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원을 묻다
함익병.김범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감색 바탕에 크래프트 질감이 얇게 깔린 표지입니다. 크림색 글자가 차분하게 앉아 있고, 제목 옆으로 붉은 기운이 한 번 지나갑니다. 정치를 다룬 안내서치고는 소리를 높이지 않는 인상이었어요. 판형과 분량이 모두 평범한 편이라 손에 쥐고 며칠 나눠 읽기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함익병 선생과 김범준 박사가 함께 쓴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는 그렇게 조용한 얼굴로 시작합니다.


첫 장은 2024년 12월의 밤에서 출발합니다. 저자들은 늦은 저녁 식탁, 불 꺼진 사무실, 승강장, 택시 뒷좌석을 나란히 놓고 그날 밤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소식을 받아들이던 장면을 그립니다. 계엄이라는 단어가 헌법 바깥의 폭력이 아니라 헌법 안에 남아 있는 예외 권한이라는 설명이 앞에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문장이 한 번 단단해집니다. "계엄은 민주주의 국가에 남아 있는 가장 위험한 비상권력이다." 위험하다는 말과 남아 있다는 말이 한 문장에 함께 놓여 있는 게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어지는 여의도 가는 길의 서술은 뜻밖에 소박합니다. 외투와 충전기를 챙기고, 승강기 안에서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는 장면이 이어지거든요. 저자들은 이때 민주주의의 거대한 말들이 그 순간에는 아주 작은 말들이 된다고 적습니다. 국회 앞에 선 사람들을 시위대가 아니라 헌법 절차의 목격자로 부르는 시선도 인상적이었고요. 계엄이 헌법 안의 권한이라면 그것을 멈추는 장치 역시 헌법 안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날 밤 국회가 열려 있어야 했던 이유가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2004년 탄핵을 다룬 장에서는 서술의 온도가 한 단계 내려갑니다. 저자들은 그해의 실패를 실패로만 기록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탄핵의 문턱과 무게를 처음 배운 시간으로 읽습니다.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결과의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지적, 국회와 헌법재판소라는 안쪽 무대와 여론과 선거라는 바깥 무대가 어긋날 때 정당성이 흔들린다는 정리가 차분하게 이어집니다. 특정 진영을 편들지 않으려는 균형 감각이 여기서 가장 잘 드러나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제 마음이 오래 걸린 쪽은 1997년을 다룬 장이었습니다. 저자들은 외환위기를 경제 사건이 아니라 정치 사건으로 다시 세웁니다. 환율과 외환보유고의 숫자는 멀어 보였지만 사원증과 가계부에는 곧바로 닿았다고 쓰는 문장 앞에서, 그 시절 회사 복도에 떠돌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성실하게 일하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서 민주주의가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를 짚는 대목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현실에 가깝게 읽힙니다. "제도가 형식적으로 민주적이어도 삶이 불안하면 민주주의의 신뢰는 약해진다." 이 한 문장이 1987년과 1997년 사이의 거리를 설명해 줍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2002년 대선의 지역별 득표를 담은 지도는 원본이 색으로 구분된 자료라 흑백 인쇄에서는 경계가 잘 읽히지 않습니다. 도표를 활용한 편집이 전반적으로 친절한 편이라 이 부분은 조금 더 손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또 하나, 위기의 고통이 공정하게 나뉘지 못했다는 진단까지는 선명한데, 그 이후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짧습니다. 다만 이 책이 처방전이 아니라 기원을 묻는 안내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절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장은 1945년으로 갑니다. 해방을 다루면서 저자들이 내놓는 명제는 간결합니다. "자유는 먼저 왔지만, 국가는 늦게 왔다." 총독부의 권한을 넘겨받은 것이 우리 손의 정부가 아니라 또 다른 군정이었고, 간판은 바뀌었어도 조직과 사람과 통치의 습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서술이 이어집니다. 민주주의의 언어와 통치의 습관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저자들의 분석은, 앞선 장들에서 읽은 장면들과 조용히 맞물립니다. 해방기에 미뤄 둔 숙제가 4·19의 분노와 광주의 상처, 87년 체제의 한계와 이후의 광장에서 형체를 바꿔 다시 나타난다는 문장에 이르면, 일곱 개의 장면이 흩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줄기였다는 게 보이기 시작하고요.



제목이 던지는 물음에 이 책은 답을 정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국가가 너무 약하면 사회가 흔들리고 너무 강하면 자유가 눌린다는 이중의 감각이 우리 정치에 왜 이렇게 오래 남아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줍니다. 그 설명을 따라가는 동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최근 몇 해 동안 느낀 불안이 저 혼자의 예민함이 아니라 오래된 구조에서 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되니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더군요. 이해받는 감각에도 위로가 있습니다.


정치 서적을 오래 멀리해 온 분이라도 문턱이 낮게 느껴질 만한 문장들이라, 뉴스는 매일 보는데 흐름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느끼셨다면 한 번쯤 펼쳐 보셔도 좋겠습니다. 감각적인 서술과 사료 중심의 기록이 번갈아 나오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기록 쪽으로 무게가 옮겨 가는데, 그 변화도 읽는 재미 중 하나였어요.


8월의 볕이 아직 두껍습니다. 매미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 달력에는 광복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와 있네요. 자유가 먼저 도착하고 국가가 뒤늦게 도착했다는 그 여름의 이야기를 이 계절에 읽게 된 건 우연이지만, 우연치고는 맞춤한 우연이었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도는 실내에서 천천히 넘기기에 알맞은 두께이기도 하고요.


계엄의 밤에서 해방의 아침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 민주주의가 왜 지금의 모습인지를 차분한 언어로 짚어 주는 정치 교양서입니다.


#국가는누구의것인가 #함익병 #김범준 #중앙북스 #정치도서 #정치교양서 #한국현대사 #민주주의 #대한민국민주주의 #계엄 #탄핵 #IMF외환위기 #해방과분단 #광복절추천도서 #서평 #책추천 #독서기록 #북유럽카페 #블로그서평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