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의 함정 - 자극적일수록 더 공허해진다
따웨이 지음, 이지연 옮김 / 지니의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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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형광 노란 바탕 위로 보라색 덩어리가 흘러내리고, 검은 스파이크가 사방에서 튀어 오릅니다. 표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눈이 조금 피로했어요. 그런데 아래쪽 검은 띠에 박힌 한 줄을 읽고 나니 그 피로감이 계산된 것이겠다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표지에 적힌 문구는 이렇습니다. "즐거움도 집중력도 잃었다면, 도파민을 점검하라!" 책이 하려는 이야기를 표지가 먼저 몸으로 보여 주는 구성이지요.


판형이 크지 않고 분량도 272쪽이라 손에 쥐기 편했고, 개념 하나에 사례 하나를 붙여 짧게 끊어 가는 방식이라 읽는 속도가 잘 붙었습니다. 중국의 심리상담사 따웨이가 쓰고 이지연이 옮긴 <도파민의 함정>은 도파민을 행복 물질이 아니라 갈망을 만들어 내는 신호로 다시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더 많은 자극을 원하게 만들고 다음 보상을 기대하게 만드는 쪽이 도파민의 본업이라는 것이죠.


1부에서 가장 오래 눈길이 붙은 대목은 '공갈 젖꼭지 효과'였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려 울음을 멈추게 하듯, 저렴하고 자극적인 오락거리가 불만을 잠재운다는 개념을 저자는 오늘의 쇼트 폼과 게임, 연예 뉴스에 겹쳐 놓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짚는 세 가지 작동 방식이 꽤 냉정한데, 그중 하나는 이렇게 정리돼 있습니다. "노력 없는 보상에 뇌는 순식간에 중독된다."


사례로 등장하는 디자이너 C의 하루가 특히 그랬습니다. 출근길 쇼트 폼, 점심시간 드라마, 잠들기 전 커뮤니티. 처음에는 달콤한 휴식처럼 느껼졌지만 몰입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마다 멍한 상태로 빠져 버린다는 이야기였어요. 남의 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감정적 비용이 들지 않는 가벼운 연결에 기대어 근원적인 외로움을 잠시 달랜다고 쓰는데, 이 문장이 이 챕터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아팠습니다.


2부의 '새장 논리'는 그림이 단순합니다. 평생 새장 안에서 살아온 새는 문이 열려 있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비유죠. 저자는 그 이유를 손실 회피와 불확실성 기피, 그리고 새로운 판단에 드는 에너지를 아끼려는 본능에서 찾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가짜 안정감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서늘해지는 사람이 저 혼자는 아닐 것 같아요. 현재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기보다 익숙한 업무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는 예시가 나오는데, 이 문장 앞에서는 다들 잠깐 멈추게 될 겁니다. 저자가 권하는 첫 처방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익숙해서 고르는 것인지 진심으로 원해서 고르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것, 그리고 뇌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3부로 넘어가면 같은 원리가 사랑 쪽으로 옮겨 갑니다. '간헐적 강화' 챕터가 그렇습니다. 보상이 언제 올지 모를 때 갈망이 최고조로 올라간다는 설명에 저자는 독서를 끌어와 비유하는데, 결말이 뻔한 소설보다 다음 장을 알 수 없는 소설에 더 몰입하는 이치와 같다고 하지요. 오래된 연인 사이에서 확답을 조금 미루고 여백을 두었더니 당연하게 여겼던 시간이 당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는 사례가 붙습니다.


솔직히 이 챕터에서는 고개가 조금 기울어졌습니다. 앞에서는 도파민에 끌려다니는 상태에서 빠져나오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그 원리를 관계 안에서 활용해 보라고 권하니까요. 저자도 그 간극을 의식한 듯 밀당이 아니라는 단서를 달고, 꼭 필요한 순간에는 확신을 보여 주라는 항목을 나란히 놓아 균형을 잡습니다. 그럼에도 3부 앞머리에 애착 불안이나 정서적 의존을 다루는 챕터가 따로 있는 책이라, 예측 불가능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관계를 살리는 긴장이 아니라 불안을 키우는 조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남았어요. 도파민을 적으로 두지 말고 다루는 법을 익히라는 뜻으로 읽으면 앞뒤가 이어지긴 합니다만, 이 부분의 온도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잡힐 듯합니다.


의문을 품은 대목이 있어도 책 전체를 덮고 나서의 인상은 담담했습니다. 자기계발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채찍질하는 문장이 거의 없어요. 반복되는 실수와 끊지 못하는 습관, 놓지 못하는 관계를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지 않고 뇌의 구조와 오래된 심리 패턴에서 원인을 찾아 주는 태도가 위로에 가깝게 다가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결심을 요구하는 책과 이해를 건네는 책이 나뉘는데, 이 한 권은 분명 뒤쪽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화면에 손이 가는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분들,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익숙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오래 안고 있는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심리학 용어가 붙어 있어도 설명이 어렵지 않으니 이 분야를 처음 읽는 사람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처방의 골격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인상은 있어서, 순서대로 완독하기보다 목차에서 눈에 걸리는 개념을 골라 읽는 방법도 괜찮겠습니다.


책의 끝자락에는 이런 문장이 놓여 있습니다. "진짜 삶은 화면 밖 당신의 시선 끝에 있다."


여름의 끝이 가까워지는데도 더위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고, 밤이면 창밖 소리가 조금씩 얇아지는 시기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서는 무언가를 크게 결심하고 싶어지지만, 이 책은 그 반대편을 가리킵니다. 거대한 결심보다 매일 반복되는 작은 선택이 삶을 만든다는 마지막 문장을 8월 말의 신간으로 만나게 되어, 유난히 알맞은 시기에 도착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며, 자극에 빼앗긴 일상의 감각을 조용히 되돌려 주는 심리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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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수학이 잘되는 수학책
송명진.박종하 지음 / 블랙피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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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받아 든 순간 먼저 느껴지는 건 두께입니다. 표지는 연한 버터색이라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데, 손에 얹으면 만만치 않은 무게가 옵니다. 빨강과 검정으로 큼직하게 박힌 제목 아래로 분홍과 하늘색 삼각형이 겹쳐 있고, 노랑 초록 캐릭터가 도형 위를 기어오르고 있어서 표정은 분명 명랑합니다. 그런데 안에 든 것이 185개의 문제라는 걸 알고 나면, 이 명랑함이 만만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앉은자리에서 넘길 책은 아니라고 짐작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첫 장에 '계산이 상상을 죽인다'라는 제목의 꼭지가 있습니다. 정사각형 세 개가 위로 쌓여 있고 아래 왼쪽에서 위 오른쪽까지 이은 길이가 10일 때 정사각형 하나의 넓이를 구하라는 문제인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쓰면 세 줄에 끝납니다. 저자들은 답을 내놓고도 멈추지 않고 같은 문제를 다시 붙잡습니다. 정리를 쓰지 않고, 도형을 복사해 90도씩 돌려 네 개를 붙이는 방식으로요. 그렇게 만든 큰 정사각형 하나가 작은 정사각형 열 개분이라는 걸 확인하며 같은 답에 도착합니다. 훨씬 길고 훨씬 번거로운 길입니다.


그 뒤에 붙은 문장이 이렇습니다. "때로는 단순 계산이 다양한 상상을 죽이기도 합니다." 절 제목보다 수위를 낮춘 표현인데, 조금 더 읽으면 저자들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 두는 대목도 나옵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익숙하게 쓰면 좋겠다고 분명히 적어 둡니다. 정해진 조건 안에서 최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려 보자는 게 요지였던 셈이죠. 자기 주장의 세기를 스스로 관리하는 책이라 읽는 쪽도 편안했습니다.


바로 다음 꼭지의 제목은 'Out of box'입니다. 숫자 카드 여덟 장을 두 줄로 놓고 두 개만 옮겨 양쪽 합을 맞추라는 문제인데, 여기서 저자들이 먼저 하는 일이 인상적입니다. 옮기기 시작하는 대신, 이 문제의 답이 존재하는지를 묻습니다. 두 줄의 합은 39이고 카드를 아무리 바꿔도 총합은 변하지 않으니 양쪽이 같아지려면 각각 19.5여야 하는데, 다루는 수는 모두 자연수입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먼저 나옵니다. 서둘러 숫자를 옮기다 보면 계획도 전략도 없이 주먹구구로 접근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든다는 서술도 곁들여 있는데, 사무실에서 급한 일을 붙잡고 있을 때의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오래 눈이 머물렀습니다.


그다음 해법은 숫자가 종이 카드로 주어졌다는 점을 이용해 9를 뒤집어 6으로 쓰는 것입니다. 무릎을 치게 되는 대목이긴 한데, 여기서 가벼운 의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이 트릭은 한 번 알고 나면 그 자리에서 소모됩니다. 반면 뒤쪽 장에서 다루는 닮음비나 도형을 복제해 붙이는 방법은 다른 문제로 그대로 옮겨 쓸 수 있는 도구로 남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종류가 '아이디어'라는 한 이름으로 묶여 있어서, 여러 장을 이어 읽다 보면 어느 쪽이 이 책이 말하는 수학 근육인지 잠깐 헷갈립니다. 저자들도 그걸 의식했는지 같은 꼭지의 뒤 문제에서는 같은 트릭이 통하지 않게 조건을 바꿔 두었습니다.


중반의 닮음 이야기는 훨씬 단단합니다. 높이가 3미터와 4.5미터인 전신주 사이에 사람이 서 있을 때 그 사람의 키를 구하는 문제가 있는데, 닮은 삼각형 몇 개를 찾아내는 것만으로 답이 나옵니다. 직접 재지 않고도 알아내는 셈이죠. 이 장의 앞부분에 탈레스가 그림자 길이만으로 피라미드 높이를 알아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오래된 방법이 전신주와 사람의 키로 내려와 있는 배치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같은 장에서 저자들은 어려운 미적분은 풀면서도 닮은 도형을 찾아 비교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 비율 문제를 놓치는 고등학생이 많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진도를 얼마나 앞질렀느냐와 생각이 얼마나 깊어졌느냐가 따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건 '자기 복제'라는 꼭지였습니다. 빗변 길이 두 개만 주어진 도형의 넓이를 묻는데, 그 도형만 뚫어져라 바라본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책은 말합니다. 네 개를 복사해 돌려 붙여야 비로소 한 변이 7인 정사각형 안에 한 변이 5인 정사각형이 비어 있는 틀이 드러납니다. 그런 배치를 떠올리는 일이 공감각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의 몫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처음에는 생소해도 비슷한 경험을 쌓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라고 저자들은 덧붙입니다. 머리로만 하기 어렵다면 종이에 그려서 오려 붙여 보라는 권유까지 나옵니다. "누구나 경험할수록 익숙해집니다." 이 짧은 문장을 만나고서야 이 책이 왜 이렇게 두꺼운지 납득이 갔습니다. 요령 몇 개를 알려 주려는 책이 아니라, 같은 손놀림을 여러 장에 걸쳐 다르게 써 보게 하려고 이 부피를 감당한 것입니다.


읽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문제를 건너뛰고 풀이만 읽으면 이 책은 정말 얄팍해집니다. 저자들이 준 것은 답이 아니라 손을 쓰는 시간이니까요. 그래서 하루에 한두 문제씩, 연필을 들고 천천히 가는 편이 맞습니다. 아이 문제집을 들여다보다 막혀 본 어른이라면 반가울 대목이 많고, 학교를 떠난 뒤로 도형을 만져 본 적 없는 사람에게도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으로 접근하게 설계했다는 저자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빠른 답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의 방식이 답답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평단으로 만난 책 가운데 이렇게 오래 곁에 두고 조금씩 읽어야 하는 한 권은 드물었습니다. 마감에 맞춰 읽어 내는 종류가 아니라, 마감이 지나고도 계속 펼치게 되는 종류였습니다.


늦여름의 열기가 낮에는 여전한데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의 결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책이 있다면, 급할 것 없이 한 문제씩 넘기며 손을 움직이게 하는 이 도서가 그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도 아직 남은 문제가 많을 텐데, 그게 아깝지 않습니다.


공식으로 3초에 끝날 문제를 일부러 30분 동안 붙잡게 만드는 책, 그 30분에 남는 것이 있다고 조용히 설득하는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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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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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의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유명 에이전트가 다섯 살 몰리에게 춤추는 게 좋으냐고 묻고, 돈을 받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아이는 둘 다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엄마 페이는 생각해요. 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몰리는 분명 초콜릿 아이스크림 정도를 생각했을 테니까. 아이의 동의는 이렇게 받아졌고, 계약은 어른들 사이에서 성립됩니다.


몇 장 넘기면 에이전트가 광고 단가를 부릅니다. 1년쯤 지나면 한 편에 5만 달러 이상이 될 거라는 말에 페이의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그때 나오는 문장이 「정말 많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는 돈이다」예요. 조금 전에 딸을 두고 했던 계산이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어른의 상상도 결국 같은 크기였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 반복이 이 소설 전체의 설계도라고 봤습니다.


수잰 레드펀의 이 장편은 남편이 사라진 뒤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서른두 살 페이 마틴의 이야기입니다. LA 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막내 몰리의 탭 댄스 영상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가족은 하루아침에 할리우드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656면이라 손에 쥐면 묵직하지만 챕터가 짧아 속도는 붙는 편이에요. 저는 일부러 천천히 읽었습니다. 사건만 따라가면 놓치는 문장이 많은 책이라서요.


페이가 계약에 다가가는 이유가 허영이 아니라는 점을 눌러 두고 싶습니다. 큰돈이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 그가 떠올리는 목록의 첫 항목은 아들 탐의 상담 치료비입니다. 그다음이 빚, 그다음이 낡은 차 수리예요. 이 순서에 페이라는 사람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에이전트가 결혼했느냐고 묻고, 페이는 남편이 다섯 달 전에 사라졌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면서 없는 삶이 그려지는 순간이죠. 남편도 관여하느냐는 물음에는 「아뇨. 저뿐이에요」라고 답하고, 곧 이런 문장이 붙습니다. 지난 12년간의 결혼 생활이 더 정확하게 요약되는 순간이라고요. 이 한 줄에서 저는 이 소설이 연예계 이야기만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가족이 무너지는 방식도 자극적이지 않게 쓰였습니다. 중반쯤에 사라졌던 남편 션이 돌아오는데, 문제가 닥쳤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야 슈퍼히어로처럼 등장한다는 서술로 그 사람을 한 줄에 정리해 버립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달려가고, 열두 살 에밀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새 옷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옷을 더 잘 입어야 한다고요. 상처에서 배운 것이 고작 이런 거냐는 페이의 반응이 아팠습니다. 결국 남편은 새로 산 컨버터블에 아이들을 태우고 떠나고, 페이는 여행 가방과 함께 주차장에 남습니다. 그 뒤로 할 일 목록에 적어 둔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전화하기 항목의 밑줄이 세 번에서 여섯 번으로 늘어납니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밑줄 개수만 세는 방식이 오히려 세게 읽혔어요.


책의 뒤쪽으로 가면 페이는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다른 아역의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딸이 열세 살 때 겪은 일을 두고 페이가 그것은 범죄라고 말하자, 그 어머니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부르겠죠」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페이를 정면으로 봅니다. 우리는 둘 다 좋은 인생과 미래를 위해서 딸들을 팔아넘긴 것이고, 차이가 있다면 자기는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는 거라고요. 아이 치료비를 먼저 떠올렸던 선한 동기가 이 논리 안에서 변명으로 흡수됩니다. 이 대면 장면이 이 소설에서 가장 서늘한 자리였습니다.


더 오래 남은 것은 그다음입니다. 몰리는 이미 몸이 상했고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상태예요. 그런데 아이 주변의 어른들이 하나같이 같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에이전트는 수익을 계산하고, 프로듀서는 통제를 놓지 않으려 하고, 페이가 마음을 준 남자마저 「그만둬서는 안 돼요」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그만두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나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만뒀어요. 촬영 중간이었다면 절대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라는 답이 돌아오고요.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매달려 있으니 한 아이의 사정으로 멈출 수는 없다는 논리인데, 로맨스로 보였던 축이 여기서 조용히 정체를 드러냅니다. 페이는 그를 할리우드라는 종교의 신자로 정리합니다. 그 표현이 과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앞에서 근거를 쌓아 둔 소설이에요.


다만 걸린 대목도 있습니다. 페이가 총을 든 스토커에게 협박당한 일을 회상하면서, 그 청년은 악당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어린 사람일 뿐이었다고 연민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문장으로 자기 처지와 겹쳐 놓기까지 하고요. 인물의 심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아이를 향한 실제 위협을 그렇게 부드럽게 감싸도 괜찮은지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페이의 판단력이 흔들린다는 걸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해도, 이 소설이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단호했던 만큼 이 자리에서만 초점이 흐려진 인상을 받았어요. 결말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표지에 별 스티커로 얼굴이 덮인 그 아이의 사진이 왜 하필 그렇게 디자인됐는지는 알게 됩니다.



번역에 대해서도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오래된 시리얼 광고 문구나 흘러간 영화의 대사처럼 미국 독자에게만 자연스러운 표현마다 옮긴이 주가 붙어 있습니다. 농담의 온도까지 넘기려 한 흔적이라 반가웠어요.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사정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아이 얼굴이 부모 계정에 매일 올라가고 조회수가 곧 기회가 되는 일이 우리 쪽에서도 낯설지 않으니까요. 자녀의 재능을 어디까지 밀어줘야 하는지 고민해 본 분이라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 것이고, 화려한 세계의 뒷면이 궁금해 집어든 독자에게도 값은 충분합니다. 대신 아동 착취를 정면으로 다루는 구간이 있어서, 가볍게 쉬어 갈 소설을 찾는 분께는 권하기 조심스럽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정보로 남는 책과 질문으로 남는 책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확실히 뒤쪽이었습니다.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속물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그 마음의 값을 누가 치르는지는 끝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보여 주거든요.


처서를 지나 저녁 공기가 먼저 바뀌는 시기입니다. 매미 소리가 옅어지고 해가 조금씩 짧아지는 이맘때가, 두툼한 소설 한 권을 천천히 붙들기에는 알맞은 것 같아요. 책의 끝자락에 나오는 말처럼 이 세계는 사람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들고, 하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회사든 무엇이든 오래 몸담은 판이 사람을 어떤 쪽으로 바꿔 놓았는지, 이 나이가 되면 대충 짐작이 갑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짐작이 조금 더 선명해졌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진 뒤에 벌어지는 일을 656면 내내 정직하게 따라가는, 빠르지만 얕지 않은 할리우드 가족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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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내는 사람의 일의 공식 - 대체 불가능한 나로 성장하는 일잘러 사수의 인사이트
김영진(모두의 사수)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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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488쪽. 손에 얹으면 무게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표지는 흰 바탕 위에 노랑과 파랑만 써서 시원하게 트여 있고, 굵은 손글씨풍 레터링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배치되어 있어요. 목소리가 큰 선배가 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첫 장을 펼쳤을 때 조금 의외였습니다. 들어가는 글의 제목이 '저는 당신보다 느린 사람이었습니다'였거든요.


김영진 저자는 디자이너로 첫 직장에 들어갔는데 포토샵을 다룰 줄 몰랐다고 밝힙니다. 두 번째 직장인 마케팅 대행사에서는 마케팅의 'ㅁ'자도 모르는 상태로 현장에 던져졌다고 하고요. 자기계발서의 서문이 대개 성취를 앞세우는 것과 반대편에서 문을 여는 셈입니다. 자신을 최고의 실력자가 아니라 해설자로 규정하는 대목에서, 이 두꺼운 도서가 훈계집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결국 해내는 사람의 일의 공식>은 일머리를 다섯 계단으로 나눠 놓았습니다. 마음가짐과 태도에서 시작해 사회성, 실무 능력, 협업 능력을 거쳐 자기 확신에 이르고, 그 뒤에 패시브 스킬이라는 별도의 장을 붙여 사람 공부와 문제 정의, 인맥, 신뢰를 자산으로 정리합니다. 저연차든 고연차든 반드시 첫 단계부터 읽으라는 당부가 앞머리에 놓여 있고요. 저자는 이 책을 단숨에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합니다. 머리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행동할 수 없다면 진짜 아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두께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마음이 그 문장 앞에서 조금 풀렸습니다.


제 나이대의 직장인이라면 이 책의 제목이 되는 단어 하나에 걸릴 겁니다. 사수요. 저자는 평사원으로 입사한 지 2년 만에 사수도 인수인계도 없이 팀장 자리에 올랐다고 씁니다. 리더십을 배워 본 적 없는 상태에서 타인을 관리하고 성과를 책임져야 했고, 임원진은 팀원을 관리하라고 지시했지만 방황하는 자신을 이끌어 줄 사람은 조직 안에 없었다는 서술이 이어집니다. 도움을 기다릴 수 없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흐름인데, 그 질문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만약 나를 진심으로 돕는 멘토가 곁에 있다면, 지금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챙김을 받아 본 기억은 희미한데 어느새 누군가를 챙겨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거예요. 이 책이 사수를 빌려준다는 카피를 앞세운 이유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의 뒷부분에 친구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회사 생활을 했던 친구가 커리어 정체를 겪으며 저자에게 털어놓은 말이라고 해요.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은 있는데,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지 그걸 못 정했어. 이걸 누가 정해줬으면 좋겠다."


성실함으로 버텨 온 세대의 곤란이 이 짧은 문장에 다 담겨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많은 사람이 성실하게 일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방향을 잡지 못해 방황한다고 정리하고, 친구가 갖지 못했던 역량을 자신을 경영하는 힘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 힘을 기르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셀프 피드백 루프고요. 한 달에 한 번, 딱 한 시간을 잡아 여섯 가지 질문에 답하는 방식입니다. 출근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가,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문답인데, 세 번째 질문의 설명이 오래 남았습니다. 직함과 명함을 걷어냈을 때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묻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이 단계의 예시로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 보장이나 건강하고 안정적인 노후 준비 같은 문장이 붙어 있는데, 어느 연차에서 이 문장을 적게 되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답이 금방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내가 붙어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저자 자신도 어떤 질문에는 수개월 동안 명확한 답을 적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한 줄이 있어서 여섯 질문이 과제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신뢰를 다루는 장은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합니다. 급여를 일터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지 않고, 쌓아 올린 신뢰의 크기를 돈으로 환산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거든요. 서문에서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이유 없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던져 둔 이야기를 책의 끝자락에서 회수하는 구조라, 500쪽에 가까운 분량이 흩어지지 않고 한 방향을 향합니다. 특히 일관된 원칙과 문제 해결 능력을 조직 시스템을 벗어나는 순간에도 나에게 귀속되는 이동 가능한 자산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표지에 적힌 '대체 불가능한 나로 성장하는'이라는 부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회사 밖으로 무엇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지 슬슬 계산이 시작되는 나이라서 이 문단이 유독 실감 나게 읽혔습니다.


같은 장에서 저자가 자기 인식을 되짚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신입 시절 실수가 두려워 질문을 참고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행동을,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감출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었다고 적어요. 이어 내가 친절했으니 상대도 보상해야 한다고 여긴 계산적 태도 역시 상대를 통제하려는 오만이었다고 인정합니다. 위축과 오만을 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묶는 관점인데, 잘 보이려는 마음과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결국 같은 곳에서 자란다는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성취의 순간에도 내 말이 곧 정답이라고 믿는 순간 스스로가 도려내야 할 대상이 된다고 못 박는 대목에서는, 저자가 자기 성공 서사에 직접 브레이크를 걸어 두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다만 끝까지 매끄럽게 동의만 하지는 못했습니다. 새벽 4시에 물류팀으로 출근해 제품을 적재하고 6시에 생산팀으로 옮겨 공정 시간을 재고 9시에 운영팀으로 돌아왔다는 하루의 동선, 탕비실 커피머신 청소부터 아무도 하지 않는 궂은일까지 먼저 손을 들었다는 진술은 분명 저자를 지금의 자리로 데려간 힘일 겁니다. 그런데 책 중간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팀장 시절 한 동료가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냐, 그렇게 일하면 건강만 버린다며 적당히 일할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요. 저자는 그 말을 들은 뒤 자기 일의 원동력이 돈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고 쓰고 넘어갑니다. 건강만 버린다는 지적 자체에는 응답이 없었어요. 헌신의 강도를 성장의 조건으로 놓는 서술이 요즘의 노동 감각과 어디까지 나란히 갈 수 있을지, 그 대목에서 잠깐 걸음이 멈췄습니다. 신뢰를 깨는 태도는 교육이 아닌 배제의 대상이라는 단언도 방향으로는 옳지만, 인사권이 없는 중간 자리에서 실제로 얼마나 실행 가능한 조언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 책을 덮을 때 남는 것은 압박감이 아닙니다. 저자가 앞머리에 적어 둔 문장처럼, 남들보다 더 많이 헤매고 처절하게 넘어져 본 사람이 길목마다 표지판을 세워 둔 느낌에 가깝습니다. 신뢰의 첫 단추가 거창한 성과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마무리에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동료들의 기억에 "저 친구는 적어도 자기 몫은 해낸다"는 증거로 남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하거든요. 이 정도의 출발선이라면 지금 어느 계단에 서 있든 다시 밟아 볼 수 있겠습니다. 후배에게 무엇을 어디서부터 알려 줘야 할지 막막했던 분들이라면 앞쪽 두 계단을 특히 천천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조직에서 사람 문제로 소진된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신뢰를 다룬 장부터 펼쳐도 좋을 것 같아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완독이 목표가 되는 순간이 오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읽는 속도를 늦추게 됐습니다. 단숨에 읽지 말라던 저자의 부탁을 지키고 싶어서였고, 실제로 그렇게 읽어야 남는 종류의 도서였습니다. 다 읽고 덮어 버릴 한 권이 아니라 책상 옆에 두고 한 달에 한 번 펼칠 자료로 남겨 두려 합니다.


처서를 앞둔 며칠, 낮의 열기는 여전한데 저녁 공기에서는 확실히 결이 달라진 것이 느껴집니다. 한 해의 절반을 넘긴 시점에 남은 넉 달을 어떻게 쓸지 정리하기에 나쁘지 않은 계절이에요. 하반기 목표를 다시 적어 보려는 분들에게, 여섯 가지 질문이 적힌 이 안내서가 조용한 동행이 되어 줄 것 같습니다.


사수 없이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에게, 지름길 대신 계단의 위치를 알려 주는 488쪽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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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 오리지널 주니어 스토리북 ㅣ 케이팝 데몬 헌터스 공식 시리즈
서울문화사 편집부 엮음 / 서울문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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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하드커버라 무게를 좀 각오했는데, 손에 올려 보니 두께가 딱 알맞습니다. 아이가 혼자 들고 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예요. 그리고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이 한 장에 이야기가 거의 다 들어 있어요.


보랏빛으로 물든 서울의 밤, 오른쪽 끝에 작게 선 남산 타워, 그 앞을 채운 대형 전광판. 화면 안에는 무대용 얼굴을 한 세 사람이 있고, 화면 밑 실제 바닥에는 검은 전투복을 입고 무기를 든 같은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서 있습니다. 위쪽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 아래쪽은 밤이 되면 감당해야 하는 몫. 한 장면을 위아래로 나눠 놓은 이 구성이 마음에 들었어요. 맨 아래 어둠 속에 웅크린 악귀들까지 눈에 들어오면, 빛과 그늘이 늘 붙어 다닌다는 것도 함께 전해집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오리지널 주니어 스토리북>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을 어린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산문으로 옮긴 책입니다. 헌트릭스는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아이돌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넘보는 악귀와 맞서는 헌터예요. 노래와 춤이 곧 무기인 이들 앞에 사자 보이즈라는 악귀 아이돌 그룹이 나타나고, 팬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혼문의 힘이 흔들립니다. 싸움의 승패가 무기의 성능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으로 결정된다는 설정이 참 좋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이미 봤습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글로 옮기면 그 소리와 속도가 빠져 심심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읽어 보니 다른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화면에서는 음악과 화면 전환에 실려 흘러갔던 대사와 표정이, 문장 안에서는 제자리를 얻습니다. 무대 장면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그 곡이 저절로 재생되고, 가사의 뜻이 오히려 또렷해졌어요. 팬이라면 이 겹쳐 읽기가 꽤 반가울 겁니다.


가장 오래 눌러 앉게 된 쪽은 루미입니다. 무대에서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서 있어야 하고, 정작 자기 안에 있는 것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상태. 아이들이 읽는 판타지의 문법 안에 담겨 있지만, 사십 대 후반의 독자가 읽으면 판타지의 옷이 벗겨집니다. 맡은 자리에서 멀쩡한 표정을 유지하는 일, 그 아래로 삼켜 둔 것을 혼자 감당하는 일. 어지간한 어른이라면 겪어 봤을 시간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결국 도착하는 지점이 오래 남습니다. 감춘 것을 드러냈을 때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자리를 함께 받아 주었다는 결말. 어린 독자에게는 용기의 이야기로 읽힐 테고, 어른에게는 조용한 위로로 남을 겁니다.


홍보 이미지에 실린 "팬들이 좋으면 혼문도 좋다!"라는 문구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유쾌한 농담으로 읽었어요.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이 말이 작품의 심장에 가깝습니다. 세상을 막아 주는 벽이 결국 나를 향한 누군가의 마음으로 세워진다는 이야기니까요. 친구를 지키고, 세상을 구하고,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는 순서로 이 여정을 요약할 수 있겠는데, 저는 맨 마지막 것이 앞의 둘을 가능하게 했다고 봅니다.


컬러 화보 열여섯 페이지도 좋았습니다. 좋아하던 장면이 종이 위에 크게 인쇄되어 있으면, 그때 느낀 것이 되살아납니다. 화면은 흘러가 버리는데 인쇄된 장면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을 소장하고 싶은 팬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알겠더군요.



책과 좀 멀어진 아이에게 권하기에 이보다 좋은 통로도 흔치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이미 있으면 문장을 읽어 내는 힘도 붙거든요. 애니메이션을 안 본 사람에게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고, 여러 번 본 사람에게는 되새기는 시간이 됩니다. 어른이 먼저 읽고 슬쩍 건네는 방식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이가 요즘 무엇에 빠져 있는지 알고 싶은데 대화의 실마리가 마땅치 않은 집이라면, 같이 읽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시작될 겁니다.


서평단으로 받는 책들은 대개 무게가 있는 편인데, 이렇게 밝고 힘 있는 이야기가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날은 결이 확 달라집니다. 아이들 책을 읽는 시간이 어른에게도 회복이 된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확인했어요.


여름이 마지막 힘을 쓰는 8월 중순입니다. 창을 열면 뜨거운 공기가 먼저 들어오는 시기인데, 이런 날에는 이렇게 반짝이는 한 권이 잘 넘어갑니다. 조금 뒤면 아침 공기가 서늘해질 텐데, 그 전에 좋아하는 세계 하나를 문장으로 다시 만나 보는 것도 괜찮은 여름의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화면으로 사랑받은 이야기가 문장으로 자리를 옮겨, 감춘 것을 드러낼 용기와 그 곁을 지켜 주는 마음까지 어린 독자와 어른 독자 모두에게 건네주는 스토리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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