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나에게, 고전이 말했다 - 하루 한 문장, 읽고 쓰는 동양 고전 수업
오평선 지음 / 이너북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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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책입니다. 화면의 절반 가까이가 옅은 하늘빛으로 비어 있고, 오른쪽 위에 주황 해가 크게 걸려 있습니다. 흩어져 날아가는 새떼 아래, 물가 끝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주 작게 앉아 있고요. 그 작은 형상이 오히려 그림 전체의 무게를 잡습니다. 흔들린다는 제목과 가만히 앉아 있는 자세가 한 화면에 같이 놓여 있는 셈인데,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보니 이 구도가 우연이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오평선 작가의 <흔들리는 나에게, 고전이 말했다>는 주역과 논어, 맹자, 도덕경, 장자 같은 동양 고전에서 문장을 골라 오늘의 질문 앞에 놓아 둔 책입니다. 특이한 점은 목차입니다. 고전 원문이 아니라 "비교하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일은 많은데 내 삶은 사라진 것 같을 때"처럼 생활의 말로 꼭지 제목이 붙어 있어요. 읽는 사람 쪽에서 먼저 질문을 꺼내 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오래된 문장을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판형도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라 손에 편하게 잡히고요.


구성은 꼭지마다 일정합니다. 제목이 나오고, 우리말로 풀어 쓴 문장이 먼저 놓이고, 그 아래 한자 원문과 독음, 출처가 따라옵니다. 해설이 서너 쪽 이어진 뒤에는 질문 하나와 필사 라인이 기다립니다. 매일 한 꼭지씩 천천히 가져가라는 설계로 읽혔어요.


첫 장에 실린 주역의 문장이 이 책 전체의 뼈대 같았습니다. 한 번은 음이었다 한 번은 양이었다 하는 것을 도라 이른다는 대목인데, 저자는 도를 멈춤이 아닌 흐름으로 읽습니다. 밝고 드러나고 인정받는 시기만 값지게 여기는 습관을 조용히 건드리면서, 반대편의 시간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요.


"우리들의 인생은 결코 앞으로 나아가는 시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내놓는 해석이 꽤 단단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리막을 실패로 옮겨 적어 버리는데, 도의 관점에서 보면 내리막은 방향을 바꾸는 순간일 뿐이라는 것이죠. 오르막이 길어지면 숨이 가빠지니 내리막이 호흡을 고르게 해 준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성과로 스스로를 증명해 온 사람일수록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일 텐데, 그래서 더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장을 닫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지금 당신이 인생의 어떠한 명암의 순간에 서 있든 괜찮다, 다 괜찮다." 쉼표 하나를 두고 같은 말을 한 번 더 얹은 그 자리에서 저자의 온도가 느껴집니다.


책 곳곳에 텃밭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씨 뿌리고 싹 틔우는 일만 농사가 아니고, 흙을 고르고 거름을 만들고 땅을 쉬게 하는 오랜 시간이 쌓여야 다음 계절의 생명이 자란다는 서술이 나옵니다. 저자가 실제로 작은 밭을 가꾸는 사람이라 그런지 비유가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 같지 않고요.


자연과 순리를 다룬 장에서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기에 배추와 무를 모두 뽑고 밭을 비우는 장면으로 글이 시작됩니다. 밭이 비었으니 이제 흙이 쉴 차례라는 것이죠. 여기서 저자는 자신을 돌보는 일을 지혜로운 행동 쪽으로 옮겨 놓습니다. 근거로 삼는 문장이 담백해요. "충전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위로할 힘이 없다." 누군가를 챙기는 자리에 오래 서 있던 사람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마음이 조금 풀릴 겁니다. 이 꼭지의 마지막 줄이 특히 좋았습니다. "하늘이 그랬고, 땅이 그랬고, 바람이 그러했다." 설명을 더 붙이지 않고 거기서 멈추는 감각이 고전을 다루는 책답습니다. 이어지는 필사면의 질문은 "나는 나에게 맞는 일과 쉼을 조화롭게 실천하고 있을까?"인데, 답을 적기 전에 펜을 든 채 가만히 있게 되더군요.


뒤쪽 도전과 용기를 다룬 장에서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쁨보다 어려움이 많았던 긴 회사 생활을 마치고 새 길로 옮겼지만 그 길이 과거와 무관하지 않았고, 그때 쌓은 경험이 지금 하는 일을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그 흔적은 짐이 아니라 자산이다"라고 적어요. 인생 후반을 두고 망설이는 마음의 정체를 저자는 처음부터 전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진단하는데, 저는 이 진단이 정확하다고 봤습니다. 삶은 새로 시작되는 것이라기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쓰며 더 깊어지는 쪽으로 이어진다는 것, 마흔 후반쯤 되면 이 말이 위로이면서 동시에 숙제처럼 들립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빠르게 읽고 빠르게 정리하는 습관이 붙는데, 이 한 권은 그 속도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한 꼭지가 짧은데도 다음 장으로 바로 넘어가지지 않아서, 결국 하루에 한두 꼭지씩만 떼어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라고 만든 책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고요.


고전 해설서로서의 깊이를 기대한다면 다소 얕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원문의 맥락이나 주석을 파고드는 책은 아니니까요. 대신 하루가 잘 풀리지 않은 저녁에 아무 데나 펼쳐도 문장 하나쯤은 건져 올릴 수 있는 종류의 책입니다. 방향을 잃은 것 같은 시기를 지나는 분, 회사 안에서 소진되어 가는 느낌을 오래 안고 있는 분이라면 특히요. 쉰을 앞두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헤아려 보는 자리에서도 꺼내 볼 만합니다.


9월도 중순으로 들어섰습니다.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고, 낮의 열기도 한 겹씩 물러나고 있어요. 이 책 여섯 번째 장에는 내 인생에도 가을이 와주기를 바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밭을 비우고 흙을 쉬게 하는 계절이 책 속에서는 조금 앞서 와 있는데, 창밖의 계절이 그쪽으로 가는 중이라 읽는 감각이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올여름 어지간히 지쳐 계셨다면, 이 가을에는 스스로를 조금 쉬게 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빛나지 않는 시간까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해 주는, 천천히 읽고 따라 쓰는 동양 고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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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빈틈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혁 지음 / 새벽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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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제목을 한동안 눈으로 따라 읽었습니다. '빈틈없이'라는 말은 보통 일 처리나 계획에 붙는 단어인데, 이 책에서는 행복 앞에 놓여 있어요. 빠짐없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도 읽히고, 틈이 생기더라도 그 틈까지 챙기라는 당부로도 읽힙니다. 이혁 작가의 첫 에세이 <나는 당신이 빈틈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는 그 제목이 품은 마음을 백 편 가까운 짧은 글로 나눠 담았습니다.


판형이 손바닥에 들어오는 정도라 두께에 부담이 없습니다. 한 편이 두세 쪽에서 끝나니 목차 순서를 지키지 않고 그날 눈에 걸리는 제목부터 펼쳐도 흐름이 끊기지 않아요. 표지도 잠깐 이야기해두고 싶습니다. 분홍과 노랑, 옅은 파랑이 서로 번지듯 섞인 둥근 덩이들이 위아래로 놓여 있는데, 색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고 스며듭니다. 딱 떨어지는 결론을 내주는 책은 아니겠다는 예감이 들었고, 읽어보니 실제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1부의 첫 글은 '사랑하는 사람과 낭비한 시간'입니다. 주말에 만나 침대에서 뒹굴며 예능을 보고, 졸음이 오면 잠깐 눈을 붙이고, 배가 고파지면 배달을 시켜 먹었던 하루를 적어둔 글이에요. 계획도 없었고 남에게 보여줄 결과물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정으로 꽉 채웠던 주말보다 그 나른한 오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고 해요. 발가락으로 서로를 툭 건드리던 순간, 늦잠을 자고 시계를 보며 함께 허탈하게 웃던 시간 같은 장면들이 근거로 놓입니다. 진짜 행복은 "별일 없는 하루를 별 탈 없이 보내는 순간에 깃들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이 책 전체의 방향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2부에서 걸음이 늦어진 글은 '웃는 얼굴 뒤에 숨겨 둔 각자의 사정'이었어요. 이별을 예감한 날, 눈물을 참으며 할 일을 하러 나갔더니 주변 사람들은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 부럽고 외로웠다는 대목이 솔직합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 웃음 뒤편에도 저마다의 상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지인은 부모님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누군가는 오래된 연인과 파혼한 상태였다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작가는 사람을 빙산에 견줍니다. 물 위로 드러난 부분보다 잠긴 쪽이 훨씬 크다는 그 비유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서로 묻지 않고 넘어가게 되는 사정들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글은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 뒤에 숨겨 둔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습니다"로 닫힙니다.


3부의 '관계는 생활이고 행복은 그 안에 있다'는 산문이 아니라 행을 끊은 시 형태입니다. 매일 보는 편의점 직원의 인사, 단골 커피집 직원이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봐 주는 미소, 별것 아닌 말에도 크게 웃어주는 동료가 차례로 놓여요. 우리는 누구나 대단한 관계를 바라지만 정작 일상을 채우는 것은 주고받는 짧은 인사와 서툴지만 진심 어린 배려, 같이 울지는 못해도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적습니다. 앞의 빙산 이야기와 나란히 놓고 보면 이 대목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서로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으니, 알지 못한 채 건네는 짧은 인사가 오히려 값진 것이 되겠지요.


책의 뒤쪽으로 갈수록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조금 더 단단해집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에서는 궁금해하는 마음이나 이해하려는 태도만으로는 모자라고, 상대가 살아온 방식과 지금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닿아야 한다고 말해요. "말로는 쉽게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실체로는 썩 복잡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다"라는 문장이 특히 그렇습니다. 미워지는 순간과 실망까지 인정한 다음에야 나오는 이야기라서 위로가 헐겁지 않습니다. 오래된 안 좋은 습관까지 포함해서 사랑하는 일에 가깝다는 정의는, 결혼 생활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표현만 다르게 알고 있을 내용일 겁니다.


물론 아쉬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글마다 어투가 갈립니다. 존댓말로 쓴 산문이 있고, 반말로 편지처럼 쓴 글이 있고, 행을 끊은 시가 섞여 있어요. '당신을 사랑했던 내가 참 예뻤다'처럼 반말로 쓰인 글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데("네가 몰라 줘도 괜찮아. 네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앞뒤 글과 목소리가 달라 한 권으로 묶였을 때 결이 조금 흔들립니다. 비유가 물의 이미지에 몰려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빙산, 파도, 모래성, 노을 내려앉는 바닷가, 등대까지 이어지니 인상이 겹치는 순간이 생겨요. 다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종류가 아니라 아무 데나 펼치는 쓰임에 가깝고, 그렇게 읽으면 단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은 대개 정보나 주장을 담고 있어서 읽고 정리하는 일이 먼저인데, 이번 한 권은 그런 순서가 잘 맞지 않았어요. 밑줄을 긋고 요약하려 들면 남는 게 적고, 그냥 문장을 지나가게 두면 남는 게 있습니다. 미뤄둔 안부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정도가 이 책의 실제 크기이고, 그만큼이 필요한 시기가 살면서 몇 번은 오는 것 같습니다.


9월로 들어서니 낮의 열기는 아직 남았는데 아침 공기가 하루하루 가벼워집니다. 여름을 어떻게든 통과했다는 안도가 옅게 도는 계절이고요. 이런 무렵에 잘 어울리는 책입니다. 무언가를 해내라고 요구하지 않고, 잘 버텼으니 이제 조금 웃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쪽이니까요. 오늘 안부를 묻고 싶은 이름이 떠올랐다면, 그 사람에게 한 권 건네도 좋을 것 같습니다.


행복을 다음으로 미루는 습관에 조용히 제동을 걸어주는, 짧고 다정한 문장들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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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언어 - 평범한 생각을 비범한 기획으로 바꾸는 말의 힘
편은지 지음 / 빌리버튼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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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뇌 정지, 호흡 곤란, 혈압 상승, 식폭행. 예능 화면을 지나가는 자막으로 익숙한 말들입니다. 짧고 세고, 시선을 붙잡는 힘도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기획자의 언어>를 쓴 13년 차 PD는 자신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에서 저 자막들을 쓰지 않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대단한 신념 선언처럼 굴지 않고 그저 이유만 담백하게 붙여 놓았어요. 저 문구 앞에서 웃을 수 없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고, 그럴 때는 시선을 잡을 수 있더라도 기꺼이 포기한다고요. 자막 한 줄을 두고 이런 셈을 하는 사람이 방송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책을 쓴 편은지 PD는 <살림하는 남자들2>의 메인 연출을 맡아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상을 받은 분입니다. 표지 띠지에는 나영석 PD의 "자기만의 언어를 찾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라는 문구가 실려 있고, 홍진경, 박서진, 지상렬의 추천도 함께 적혀 있어요.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판형과 두께가 부담 없는 편이라 며칠에 걸쳐 천천히 넘겨도 흐름이 끊기지 않았습니다.


표지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어요. 노랑과 파랑이 서로에게 스며든 동그라미가 위아래로 여섯 개 놓여 있는데, 어느 것도 경계가 또렷하지 않습니다. 같은 물감으로 그렸는데 번진 모양은 다 다른 셈이죠. 표지에 적힌 부제는 평범한 생각을 비범한 기획으로 바꾸는 말의 힘인데, 그 문장보다 흐릿한 원들이 책의 내용을 더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앞쪽에서 저자는 <살림남>이 섭외가 힘든 프로그램이라고 털어놓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서, 그 자리에서는 자랑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집이나 차나 소비를 보여 주는 자리가 아니고 그 사람이 감추려는 결핍과 불안을 들여다보는 자리라서, 기대를 안고 미팅에 온 사람 열 명 중 아홉 명이 기획 의도를 듣고 크게 실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개 자기는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강조한다는 관찰이 뒤따르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없는 쪽으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저자는 여기서 방향을 틉니다. 행복은 천편일률적이지만 결핍은 독창적이며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라고요.


뒤이어 나오는 사례 하나가 오래 남았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카톡 대화 내역은 공개해도 챗GPT 대화 내역은 절대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는 이야기예요. 그 안에 든 것은 기밀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의 하소연이고, 강해 보이고 싶은 의도와 정반대인 연약한 언어라는 해석이 붙습니다. 암 투병 중인 친구가 AI와 밤새 대화하며 위로를 받았다는 일화도 함께 실려 있는데, 저자는 그 풍경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친구인 자신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불안을 기계가 가만히 들어주었다고만 적어 두었어요.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그 태도가 이 책 전체의 결을 만든다고 봅니다. 결핍은 숨겨 둘 때만 약점으로 남고, 알맞게 꺼내 놓는 순간 그 사람만의 이야기로 바뀐다는 문장도 이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중반부에서는 화술과 독심술을 갈라 놓습니다. 기획은 아무 말 안 해도 이것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상대를 꿰뚫어 보는 영역인데, 사람들은 기획자가 외향적인 사람에게 맞는 일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획이라는 두 글자가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회의실에서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장면을 오래 봐 온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다르게 읽힐 겁니다. 저자는 화술이 전달의 기술이라면 독심술은 발견의 기술이다라고 정리하고, 중요한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능력이 아니라 남들이 지나치는 마음을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못 박습니다. 어르신들이 곧잘 하시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곧 가야지라는 말이 실은 나를 더 잘 챙겨달라는 뜻이라는 예시도 여기에 붙어 있어요. 이 한 줄 앞에서 생각이 길어졌습니다.


같은 장에 가수 박서진 섭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디어로 접한 그는 분명 효자였지만, 직접 만난 그의 말은 세상이 정해 둔 효자의 언어와 상반됐다고 해요. 편찮으신 부모님이 아프다는 사실을 숨긴 채 몰래 큰 수술을 하신 일에 격앙되어, 나중에 영정 사진 앞에서 만나라는 거냐는 말까지 가감 없이 내뱉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거기서 나약한 인간이자 아들로서의 피로감을 발견했다고 씁니다. 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깊이 사랑해왔기에 생긴 정서적 피로라고요. 효자도 지친다, 지치면 짜증 나고 화가 난다는 문장이 담담하게 이어지는데, 부모님 연세가 있는 세대라면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방송에서 그 거친 말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저자가 적어 둔 점이 좋았어요.


책의 끝자락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안쪽을 향합니다. 기획한다는 것은 소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배제한다는 말과도 같아서, 기획자는 태생적으로 가슴 한쪽에 부채감을 안고 산다는 것이죠. 잘될 일보다 안 될 일, 타인에게 불편을 끼칠지도 모르는 일, 그로 인해 비방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먼저 와야 한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한국 예능에 자막을 처음 들여왔을 때 우리가 청각 장애인이냐는 항의가 폭주했다는 일화도 저자가 여기에 소개해 두었어요. 새로운 시도가 곧 환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예가 드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한 번 더 시선을 낮춥니다. 질타라도 받는 결과물은 운이 좋은 편이고, 환호도 불만도 받지 못한 채 사장된 무색무취형 기획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고요. 성공담을 앞세우는 기획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문장이었습니다.


물론 읽으면서 걸리는 데도 있었습니다. 조용한 관찰자가 기획에 강하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수긍하는데, 그 근거를 MBTI의 내향과 외향에 기대는 방식은 조금 헐거워 보였어요. 유형 하나를 빌리지 않아도 책 안에 이미 사례가 넉넉하니까요. 다른 하나는 더 현실적인 물음입니다. 뜨거운 자막을 접고 미지근한 쪽을 골랐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시청률로 평가받는 조직 안에서 그 선택을 어떻게 지켜냈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개인의 양심 문제로만 남겨 두면 같은 갈등을 겪는 독자에게는 답이 되기 어렵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도 이 책이 오래 붙잡아 두는 자리는 분명합니다. 정리 지면에 놓인 문장을 옮겨 보면, 기획은 곧 선택이다. 그 선택으로 누군가를 비춘 만큼, 더 많은 이들을 그림자로 밀어낸다. 빛을 볼 사람보다 끝내 호명되지 못할 이들을 먼저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뒤에 붙어 있습니다. 실은 기획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자리에 잠깐이라도 앉아 본 사람이라면, 그 결정 밖으로 밀려난 얼굴을 떠올려 본 적이 있을 테니까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 왔지만, 일하는 사람의 태도를 이렇게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세워 주는 도서는 흔치 않았습니다. 말 잘하는 재주가 없어서 기획 쪽은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접어 둔 분이 있다면 이 한 권이 꽤 든든한 편이 되어 줄 것 같고, 유튜브나 블로그로 자기 콘텐츠를 만드는 분에게도 얻어 갈 대목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말 뒤편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됐어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온도가 눅어지는 요즘, 이런 두께의 책이 손에 잡히면 며칠이 편안해집니다. 여름 내내 시끄러웠던 말들을 조금 걷어내고 조용한 언어 쪽으로 마음을 옮겨 보기에 좋은 계절이기도 하고요. 창밖으로 잎 그림자가 흔들리는 오후에, 표지의 번진 원들을 한 번 더 들여다봤습니다.


화려한 말솜씨보다 남들이 지나친 마음을 알아보는 눈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을, 예능 현장의 언어로 조용히 증명해 보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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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는 뇌 - 오늘의 선택을 내일의 자산으로 만드는 생각법
가미오카 마사아키 지음, 류두진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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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이 도착했을 때 먼저 손에 닿은 감각은 가벼움이었습니다. 가방 옆주머니에 꽂고 다니며 틈틈이 펼치기에 알맞습니다. 저자도 그 점을 계산해 둔 듯합니다. 앞부분에 "2시간 반이 지나면 여러분은 '부자의 뇌'를 얻을 것이다"라고 적어 두었으니까요. 돈과 투자를 다루는 책이 이렇게 얇아도 되는가 하는 의심이 잠깐 들었는데, 마지막 장을 넘긴 뒤에는 그 얇음이 설계였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습니다.


표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흰 바닥 위로 금빛 캔들차트가 나무 모양으로 뻗어 올라갑니다. 오르내림을 기록하는 봉들이 가지가 되고 잎이 되어 한 그루를 이루는 그림이에요. 하단 검은 띠에 적힌 문장은 이렇습니다. "자신을 최고의 상태로 이끌기 위한 사고법, 그것이 바로 '투자 뇌'다." 종목 고르는 법을 알려 주는 안내서가 아니라는 예고를 표지에서 이미 하고 있는 셈입니다.



<투자하는 뇌>의 뼈대는 단순합니다. 돈이 모이지 않는 원인을 월급의 크기나 종잣돈의 유무에서 찾지 않고, 사고 습관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소비 뇌와 투자 뇌를 갈라 놓고, 두뇌와 경험과 금융이라는 세 갈래 자산을 함께 세라고 권합니다. 눈에 보이는 투자 손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회 손실을 더 무겁게 계산하라는 관점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고요.


이 도서에서 가장 먼저 마음이 풀린 대목은 뜻밖에도 뇌과학 이야기가 나오는 챕터였습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기술이나 경험의 부족이 아니라 특정한 사고 습관에 있다고 짚은 뒤, 저자는 이렇게 씁니다. "딱히 그 사람이 겁이 많다든가 인간적으로 뒤떨어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사바나의 유인원은 사냥하는 쪽보다 사냥당하는 쪽이었으니 조심성 많은 개체가 살아남았고, 그 흔적이 현상 유지 편향으로 남아 있다는 설명이 따라붙습니다. 새로운 일 앞에서 자꾸 멈춰 서는 마음을 나무라지 않고 구조로 설명해 주는 문장이라, 시작하는 페이지치고는 결이 무척 따뜻했어요.


그다음 챕터에서 저자는 루틴을 일부러 무너뜨려 보라고 권합니다.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이는 내적 요인과 배움, 만남, 환경의 변화라는 외적 요인을 나눠 설명하는데, 예시로 자기 이야기를 꺼냅니다.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유튜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때까지는 일도 회사도 순조로웠고 새로운 일에 몰두할 여력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첫 3개월 동안 구독자가 500명도 늘지 않아 몇 번이나 좌절했다는 고백도 그대로 적혀 있고요. 성공한 사람의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다만 여기서 물음이 하나 생깁니다. 루틴을 스스로 흔들라고 권하면서, 정작 저자를 움직인 것은 외부에서 닥친 재난이었다고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아직 위기가 오지 않은 사람은 무엇으로 첫 발을 떼야 하는지, 그 답까지는 이 얇은 분량에 담기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책의 중반, 돈의 불안을 다루는 챕터가 이 나이대 독자에게는 가장 실감 나는 자리일 겁니다. 저자는 불안의 출처를 연금 문제에서 찾고, 해법을 통장 액수 늘리기에 두지 않습니다. 매달 흑자를 내는 점포를 현재 가치 그대로 파는 투자가는 없다는 예를 들면서, 개인의 기술과 경험도 향후 10년을 놓고 계산하면 현재 가치의 몇 배로 산출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경력이라는 진열대에 쌓아 올린 가치에 신경 쓴 적이 없어 스스로를 저평가해 온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쌓아 둔 경험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천재지변이 나도 어디로든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대목도 함께 붙어 있어요. 국민연금이며 노후 자금 계산기 앞에서 마음이 서늘해지는 시기에, 세는 항목이 하나 더 있다고 알려 주는 관점입니다.


물론 매끄럽게만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투자로 돌릴 돈이 없다는 흔한 반박을 저자는 낭비 재검토로 되돌립니다. 담배, 매주 비슷한 푸념을 나누는 술자리, 습관처럼 사 마시던 커피를 꼽으면서 3,000원짜리 한 잔이 월 9만 원, 1년이면 약 100만 원이라고 계산해 보이지요. 산수는 정확합니다. 다만 무엇이 낭비인지 가르는 기준은 저자의 것입니다. 같은 사람들과 오래 이어 온 술 한잔이 누군가에게는 관계라는 이름의 경험 자산일 수도 있으니까요. 책 뒤쪽에서 저자 스스로 사고 싶은 책이나 여행을 참으면 인생의 그릇이 작아진다고 말하는 만큼, 지출 목록에 선을 긋는 일은 결국 읽는 사람 몫으로 남습니다.


가장 의외였던 주장은 부자의 이미지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챕터였어요. 일하지 않고 남쪽 섬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그림은 정보를 팔기 좋게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저자는 단정합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직접 겨누며 그 방정식이 잘못되었다고까지 말하고요. 대신 내놓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부자에게는 '일하는 것 = 살아가는 것'이다." 이어지는 대목이 오래 남습니다. 인터넷과 전기, 수도와 가스가 누군가의 노동으로 뒷받침되고 있고 오늘 먹은 음식도 잠든 시간에 물건을 옮긴 이의 수고 덕분이니, 돈을 잘 벌려면 돈의 흐름을 지탱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조기 은퇴를 목표로 삼는 흐름과 부딪히는 주장이라 반발도 예상되지만, 정년을 셈해 보는 나이에는 다르게 읽힙니다. 지금 하는 일을 자산의 원천으로 다시 세워 주는 문장이니까요.


책의 끝자락, 목적 없이 흘려보낸 시간을 부채로 계상해 보라는 포인트에서 이 한 권의 결론이 드러납니다. 저자는 미니멀리즘이나 절약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과잉 소비에 거리를 두고 분수에 맞게 사는 것도 훌륭한 생각이라고 인정한 뒤, 이렇게 덧붙여요. "돈을 절약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소비를 최대한 줄여 무리하게 뭔가를 포기하거나, 사고 싶은 책이나 여행을 참거나, 투자해야 할 시점에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미룬다면 돈을 포함해 인생의 그릇 자체가 작아지고 만다." 어느 의사의 기록을 인용해, 삶의 끝에서 사람들이 가장 후회한 것은 주위의 시선이나 노후의 불안에 신경을 덜 쓰고 좋아하는 것을 해 둘 걸이었다고 전하는 대목도 나란히 놓입니다. 아끼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이 순서는 분명 위로가 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두툼한 분량에 비해 남는 문장이 적은 경우도 있는데, 이번 한 권은 반대였습니다. 얇아서 부담이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밑줄이 몰린 자리가 선명하게 남았어요. 통장 잔고보다 남은 시간이 더 신경 쓰이기 시작한 분이라면, 출퇴근길 며칠로 충분히 넘길 이 작은 판형이 꽤 오래 머물 겁니다. 반대로 종목 추천이나 구체적인 포트폴리오를 기대한다면 방향이 다른 책이니 참고하시고요.


9월로 넘어오니 아침 공기의 결이 달라졌습니다. 한 해의 4분의 3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남은 몇 달을 어디에 쓸지 헤아려 보게 되는 계절이에요.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를 앞으로도 생각해 달라는 저자의 마지막 당부가 이 시기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선선한 바람 아래 얇은 책 한 권을 들고 나서기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통장 잔고 대신 사고 습관과 쌓아 온 경험을 자산으로 다시 세어 보게 만드는, 가볍고 단단한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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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놓고 쉬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 노트
김은영 지음 / 심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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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필사책을 앞에 두고 처음 든 생각은 솔직히 회의 쪽에 가까웠습니다. 좋은 문장을 옮겨 적는 일이 지친 마음에 무슨 실효가 있을까 싶었고요. <마음 놓고 쉬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 노트>는 그 의심을 붙잡고 설득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자리를 하나 비워 둡니다.


표지가 이미 그렇게 생겼어요. 민트빛 하늘색 바탕에 노트처럼 얇은 괘선이 깔리고, 타원 액자 안에는 흰 커튼이 부푼 남유럽풍 테라스가 놓였습니다. 라탄 의자 두 개는 비어 있습니다. 누군가 편히 쉬는 장면을 그려 보여 주는 대신 앉을 자리만 마련해 둔 그림이라, 표지 아래쪽 "애쓰며 살아온 하루의 끝에 이 책을 펼쳐보세요"라는 문구가 과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첫 문장을 노자 <도덕경>에서 가져온 배치가 특히 좋았어요. 서른 개의 바큇살이 모인 바퀴통, 진흙으로 빚은 그릇, 문과 창을 뚫어 만든 방. 셋 다 가운데가 비어 있어서 쓰임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는 이 대목에 해설을 붙여, 휴식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다시 쓰임이 생길 공간을 만드는 시간이라고 정리해 둡니다. 쉬는 동안에도 못 끝낸 일이 따라붙는 사람에게 이 문장은 허락처럼 읽힐 겁니다.


바로 뒤에 소로의 <월든>이 옵니다. 여름날 문지방에 앉아 한낮까지 공상에 잠기던 시간을 회고하면서, 그 시간이 "나에게 할당된 생명의 시간을 초과해서 주어진 특별수당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쓴 대목이 있어요. 공제와 수당이라는 회계 용어를 빌려 게으름을 변호하는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오래 일해 온 사람이라면 이 단어들이 어떤 감각으로 몸에 붙어 있는지 알 테니까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칼 비유도 함께 놓고 읽을 만합니다. 플라스틱과 콘크리트, 유리와 돌까지 아무 때나 마구 자르면 날이 금세 무뎌지고, "반면에 나무를 자를 때 외엔 칼집에 꽂아두고 쉬게 하면, 이 칼은 제 역할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겠지.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앞의 <도덕경>이 비어 있음의 쓸모를 말한다면 이쪽은 마모와 관리를 말하는 셈인데, 두 갈래가 나란히 놓이니 쉬어야 하는 이유가 양쪽에서 받쳐집니다.


제니 오델의 지면에서는 기회를 놓치는 두려움을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으로 바꿔 상상해 보자는 제안이 나옵니다. 그것마저 불편하다면 가끔은 놓쳐야 할 필요성 정도로 낮춰 두자는 단서까지 붙어 있어요. 이 세심한 하향 조정이 저자가 진료실에서 만나 온 사람들의 성향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위로의 무게로 보면 나태주의 시가 실린 자리가 가장 조용하게 힘이 셌습니다. 견딜 수 없는 일까지 견뎠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고, 그렇다면 스스로를 나무라지 말고 오히려 칭찬하고 보듬어 껴안아줄 일이라는 연입니다.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는 구절이 시의 처음과 끝에 두 번 놓여 있는데, 옮겨 적다 보면 그 반복이 왜 필요한지 손이 먼저 알게 되는 것 같아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가 들어온 대목은 조금 다른 결입니다. 소녀가 달려가 품에 부딪히고 한참 안겨 있다가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지는 장면인데, 저자는 여기에 하인즈 코헛의 '자기대상' 개념을 붙여 사람은 평생 타인의 수용과 공감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회복이 혼자 애쓰는 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의 시야가 꽤 넓다고 보았습니다. 정약용이 글을 사탕수수처럼 즐기고 거문고를 감람나무 열매처럼 즐긴다고 적은 지면에 이르면, 자기돌봄이라는 요즘 말이 조선 문인의 담박한 취향과도 이어진다는 게 실감이 나고요.


물론 백 편을 한 지면씩 잘라 놓은 구성이라 아쉬운 자리도 있었습니다. 스탕달 <적과 흑>에서 가져온 대목이 그랬어요. 쥘리앵이 쓸쓸히 지낸 몇 주일을 뒤늦게 행복으로 기억한다는 인용인데, 원작에서 그 고독은 야망과 위선을 벼르는 준비 기간에 더 가깝습니다. 휴식의 문장으로 놓고 보면 결이 살짝 비껄어지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해설이 붙은 지면과 붙지 않은 지면이 섞여 있어서, 맥락을 알고 싶은 항목에서 안내가 끊기는 경우도 있었어요. 존 피치와 맥스 프렌젤의 <이토록 멋진 휴식>에서 옮겨 온 실천 예시 가운데 동료에게 걷기 회의를 제안하기 같은 항목은 우리 사무실 사정에 그대로 얹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같은 목록의 마지막 항목, 오늘 할 일을 못 마쳤더라도 하루 일정이 끝났음을 선포하기는 반대로 오래 남았습니다.


책의 물성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180도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판형이라 손으로 눌러 잡을 필요가 없고, 왼쪽 문장을 보면서 오른쪽에 바로 쓸 수 있어요. 종이는 무광 질감의 회백색 계열이라 잉크가 번지지 않고 획이 또렷하게 앉습니다. 지면 아래쪽 여백이 넉넉해서 답답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필사책은 사양이 곧 사용감이라, 이런 부분이 결국 끝까지 쓰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완독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도서가 대부분인데, 이 한 권은 그 다음이 남습니다. 읽었다는 사실보다 몇 문장을 손으로 지나 보냈는지가 기록으로 남는 방식이라 그렇습니다.


한여름의 열기가 빠지고 아침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섞이는 요즘이 이 책을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구성이 밤의 문장과 아침의 문장으로 갈라져 있어서, 해가 짧아지는 계절에는 하루의 끝에 놓인 문장들이 먼저 손에 잡힐 것 같아요. 백 편을 다 채울 욕심은 접어 두고, 저녁에 한 편씩 여백을 메워 가는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잘 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결국 서두르지 말라는 뜻일 테니까요.


쉬는 법을 잊은 사람에게, 좋은 문장을 손으로 옮기는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기 몫이라고 일러 주는 필사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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