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질문법 - AI시대, 조직의 성과를 이끄는 최고의 리더십 전략 ㅣ 리더 시리즈
에드거 샤인.피터 샤인 지음, 노승영 옮김 / 심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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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짙은 남색 바탕 위로 동심원이 번지고, 그 한가운데 은빛 글자로 HUMBLE이 얹혀 있습니다. 위쪽 카피는 AI 시대의 리더십 전략을 말하는데 표지가 내는 소리는 오히려 낮은 편이에요. 물결이 퍼져 나가는 자리에 겸손이라는 단어를 놓아둔 배치가, 책을 덮고 나서 보니 꽤 정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리더의 질문법>은 조직심리학자 에드거 샤인이 세운 '겸손한 질문'이라는 개념을 다시 손본 개정판이에요. 저자가 2023년 세상을 떠난 뒤, 아들이자 조직문화 컨설턴트인 피터 샤인이 AI 도입과 원격 근무라는 달라진 조건에 맞춰 마무리했습니다. 판형도 두께도 부담이 없어서 며칠에 나눠 천천히 읽기 좋았습니다.


첫 장에서 저자가 겨누는 것은 단언입니다. 무턱대고 말하는 순간 상대를 낮추는 격이 되어 관계의 균형이 깨진다고 하면서, 그래서 단언은 요청받았을 때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정리해요. 저는 이 대목에서 회의실 풍경이 겹쳐 보였습니다. 특히 청하지 않은 충고에 담긴 세 가지 오만을 번호까지 붙여 열거하는 부분이 그랬어요. 상대보다 많이 안다는 생각, 자기가 아는 게 옳다는 생각, 상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 사람의 경험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어지는 한 문장이 조용히 정곡을 찌릅니다.


"돕고 싶다는 선한 의도는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같은 장에서 저자는 "의견 좀 드려도 될까요?"라는 말을 들으면 늘 신경이 곤두선다고 씁니다. 그 경우의 의견은 진심 어린 질문이 아니라 암묵적 평가가 담긴 단언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오가는 말의 절반쯤은 사실 판정문에 가깝다는 지적인데,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책의 중반에는 실제 대화가 대본처럼 실려 있습니다. 조직 문화가 경직됐다고 호소하는 최고경영자에게 저자가 예를 들어달라고 되묻자, 곁에 있던 최고운영책임자가 회의실 일화를 꺼내요. 다섯 명만 참석한 자리인데도 사람들이 늘 앉던 자리에 띄엄띄엄 앉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느냐는 물음에 한참 뜸을 들이다 나온 대답이 "저, 그게,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였어요. 외부 진단서 한 장 없이 당사자들이 스스로 도착한 결론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이 책 전체의 주장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사례는 조금 매끄럽다는 인상도 남습니다. 질문 두어 개로 최고경영진이 곧장 자기 책임을 인정하는 전개가 현실 회의실에서 그대로 재현될지는 자신이 없어요. 자기 잘못을 인정할 만한 지위와 여유가 이미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일 수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저는 바로 뒤에 나오는 도시가스 회사 사례가 더 미더웠습니다. 안면 보호구를 벗어 해고된 기사를 앞에 두고 관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냐며 힐난부터 쏟아내는 장면인데, 저자는 그 서툰 첫마디까지 그대로 옮겨둡니다. 이어진 질문들이 처벌이 아닌 사실 발견 쪽을 향하면서 이야기는 습한 날씨에 김이 서리는 보호구 문제로 옮겨가고, 결국 해고됐던 직원은 복직해 개선 태스크포스에 참여하게 돼요. 이 장의 결론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어떤 질문이 겸손한 질문인지는 어조와 맥락, 쌍방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고요. 정해진 문장 틀을 외워 쓰는 화법서가 아니라는 선을 저자가 스스로 그어둔 셈입니다.


개정판에서 새로 들어온 원격 근무 장은 이번 판을 다시 읽을 이유에 해당합니다. 영상회의가 대면회의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는데, 근거가 제법 구체적이에요. 누가 어디 앉느냐를 둘러싼 눈치 게임이 사라지고, 발언 순서 규칙 덕분에 가장 큰 목소리가 결론을 가져가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 방 안에서 제일 요란한 목소리가 반드시 최선의 아이디어는 아니라는 말에는 여러 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여기서는 물음표가 하나 남았습니다. 화면 회의에는 화면 회의 나름의 위계 신호가 새로 생기지 않았나 싶어서요. 카메라를 켜고 끄는 문제, 배열 순서, 윗사람이 말할 때 흐르는 특유의 침묵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저자도 영상회의가 이해타산적 관계를 오히려 부추길 수 있다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새로 생겨난 눈치의 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말을 아낍니다. 한국 조직에서 이 장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 빈칸을 각자 채워 넣게 될 것 같아요.


책의 뒷부분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뜻밖에도 회사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자녀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물어보기에 가장 좋은 때는 부모가 운전하고 자녀는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을 때라는 대목이에요. 정색하고 마주 앉아 얘기 좀 하자고 하는 자리보다, 시선이 서로를 비껴가는 시간에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노려보는 눈 맞춤은 강력한 신호를 주기는커녕 문을 쾅 닫게 할 뿐이라는 문장도 함께 붙어 있고요. 저자는 같은 원리를 워킹 미팅으로 확장합니다. 함께 걸으면 발 디디는 곳을 봐야 하기 때문에 상대를 눈으로 판단하지 않고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것. 리더십을 다룬 안내서 한가운데에 이런 장면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온도를 말해줍니다.


그동안 여러 책을 이런 식으로 만나왔는데, 이번 도서는 읽는 동안 밑줄보다 침묵이 길었던 편이에요. 잘 이끄는 법을 알려주는 대신, 그동안 얼마나 자주 답부터 내밀었는지를 확인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위로라기보다 점검에 가까운데도 읽고 나면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은 것은, 겸손이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상황마다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저자가 못 박아두었기 때문일 겁니다. 오만한 사람도 자기가 주도할 수 없는 자리에서는 겸손해지고, 겸손한 사람도 답을 안다고 여기는 순간 오만해진다고요. 그 말은 늦게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한여름 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은 8월입니다. 매미 소리가 한창인 이 계절에 어울리는 책은 아닐지 모르지만, 하반기 업무를 다시 짜는 시기와는 제법 맞아떨어집니다. 답을 하나 더 준비하기보다 질문을 하나 남겨두는 편이 나을 자리가 어디였는지, 지난 상반기를 훑어보게 하는 한 권이었어요. 조직을 맡고 있는 분들은 물론이고 아직 누구를 이끌 위치가 아닌 이들에게도 쓸모가 있을 겁니다. 질문은 직급과 함께 오는 권한이 아니니까요.


잘 답하는 법이 아니라 잘 묻는 법을 다시 배우게 하는, 조직심리학 대가의 마지막 리더십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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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좋아지는 자존감 대화법 - 말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을 위한 대화 기술
임세화 지음 / 밀크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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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옅은 하늘빛 바탕 위에 '자존감 대화법' 다섯 글자만 크게 앉힌 표지였습니다. 아래쪽 짙은 남색 띠에는 저자 사진과 별 다섯 개짜리 배지가 나란히 놓여 있어서, 강연장에서 건네받는 자료집 같은 인상도 조금 섞여 있었고요. 부제에서 '상처받는'이라는 세 글자만 붉게 처리한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구를 향해 쓴 책인지 표지가 먼저 밝히고 들어가는 셈이더군요. 판형과 분량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며칠에 나눠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임세화 작가의 <관계가 좋아지는 자존감 대화법>은 말솜씨를 다루는 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붙잡고 있는 질문은 조금 더 안쪽에 있습니다. 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날은 흘려보내고 어떤 날은 며칠씩 품고 있게 되는 이유를 대화 기술이 아니라 그 말을 받는 사람의 자기 존중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목차가 자존감의 정의에서 출발해 말 습관, 관계별 적용, 셀프 대화, 실천 도구 순으로 좁혀집니다.


책에서 오래 붙잡고 있었던 대목은 2장 뒤쪽의 '나를 지키는 3단계 번역 듣기의 기술'이었습니다. 저자는 <비폭력 대화>의 마셜 B. 로젠버그를 빌려 이렇게 적습니다. "세상의 모든 말은 두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부탁하는 말 아니면 고맙다는 말이다." 이 전제 위에서 들은 말을 부탁인지 감사인지 먼저 나누고, 화자의 의중을 번역해 본 뒤, 그 번역을 상대에게 들려주는 순서를 제안합니다. 표로 정리된 예시가 꽤 구체적이에요. "넌 왜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니?"를 하나라도 잘 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으로 옮기고, "뭐 하러 이렇게까지 애를 쓰고 난리야?"를 애써줘서 고맙다는 말로 옮기는 식입니다.


솔직히 여기서 한 번 걸렸습니다. 모든 말이 부탁 아니면 감사로 귀결된다는 전제는 명쾌하지만, 살다 보면 선의가 아예 없는 말도 있으니까요. 무례한 말까지 좋은 뜻으로 번역해 되돌려 주는 일이 스스로를 더 눌러 앉히는 방향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다행히 저자도 그 여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 챕터의 끝에서, 번역한 말을 상대에게 들려주기 어렵거나 부탁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고 마음을 보듬는 시간을 꼭 가지라고 당부하거든요. 기법 설명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챕터가 이 한 문단 덕분에 위로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3장의 거절 편은 결이 또 다릅니다. 저자는 거절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여섯 갈래로 나누는데, 그중 가정환경의 영향을 짚은 대목이 한국 독자에게는 남다르게 읽힐 것 같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반복해 보고 자라면 자기희생이 당연해지고 거절은 옳지 못한 행위로 자리 잡는다는 설명이었어요. 공감으로 시작해 상황을 공유하고 감사를 표한 뒤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거절하고 대안까지 얹는 다섯 단계는, 순서만 보면 사무실에서 오가는 부탁의 속도에 비해 여유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저자가 뒤이어 강조하는 세 원칙 가운데 일관성이 그 빈틈을 메웁니다. 상황마다 태도가 달라지면 신뢰를 잃는다는 지적은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아프게 들릴 만합니다. 그리고 이 챕터를 닫는 문장이 좋았습니다. 존중하는 태도로 거절했는데도 관계가 악화되었다면,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것. 거절이 관계 지속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이 담백해서 오히려 든든했어요.


4장으로 넘어가면 이 기술들이 실제로 부딪히는 자리가 나옵니다. 금요일 오후 다섯 시에 걸려 온 팀장의 전화로 시작하는 사례는 읽으면서 여러 얼굴이 스쳤습니다. 주말을 갈아 넣어 자료를 보냈는데 월요일 아침에 돌아온 대답이 이따 보겠다는 한마디였고, 그 일이 반복되며 A 사원은 의욕 없이 적당히 일하는 직원이 되고 맙니다. 저자는 같은 상황을 존중이 오가는 버전으로 다시 씁니다. 미안하다는 말과 되는 데까지만 해 달라는 배려, 마지막의 고맙다는 인사가 들어간 짧은 대화 하나로 결과가 달라지는 걸 보여주지요.


주말을 캐묻는 상급자 앞에서 웃으며 화제를 돌리라는 조언에는 조금 갸웃했습니다. 부드럽게 넘기는 기술은 분명 필요하지만, 반복해서 선을 넘는 상대에게 웃음으로 답하는 일이 그 질문을 계속 허용하는 신호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이 장의 결론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직장은 철저히 업무와 협력의 자리이고, 모두가 제 입맛에 맞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비즈니스 관계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는 문장이 차갑게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기준점에 자기 자신을 두라는 말이 바로 뒤에 붙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책은 결국 자기에게 건네는 말로 돌아옵니다. 5장에서 실수와 자책을 다루면서 저자는 사실과 해석을 갈라 보라고 권합니다. 회의에서 표현을 잘못 말한 것은 사실이고, 사람들이 나를 무능하다고 여겼을 것이며 나는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판단은 그 사건에 붙인 해석이라는 구분입니다. 실수 뒤에 곧장 자책으로 넘어가는 익숙한 경로 대신 십 초쯤 멈추고 원인을 한두 개만 찾아 기록해 두라는 절차도 현실적이었습니다. 원인을 한두 개로 제한하라는 단서가 특히 그랬어요. 끝에 소개된 문구도 기억에 남습니다. 트위터 본사에 걸려 있다는 "내일은 더 좋은 실수를 하자(Let's make better mistakes tomorrow)."라는 말이요.


읽고 나서 남은 인상은 이렇습니다. 이 책은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상처가 오는 길목마다 잠깐 멈춰 설 자리를 만들어 둡니다. 로젠버그 척도와 감정 일기, 관계 점검표까지 실린 뒷부분을 보면 읽고 덮는 책보다는 곁에 두고 써 보는 안내서에 가깝고요. 자존감이 타고나는 성격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으로 쌓이는 힘이라는 저자의 관점이 이 구성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오면서, 읽는 동안 좋았다가 덮으면 흐려지는 책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한 권은 표를 다시 펼쳐 보게 되는 쪽이었어요.


말 한마디에 오래 흔들려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2장부터 천천히 읽어도 좋겠습니다. 거절이 늘 어려워 일을 떠안게 되는 자리에 있다면 3장이 먼저 눈에 들어올 테고요. 조직에서 사람을 대하는 언어를 다듬고 싶은 분들에게도 4장의 사례들이 쓸모가 있을 겁니다.


늦더위가 아직 남아 있지만 저녁 공기에는 슬며시 결이 바뀌는 기미가 돕니다. 여름을 지나오며 삼켰던 말들이 있다면, 그 말을 어떻게 되돌려 줄지 조용히 정리해 두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을이 오기 전에 한 번쯤 자기 말투를 점검해 보고 싶은 분들께 이 도서를 권합니다.


남의 말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말을 받아드는 방식은 연습으로 바꿀 수 있다고 알려주는 실천형 대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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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개발자도 클로드 코드로 쉽게 만드는 AI 웹 서비스 - 기획 및 설계부터 개발 및 배포까지 혼자서 완성하는 AI 웹 실전 가이드
최원재 지음 / 위즈앤북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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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상에 올려두고 며칠은 표지만 봤습니다. 기술서라고 하면 대개 화면 캡처나 코드 조각을 크게 박아 두는데, <비개발자도 클로드 코드로 쉽게 만드는 AI 웹 서비스>는 크림빛 바탕에 검정과 주황 두 색만 씁니다. 제목이 네 줄로 쌓여 있고 마지막 줄 옆에 주황색 별 하나가 조용히 찍혀 있어요. 아래쪽에는 Claude Code, Vibe Coding, SpecKit이라고 적힌 동그란 배지 세 개가 나란히 놓였고, 맨 밑에 스탠드와 노트북 일러스트가 작게 들어가 있습니다. 소란스럽게 굴지 않으면서 자리를 하나 마련해 둔 표지였습니다. 혼자 앉아 뭔가 만들어보는 저녁의 그림에 가깝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책인데, 봉투를 열었을 때 든 첫 생각은 '이건 겁주는 책은 아니겠구나'였습니다. 판형은 보통이고 분량도 과하지 않아요. 실습서라면 벽돌처럼 두꺼운 걸 떠올리게 되는데, 손에 쥐고 넘기기에 무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 며칠은 실습 없이 그냥 읽었습니다.


앞부분에 개발의 다섯 단계를 전통적 방식과 AI 주도 방식으로 나란히 놓은 표가 나옵니다. 기획, 설계, 개발, 테스트, 배포가 차례로 비교되는데 눈이 오래 간 곳은 맨 아랫줄이었어요. '핵심 역할' 칸에 한쪽은 코드 작성(Coding), 다른 쪽은 지휘(Directing)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표 하나로 이 책이 하려는 말을 거의 다 해버린 셈입니다. AI의 등장이 개발자의 역할을 '의도 정의, 품질 검증, 운영 책임' 쪽으로 옮기고 있다는 진단이 뒤따르는데, 코드를 만질 일 없는 직장인이 읽어도 남의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이름을 걸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 저 문장이 어디를 겨냥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까요.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AI 시대에도 사람이 필요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풉니다. 첫 항목의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AI는 '어떻게(How)'를 잘합니다. 하지만 '왜(Why)'를 스스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사용자가 겪는 불편이 정확히 무엇인지, 여러 해결책 중 왜 하필 이 방향을 택했는지, 성공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 이런 질문들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비즈니스 문제이고, 정답을 찾는 일보다는 선택하는 일에 가깝다고 책은 말합니다. 두 번째 이유에서는 맥락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 설명 없이 "쇼핑몰 만들어줘"라고 던지면 최소 검증도 어려울 만큼 빈약한 결과물이 나오거나, 쓸데없이 기능만 잔뜩 붙은 물건이 나오기 쉽다고 해요. 예산, 마감, 인력, 리스크 같은 현실의 사정을 모델은 알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집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로 품질과 보안이 나오면서 요구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가는데, 코드를 쓰지 않더라도 코드를 구조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API 키가 코드에 들어간 채로 저장소에 올라가면 유출은 시간 문제라는 경고도 이 근처에 있고요.


다섯 번째가 제일 좋았습니다. 로그인 버튼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AI는 금세 버튼을 하나 뽑아냅니다. 그런데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버튼 자체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거예요. 어디에서 시선이 멈추는지, 로그인에 실패했을 때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 같은 것들. 이런 부분은 코드가 아닌 공감과 관찰의 영역입니다, 라고 저자는 씁니다. 사람을 직접 보고 피드백을 받고 고쳐 나가는 일이지요. 읽으면서 제가 오래 해온 일의 정체가 조금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자리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방향과 품질과 책임 쪽으로 옮겨갈 뿐이라는 것이 이 장의 결론입니다.


책의 한가운데쯤에 중심축이 놓여 있습니다.


2025년 초 바이브 코딩 열풍이 불었을 때 계산기나 Todo 앱은 몇 분 만에 만들어졌고 "이게 정말 되는구나" 하는 감탄이 있었지만, 조금만 복잡해지면 사정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하나를 고치면 두 개가 뜨고 두 개를 고치면 세 개가 생기는 느낌, 오류를 다 잡아 실행은 됐는데 막상 써 보니 생각과 다르게 움직이는 상황, 수정한 곳이 다른 곳을 건드려서 결국 처음부터 다시 쓰게 되는 결말. 무한 수정 루프라고 부르더군요. 원인 분석은 담백합니다. 인터넷에 사례가 많은 프로그램은 학습이 충분하지만, 회사 사정에 맞춘 재고 관리 시스템 같은 건 똑같은 데이터가 없어서 모델이 비슷해 보이는 것을 확률적으로 골라 임의로 해석해 내놓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존재하지도 않는 라이브러리 이름을 그럴듯하게 지어내는 할루시네이션까지 겹치고요.


그래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게 구체성입니다. 회원가입 기능을 만들어 달라는 말과, 이메일과 비밀번호와 비밀번호 확인 필드를 두고 형식 검증을 걸고 여덟 자 이상으로 제한하며 확인이 어긋나면 입력창 아래에 빨간 안내를 띄우라는 말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자기 논리에 스스로 딴지를 겁니다.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요. 답은 그 정리 작업조차 AI와 대화하며 만들고, 다듬어진 요구사항을 다시 AI에게 넘긴다는 것이고, 그 과정 자체가 기획이자 설계라고 합니다. 이 흐름에서 SDD, 명세 중심 개발이 등장해요. 코드보다 문서를 먼저 쓰고, 명세에 없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사람용 기획서와 AI용 기획서를 대상과 초점, 형식과 단위로 갈라 비교한 표도 실려 있습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한 번 멈칫했습니다. 앞에서는 모델이 How에 강하고 Why를 못 만든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사람용 기획서가 How에 치우쳐 있고 AI용 기획서는 What과 Why에 집중해야 한다고 나옵니다. 읽어 보면 층위가 다른 이야기인 걸 알겠지만, 같은 단어가 몇 챕터 사이에서 반대 방향으로 쓰이니 처음 접하는 독자는 앞으로 돌아가 확인하게 될 것 같아요. 표지에 '비개발자도'라고 크게 적어둔 책치고 본문이 요구하는 수준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함께 짚어두고 싶습니다. 저자도 처음에는 낯설고 어려울 거라고 미리 일러두긴 했습니다만.


뒤로 갈수록 손이 바빠집니다. 인증 시스템을 만들고 학습 공간을 붙이고 코드 업로드와 분석 기능을 얹은 뒤 문서 생성까지 이어지는데, 마지막 장의 설명이 특히 담백했습니다. 지금까지 만든 서비스는 제 컴퓨터 안에서만 살아 있고, 밖에서 들어오게 하려면 방화벽을 열고 컴퓨터를 스물네 시간 켜 둬야 하니 실제 운영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요. 배포를 마쳐야 비로소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주소가 생긴다는 것. Git은 변경 이력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이고 GitHub는 그 기록을 인터넷 서버에 두는 소스 코드 전용 클라우드라는 설명, 보내면 Push고 가져오면 Pull이라는 정리에도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가입 화면부터 저장소 만들기까지 캡처에 번호를 붙여 안내하는 방식은 친절합니다. 이런 화면은 개편이 잦아 몇 달 뒤면 책과 달라져 있겠지만, 모르면 AI에게 물어보며 해결한다는 태도를 앞에서 충분히 익혀 뒀다면 그 정도 어긋남은 넘어갈 수 있겠지요.


읽고 나면 태도 쪽이 더 오래 남습니다. 요즘 회사마다 AI 이야기가 넘치고, 나이 좀 있는 직원들은 그 말들 앞에서 조용히 위축되곤 합니다. 이 책이 그 위축을 직접 다루지는 않아요. 대신 사람이 남아야 할 자리를 꽤 구체적으로 그려 보입니다. 무엇을 왜 만들 것인지 정하고, 나온 결과를 검증하고, 잘못됐을 때 책임을 지는 일. 새로 배워야 할 무엇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래 해온 일에 붙은 다른 이름이더군요. 개발을 업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사내에서 작은 도구 하나쯤 만들어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말이 잘 통할 겁니다. 프롬프트 몇 줄로 끝나는 요령을 기대하고 펴면 도리어 지칠 수 있는 안내서이기도 하고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 왔지만 실용서는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유행이 지나면 남는 게 없을까 싶어서요. 이 한 권은 도구 이름이 바뀌어도 살아남을 문장을 몇 개 쥐여 줬다는 점에서 값을 했습니다. 의도를 세우고, 만들게 하고, 확인하고, 고친다. 그 순서만큼은 당분간 유효할 것 같습니다.


입추가 지났는데도 낮 볕은 여전히 따갑고,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바람이 한 자락 지나갑니다. 여름이 물러갈 준비를 하는 이맘때는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어정쩡한 시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런 책은 오히려 그런 계절에 어울립니다. 서두르지 않고 목차 순서대로 따라가다 보면 가을 어귀쯤에는 제 이름으로 된 주소 하나가 인터넷 어딘가에 생겨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AI가 대신 짜주는 시대에도 무엇을 왜 만들지는 사람이 정해야 한다는 것을, 열 개 장을 따라가며 조곤조곤 증명해 보이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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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아이 육아백과 - 예민한 아이의 천재성을 깨우는 100% 실전 몰입 육아
서지예 지음 / 빈티지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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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에 아이 얼굴이 크게 놓여 있고, 그 위로 한 문장이 얹혀 있습니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우고 있는 걸까. 책을 펼치기 전부터 이 책이 누구를 부르고 있는지 알겠더군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예민한 아이 육아백과>를 받아 들었을 때, 신국판에 290쪽 남짓이라 손에 부담이 없었고 며칠 나눠 읽기에 알맞은 두께였습니다.


책의 앞머리에는 사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아홉 달 된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선생님이 보내주는 사진마다 혀를 내밀고 있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넘겼다가 같은 모습이 반복되면서 저자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단체 사진 속 아이의 자리도 늘 비슷했습니다. 앞줄에 가려 얼굴만 겨우 보이거나 뒷줄 구석이었다고 해요. 이 장면을 적으면서 저자는 자기 사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주말부부였고 양육자가 자주 바뀌던 시기였다는 것, 그래서 아이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해 주던 사람이 실질적으로 없었다는 것까지 그대로 씁니다. 육아서에서 이만큼 자기 쪽을 먼저 열어 보이는 문장은 흔치 않습니다.


전환은 어린이집 담임교사의 말에서 옵니다.


"어머니, 이 아이는 예민한 기질입니다. 나쁜 게 아니에요. 예민하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애가 많이 쓰이실 거예요."


그 뒤에 붙은 당부가 더 오래 남습니다. 고치려고 하지 마시고 대신 많이 사랑해 주고 칭찬해 주라는 것, 낯선 곳에 갈 때는 미리 알려주고 새로운 음식은 억지로 먹이지 말라는 것. 이 아이한테는 그게 다 일이거든요. 저자는 이 순간을 두고 내 아이를 설명해 주는 말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나를 바꿔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진단명을 얻은 안도가 아니라 방향을 고쳐 잡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이 정해집니다.


다만 실행에 옮기려니 걸리는 데가 있었습니다. 소아과에서 들은 조언은 일단 모른 척 넘어가 보라는 쪽이었고, 저자가 정리한 부모의 할 일에는 그 행동이 언제 나타나는지 맥락을 파악하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지적하지 않으면서 계속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는 생각보다 긴 인내를 요구합니다. 책은 그 기다림의 답답함을 비교적 짧게 지나갑니다. 양육 환경이 흔들리던 시기와 타고난 기질이 겹쳐 있었다는 서술도 정직하지만, 그렇다면 아이의 반복 행동에서 무엇이 환경 탓이고 무엇이 기질인지 갈라 보는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저로서는 물음이 남았습니다.


2장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개인 경험에서 개념으로 옮겨 갑니다. 민들레 아이와 튤립 아이, 난초 아이를 나누는 틀이 나오고,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인구의 15에서 20퍼센트 정도라는 수치도 함께 제시됩니다. 이 장에서 가장 뜻밖이었던 건 부모 민감성을 점검하는 열다섯 문항이었습니다. 잘못했을 때 아이에게 사과하는지, 아이가 말을 걸면 휴대폰을 내려놓는지, 내 감정을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는지를 묻습니다. 책을 펴 든 사람은 아이를 이해하려고 왔는데 정작 채점을 받는 쪽은 부모입니다. 예민한 부모가 예민한 아이를 키울 때 감정이 옮겨 붙고 소진되기 쉽다는 대목까지 읽고 나면, 이 책이 아이 사용법을 알려주는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3장은 그 방향을 생활로 내려놓습니다. 키즈카페를 도파민 천국이라 부르며 아쉬워하고, 대신 박물관과 미술관, 재래시장을 권합니다. 시장을 다룬 꼭지가 특히 좋았습니다.


"재래시장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나름의 체계와 섭리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감각 교육이 태도 교육으로 넘어갑니다. 비가 와도 문을 열고 손님이 없어도 물건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서 대수롭지 않게, 용감하게, 그리고 무던하게 세상을 살아내는 법을 배운다고 저자는 씁니다. 기분이 널을 뛰는 날에도 괜찮다는 걸 아이가 알았으면 한다는 바람이 그 뒤에 놓여 있습니다. 실천 항목도 소박합니다. 박물관에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말고 아이가 오래 머문 전시물을 적어 두라는 것, 시장에서는 현금을 쥐여주고 직접 고르고 거스름돈을 받게 하라는 것 정도입니다.


한 가지는 짚어 두고 싶습니다. 자극에 민감한 아이에게 재래시장은 감각 정보가 가장 촘촘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비린내와 기름 냄새, 사방에서 오는 말소리를 십 분도 견디기 어려운 아이가 분명히 있을 텐데, 책은 시장의 풍성함 쪽에 무게를 싣고 과부하 가능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새로운 음식을 억지로 먹이지 말라고 인용해 둔 것과 나란히 놓으면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이 자극의 총량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고 사람 냄새 나는 자극의 성질이라면, 그 단서를 한 줄만 더 달아 주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읽고 나서 남은 건 방법 목록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어떤 모습에 이름이 붙는 순간 부모의 자책이 멈춘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해볼 만한 일들이 보인다는 것. 저자가 자기 실패를 앞세워 쓴 책이라 조언이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옆에서 건네집니다. 아이 기질을 두고 오래 마음을 앓아 온 분이라면, 채점표가 자기 쪽을 향해 돌아서는 그 순간을 한 번쯤 겪어 볼 만합니다.


아이의 기질에 이름이 붙는 순간, 부모의 자책이 멈추고 해볼 만한 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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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원을 묻다
함익병.김범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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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감색 바탕에 크래프트 질감이 얇게 깔린 표지입니다. 크림색 글자가 차분하게 앉아 있고, 제목 옆으로 붉은 기운이 한 번 지나갑니다. 정치를 다룬 안내서치고는 소리를 높이지 않는 인상이었어요. 판형과 분량이 모두 평범한 편이라 손에 쥐고 며칠 나눠 읽기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함익병 선생과 김범준 박사가 함께 쓴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는 그렇게 조용한 얼굴로 시작합니다.


첫 장은 2024년 12월의 밤에서 출발합니다. 저자들은 늦은 저녁 식탁, 불 꺼진 사무실, 승강장, 택시 뒷좌석을 나란히 놓고 그날 밤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소식을 받아들이던 장면을 그립니다. 계엄이라는 단어가 헌법 바깥의 폭력이 아니라 헌법 안에 남아 있는 예외 권한이라는 설명이 앞에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문장이 한 번 단단해집니다. "계엄은 민주주의 국가에 남아 있는 가장 위험한 비상권력이다." 위험하다는 말과 남아 있다는 말이 한 문장에 함께 놓여 있는 게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어지는 여의도 가는 길의 서술은 뜻밖에 소박합니다. 외투와 충전기를 챙기고, 승강기 안에서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는 장면이 이어지거든요. 저자들은 이때 민주주의의 거대한 말들이 그 순간에는 아주 작은 말들이 된다고 적습니다. 국회 앞에 선 사람들을 시위대가 아니라 헌법 절차의 목격자로 부르는 시선도 인상적이었고요. 계엄이 헌법 안의 권한이라면 그것을 멈추는 장치 역시 헌법 안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날 밤 국회가 열려 있어야 했던 이유가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2004년 탄핵을 다룬 장에서는 서술의 온도가 한 단계 내려갑니다. 저자들은 그해의 실패를 실패로만 기록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탄핵의 문턱과 무게를 처음 배운 시간으로 읽습니다.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결과의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지적, 국회와 헌법재판소라는 안쪽 무대와 여론과 선거라는 바깥 무대가 어긋날 때 정당성이 흔들린다는 정리가 차분하게 이어집니다. 특정 진영을 편들지 않으려는 균형 감각이 여기서 가장 잘 드러나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제 마음이 오래 걸린 쪽은 1997년을 다룬 장이었습니다. 저자들은 외환위기를 경제 사건이 아니라 정치 사건으로 다시 세웁니다. 환율과 외환보유고의 숫자는 멀어 보였지만 사원증과 가계부에는 곧바로 닿았다고 쓰는 문장 앞에서, 그 시절 회사 복도에 떠돌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성실하게 일하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서 민주주의가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를 짚는 대목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현실에 가깝게 읽힙니다. "제도가 형식적으로 민주적이어도 삶이 불안하면 민주주의의 신뢰는 약해진다." 이 한 문장이 1987년과 1997년 사이의 거리를 설명해 줍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2002년 대선의 지역별 득표를 담은 지도는 원본이 색으로 구분된 자료라 흑백 인쇄에서는 경계가 잘 읽히지 않습니다. 도표를 활용한 편집이 전반적으로 친절한 편이라 이 부분은 조금 더 손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또 하나, 위기의 고통이 공정하게 나뉘지 못했다는 진단까지는 선명한데, 그 이후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짧습니다. 다만 이 책이 처방전이 아니라 기원을 묻는 안내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절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장은 1945년으로 갑니다. 해방을 다루면서 저자들이 내놓는 명제는 간결합니다. "자유는 먼저 왔지만, 국가는 늦게 왔다." 총독부의 권한을 넘겨받은 것이 우리 손의 정부가 아니라 또 다른 군정이었고, 간판은 바뀌었어도 조직과 사람과 통치의 습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서술이 이어집니다. 민주주의의 언어와 통치의 습관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저자들의 분석은, 앞선 장들에서 읽은 장면들과 조용히 맞물립니다. 해방기에 미뤄 둔 숙제가 4·19의 분노와 광주의 상처, 87년 체제의 한계와 이후의 광장에서 형체를 바꿔 다시 나타난다는 문장에 이르면, 일곱 개의 장면이 흩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줄기였다는 게 보이기 시작하고요.



제목이 던지는 물음에 이 책은 답을 정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국가가 너무 약하면 사회가 흔들리고 너무 강하면 자유가 눌린다는 이중의 감각이 우리 정치에 왜 이렇게 오래 남아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줍니다. 그 설명을 따라가는 동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최근 몇 해 동안 느낀 불안이 저 혼자의 예민함이 아니라 오래된 구조에서 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되니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더군요. 이해받는 감각에도 위로가 있습니다.


정치 서적을 오래 멀리해 온 분이라도 문턱이 낮게 느껴질 만한 문장들이라, 뉴스는 매일 보는데 흐름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느끼셨다면 한 번쯤 펼쳐 보셔도 좋겠습니다. 감각적인 서술과 사료 중심의 기록이 번갈아 나오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기록 쪽으로 무게가 옮겨 가는데, 그 변화도 읽는 재미 중 하나였어요.


8월의 볕이 아직 두껍습니다. 매미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 달력에는 광복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와 있네요. 자유가 먼저 도착하고 국가가 뒤늦게 도착했다는 그 여름의 이야기를 이 계절에 읽게 된 건 우연이지만, 우연치고는 맞춤한 우연이었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도는 실내에서 천천히 넘기기에 알맞은 두께이기도 하고요.


계엄의 밤에서 해방의 아침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 민주주의가 왜 지금의 모습인지를 차분한 언어로 짚어 주는 정치 교양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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