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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놓고 쉬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 노트
김은영 지음 / 심심 / 2026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필사책을 앞에 두고 처음 든 생각은 솔직히 회의 쪽에 가까웠습니다. 좋은 문장을 옮겨 적는 일이 지친 마음에 무슨 실효가 있을까 싶었고요. <마음 놓고 쉬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 노트>는 그 의심을 붙잡고 설득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자리를 하나 비워 둡니다.
표지가 이미 그렇게 생겼어요. 민트빛 하늘색 바탕에 노트처럼 얇은 괘선이 깔리고, 타원 액자 안에는 흰 커튼이 부푼 남유럽풍 테라스가 놓였습니다. 라탄 의자 두 개는 비어 있습니다. 누군가 편히 쉬는 장면을 그려 보여 주는 대신 앉을 자리만 마련해 둔 그림이라, 표지 아래쪽 "애쓰며 살아온 하루의 끝에 이 책을 펼쳐보세요"라는 문구가 과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첫 문장을 노자 <도덕경>에서 가져온 배치가 특히 좋았어요. 서른 개의 바큇살이 모인 바퀴통, 진흙으로 빚은 그릇, 문과 창을 뚫어 만든 방. 셋 다 가운데가 비어 있어서 쓰임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는 이 대목에 해설을 붙여, 휴식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다시 쓰임이 생길 공간을 만드는 시간이라고 정리해 둡니다. 쉬는 동안에도 못 끝낸 일이 따라붙는 사람에게 이 문장은 허락처럼 읽힐 겁니다.
바로 뒤에 소로의 <월든>이 옵니다. 여름날 문지방에 앉아 한낮까지 공상에 잠기던 시간을 회고하면서, 그 시간이 "나에게 할당된 생명의 시간을 초과해서 주어진 특별수당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쓴 대목이 있어요. 공제와 수당이라는 회계 용어를 빌려 게으름을 변호하는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오래 일해 온 사람이라면 이 단어들이 어떤 감각으로 몸에 붙어 있는지 알 테니까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칼 비유도 함께 놓고 읽을 만합니다. 플라스틱과 콘크리트, 유리와 돌까지 아무 때나 마구 자르면 날이 금세 무뎌지고, "반면에 나무를 자를 때 외엔 칼집에 꽂아두고 쉬게 하면, 이 칼은 제 역할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겠지.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앞의 <도덕경>이 비어 있음의 쓸모를 말한다면 이쪽은 마모와 관리를 말하는 셈인데, 두 갈래가 나란히 놓이니 쉬어야 하는 이유가 양쪽에서 받쳐집니다.
제니 오델의 지면에서는 기회를 놓치는 두려움을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으로 바꿔 상상해 보자는 제안이 나옵니다. 그것마저 불편하다면 가끔은 놓쳐야 할 필요성 정도로 낮춰 두자는 단서까지 붙어 있어요. 이 세심한 하향 조정이 저자가 진료실에서 만나 온 사람들의 성향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위로의 무게로 보면 나태주의 시가 실린 자리가 가장 조용하게 힘이 셌습니다. 견딜 수 없는 일까지 견뎠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고, 그렇다면 스스로를 나무라지 말고 오히려 칭찬하고 보듬어 껴안아줄 일이라는 연입니다.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는 구절이 시의 처음과 끝에 두 번 놓여 있는데, 옮겨 적다 보면 그 반복이 왜 필요한지 손이 먼저 알게 되는 것 같아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가 들어온 대목은 조금 다른 결입니다. 소녀가 달려가 품에 부딪히고 한참 안겨 있다가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지는 장면인데, 저자는 여기에 하인즈 코헛의 '자기대상' 개념을 붙여 사람은 평생 타인의 수용과 공감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회복이 혼자 애쓰는 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의 시야가 꽤 넓다고 보았습니다. 정약용이 글을 사탕수수처럼 즐기고 거문고를 감람나무 열매처럼 즐긴다고 적은 지면에 이르면, 자기돌봄이라는 요즘 말이 조선 문인의 담박한 취향과도 이어진다는 게 실감이 나고요.

물론 백 편을 한 지면씩 잘라 놓은 구성이라 아쉬운 자리도 있었습니다. 스탕달 <적과 흑>에서 가져온 대목이 그랬어요. 쥘리앵이 쓸쓸히 지낸 몇 주일을 뒤늦게 행복으로 기억한다는 인용인데, 원작에서 그 고독은 야망과 위선을 벼르는 준비 기간에 더 가깝습니다. 휴식의 문장으로 놓고 보면 결이 살짝 비껄어지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해설이 붙은 지면과 붙지 않은 지면이 섞여 있어서, 맥락을 알고 싶은 항목에서 안내가 끊기는 경우도 있었어요. 존 피치와 맥스 프렌젤의 <이토록 멋진 휴식>에서 옮겨 온 실천 예시 가운데 동료에게 걷기 회의를 제안하기 같은 항목은 우리 사무실 사정에 그대로 얹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같은 목록의 마지막 항목, 오늘 할 일을 못 마쳤더라도 하루 일정이 끝났음을 선포하기는 반대로 오래 남았습니다.
책의 물성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180도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판형이라 손으로 눌러 잡을 필요가 없고, 왼쪽 문장을 보면서 오른쪽에 바로 쓸 수 있어요. 종이는 무광 질감의 회백색 계열이라 잉크가 번지지 않고 획이 또렷하게 앉습니다. 지면 아래쪽 여백이 넉넉해서 답답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필사책은 사양이 곧 사용감이라, 이런 부분이 결국 끝까지 쓰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완독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도서가 대부분인데, 이 한 권은 그 다음이 남습니다. 읽었다는 사실보다 몇 문장을 손으로 지나 보냈는지가 기록으로 남는 방식이라 그렇습니다.
한여름의 열기가 빠지고 아침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섞이는 요즘이 이 책을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구성이 밤의 문장과 아침의 문장으로 갈라져 있어서, 해가 짧아지는 계절에는 하루의 끝에 놓인 문장들이 먼저 손에 잡힐 것 같아요. 백 편을 다 채울 욕심은 접어 두고, 저녁에 한 편씩 여백을 메워 가는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잘 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결국 서두르지 말라는 뜻일 테니까요.
쉬는 법을 잊은 사람에게, 좋은 문장을 손으로 옮기는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기 몫이라고 일러 주는 필사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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