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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7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의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유명 에이전트가 다섯 살 몰리에게 춤추는 게 좋으냐고 묻고, 돈을 받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아이는 둘 다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엄마 페이는 생각해요. 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몰리는 분명 초콜릿 아이스크림 정도를 생각했을 테니까. 아이의 동의는 이렇게 받아졌고, 계약은 어른들 사이에서 성립됩니다.

몇 장 넘기면 에이전트가 광고 단가를 부릅니다. 1년쯤 지나면 한 편에 5만 달러 이상이 될 거라는 말에 페이의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그때 나오는 문장이 「정말 많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는 돈이다」예요. 조금 전에 딸을 두고 했던 계산이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어른의 상상도 결국 같은 크기였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 반복이 이 소설 전체의 설계도라고 봤습니다.
수잰 레드펀의 이 장편은 남편이 사라진 뒤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서른두 살 페이 마틴의 이야기입니다. LA 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막내 몰리의 탭 댄스 영상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가족은 하루아침에 할리우드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656면이라 손에 쥐면 묵직하지만 챕터가 짧아 속도는 붙는 편이에요. 저는 일부러 천천히 읽었습니다. 사건만 따라가면 놓치는 문장이 많은 책이라서요.
페이가 계약에 다가가는 이유가 허영이 아니라는 점을 눌러 두고 싶습니다. 큰돈이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 그가 떠올리는 목록의 첫 항목은 아들 탐의 상담 치료비입니다. 그다음이 빚, 그다음이 낡은 차 수리예요. 이 순서에 페이라는 사람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에이전트가 결혼했느냐고 묻고, 페이는 남편이 다섯 달 전에 사라졌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면서 없는 삶이 그려지는 순간이죠. 남편도 관여하느냐는 물음에는 「아뇨. 저뿐이에요」라고 답하고, 곧 이런 문장이 붙습니다. 지난 12년간의 결혼 생활이 더 정확하게 요약되는 순간이라고요. 이 한 줄에서 저는 이 소설이 연예계 이야기만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가족이 무너지는 방식도 자극적이지 않게 쓰였습니다. 중반쯤에 사라졌던 남편 션이 돌아오는데, 문제가 닥쳤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야 슈퍼히어로처럼 등장한다는 서술로 그 사람을 한 줄에 정리해 버립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달려가고, 열두 살 에밀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새 옷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옷을 더 잘 입어야 한다고요. 상처에서 배운 것이 고작 이런 거냐는 페이의 반응이 아팠습니다. 결국 남편은 새로 산 컨버터블에 아이들을 태우고 떠나고, 페이는 여행 가방과 함께 주차장에 남습니다. 그 뒤로 할 일 목록에 적어 둔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전화하기 항목의 밑줄이 세 번에서 여섯 번으로 늘어납니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밑줄 개수만 세는 방식이 오히려 세게 읽혔어요.
책의 뒤쪽으로 가면 페이는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다른 아역의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딸이 열세 살 때 겪은 일을 두고 페이가 그것은 범죄라고 말하자, 그 어머니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부르겠죠」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페이를 정면으로 봅니다. 우리는 둘 다 좋은 인생과 미래를 위해서 딸들을 팔아넘긴 것이고, 차이가 있다면 자기는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는 거라고요. 아이 치료비를 먼저 떠올렸던 선한 동기가 이 논리 안에서 변명으로 흡수됩니다. 이 대면 장면이 이 소설에서 가장 서늘한 자리였습니다.

더 오래 남은 것은 그다음입니다. 몰리는 이미 몸이 상했고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상태예요. 그런데 아이 주변의 어른들이 하나같이 같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에이전트는 수익을 계산하고, 프로듀서는 통제를 놓지 않으려 하고, 페이가 마음을 준 남자마저 「그만둬서는 안 돼요」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그만두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나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만뒀어요. 촬영 중간이었다면 절대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라는 답이 돌아오고요.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매달려 있으니 한 아이의 사정으로 멈출 수는 없다는 논리인데, 로맨스로 보였던 축이 여기서 조용히 정체를 드러냅니다. 페이는 그를 할리우드라는 종교의 신자로 정리합니다. 그 표현이 과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앞에서 근거를 쌓아 둔 소설이에요.
다만 걸린 대목도 있습니다. 페이가 총을 든 스토커에게 협박당한 일을 회상하면서, 그 청년은 악당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어린 사람일 뿐이었다고 연민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문장으로 자기 처지와 겹쳐 놓기까지 하고요. 인물의 심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아이를 향한 실제 위협을 그렇게 부드럽게 감싸도 괜찮은지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페이의 판단력이 흔들린다는 걸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해도, 이 소설이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단호했던 만큼 이 자리에서만 초점이 흐려진 인상을 받았어요. 결말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표지에 별 스티커로 얼굴이 덮인 그 아이의 사진이 왜 하필 그렇게 디자인됐는지는 알게 됩니다.

번역에 대해서도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오래된 시리얼 광고 문구나 흘러간 영화의 대사처럼 미국 독자에게만 자연스러운 표현마다 옮긴이 주가 붙어 있습니다. 농담의 온도까지 넘기려 한 흔적이라 반가웠어요.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사정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아이 얼굴이 부모 계정에 매일 올라가고 조회수가 곧 기회가 되는 일이 우리 쪽에서도 낯설지 않으니까요. 자녀의 재능을 어디까지 밀어줘야 하는지 고민해 본 분이라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 것이고, 화려한 세계의 뒷면이 궁금해 집어든 독자에게도 값은 충분합니다. 대신 아동 착취를 정면으로 다루는 구간이 있어서, 가볍게 쉬어 갈 소설을 찾는 분께는 권하기 조심스럽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정보로 남는 책과 질문으로 남는 책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확실히 뒤쪽이었습니다.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속물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그 마음의 값을 누가 치르는지는 끝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보여 주거든요.
처서를 지나 저녁 공기가 먼저 바뀌는 시기입니다. 매미 소리가 옅어지고 해가 조금씩 짧아지는 이맘때가, 두툼한 소설 한 권을 천천히 붙들기에는 알맞은 것 같아요. 책의 끝자락에 나오는 말처럼 이 세계는 사람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들고, 하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회사든 무엇이든 오래 몸담은 판이 사람을 어떤 쪽으로 바꿔 놓았는지, 이 나이가 되면 대충 짐작이 갑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짐작이 조금 더 선명해졌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진 뒤에 벌어지는 일을 656면 내내 정직하게 따라가는, 빠르지만 얕지 않은 할리우드 가족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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