다.

가운데쯤에서 반디가 소리치는 대사가 있습니다. "나 이제 18살이야! 그만 좀 해! 나도 살고 싶어!" 곧이어 이런 문장이 이어져요. 열여덟은 미성년자인데 자기는 늘 어른이 되어야 했다는 것. 어른 노릇을 떠맡아온 아이가 처음으로 아이의 자리를 요구하는 장면이라, 제목이 여기서 한 번 크게 울립니다.
결말은 화해가 아니라 분리로 향합니다. 반디를 집에서 꺼내준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이모였고, 이사 후의 서술은 소박합니다. 오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치약과 수건을 함께 쓰지 않아도 되는 생활. 안전이라는 말이 이렇게 생활적인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됐어요. 아버지는 떨어져 살게 된 뒤에야 전화와 문자로 자주 연락해옵니다. 그에 대한 반디의 대답이 이 책에서 제일 어른스러운 문장이었습니다. "아빠는 아빠의 인생을 사는 거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앞으로 나는 자주 넘어질 것이고, 또 많이 울겠지만, 또 그만큼 잘 웃고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어서 자신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묻고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약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어른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적어요. 마흔을 훌쩍 넘긴 제가 이 대목에서 멈칫했습니다. 열여덟이 내놓은 결론이 나이와 상관없이 맞는 말이어서요.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어렸던 나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고 씁니다. 그 뒤에 놓인 문장이 제목의 정체를 밝혀주는데, 그건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만 이 책의 부탁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읽고 나면 분명해집니다. 맨 뒷장에는 연필을 쥔 손과 함께 손글씨 한 줄이 남아 있어요. 겁에 질려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는 말이었습니다.

읽기 전에 알아두시면 좋을 점 하나. 초반부의 가정 폭력 묘사와 중반의 자해 관련 서술이 꽤 직접적입니다. 지금 마음이 많이 지쳐 있다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나눠 읽으시길 권해요. 혹시 책의 내용이 본인의 일처럼 겹쳐 힘들어진다면 혼자 견디지 마시고 가까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셨으면 합니다.
8월의 낮은 여전히 뜨겁고 저녁은 조금 길어졌습니다.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책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표지 속 노을과 강물이 이상하게 지금과 잘 맞았어요.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어른 노릇을 떠맡았던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살아만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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