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 - 너는 느리게 걷는 아이, 나는 발맞춰 걷는 엄마
구하라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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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1월 첫 화요일이에요. 월요일은 어찌어찌 넘겼는데, 화요일은 이름부터 화끈하게 피곤한 날이라더군요.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첫째는 9개월에 걸었고 18개월에 첫 문장을 말했대요. 3년 뒤에 태어난 둘째는 16개월이 되어서야 겨우 첫걸음을 뗐고, 세 돌이 지나도록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고 하고요.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는 엄마의 그 혼잣말에서 출발하는 책입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주주맘'이라는 이름으로 인스타툰을 그리는 구하라 작가가, 말도 걸음도 느린 둘째를 키우며 지나온 시간을 만화와 글로 엮었어요. 표지에는 노을 지는 강변길을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걷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 한 장이 책 전체의 걸음걸이를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았어요.


첫 장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첫째를 키울 때 작가는 아이 발달을 걱정하는 엄마들한테 "곧 하겠죠, 기다리면 다~해요" 하고 웃으며 말해줬대요. 그리고 몇 년 뒤, 그 말을 둘째 앞에서 고스란히 되돌려 받습니다. 주변에서는 "엄마가 걸음마 연습 안 시켜주는 거 아냐?" 하고 수군거리고요. 회사에서도 남 일일 땐 "다 그렇게 배우는 거야" 소리가 참 쉽게 나오잖아요. 그 말이 내 일이 되는 순간의 온도 차가 그림 몇 컷에 다 들어 있더라고요.


맛보기로 하나 꺼내면 바나나 컷이에요. 엄마가 바나나를 까 들고 "엄마 따라해봐, 바.나.나~" 하는데, 아이 말풍선에는 말줄임표만 덩그러니 있어요. 그 아래 컷에서 엄마는 매일 밤 맘카페를 드나들고, 초록창에 '16개월에 첫걸음', '40개월 언어지연'을 쳐 넣습니다. 검색할수록 남는 건 커져가는 불안뿐이었고,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고요. 휴대폰을 툭 떨군 채 이마를 짚고 누운 엄마 그림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어요.


밤마다 검색창 붙잡아 본 사람이라면 그 컷이 남 얘기 같지 않을 거예요.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만의 재미난 점은 만화 사이사이에 실제 사진이 섞여 있다는 거예요. 코타키나발루의 진짜 바다와 진짜 야자수 위에 만화로 그린 아이 얼굴이 쏙 얹혀 있는 식입니다. 처음엔 좀 신기하다 싶었는데, 보다 보니 이게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컷마다 슬쩍 일러주는 느낌이 들어요. 구명조끼를 입고 "바들.." 떨고 있는 사진 속 아이 위에 얹힌 만화 얼굴은 귀여우면서도 짠했어요.


작가는 치료실 책상 대신 짐을 싸서 두 아이와 한 달 살기를 떠납니다. 프롤로그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달 살기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게 그 시간은 여행이라기보다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해보고 싶었던 간절한 시도였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사피섬으로 건너가는 통통배 장면이에요.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빠른 속도도, 크게 흔들리는 것도, 갑자기 몸이 튀는 느낌도 무서워했대요. 선착장에서 기다리는 엄마 머릿속엔 "괜찮을까?", "너무 울면 어떡하지?", "중간에 내릴 수도 없는데.." 같은 말풍선이 줄줄이 떠 있고요. 배가 출발하자마자 아이 얼굴이 굳더니 이내 울음이 터집니다.


그다음 컷이 좋았어요.

얼굴은 하나도 안 나오고, 엄마의 주황색 옷자락을 꽉 움켜쥔 작은 손과 그 등을 쓸어내리는 큰 손만 클로즈업돼 있거든요. "그렇게 우리는 울음소리와 모터 소리 사이에서 바다를 건넜다." 들리는 거라곤 "괜찮아 괜찮아.." 하는 엄마 목소리와 "으아아앙" 하는 울음뿐인데, 이 한 컷에 책이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울면서 건넌 바다 끝. 섬에 내리자 전혀 다른 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울던 아이는 울음을 멈춘 채 천천히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다 눈앞으로 대왕도마뱀이 어슬렁 지나가는데, 누나는 "악어?!!", 둘째는 "고..공룡?" 하고 굳어버려요. 여기선 소리 내 웃었습니다. 도마뱀 입장에선 졸지에 쥬라기 공원 주연으로 캐스팅된 셈이니까요.


엄마는 그 모습을 보며 "무서운 경험이 꼭 실패로 끝나는 건 아니구나", "울면서 지나온 길 끝에도 아이를 기다리는 새로운 세상이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마흔 넘어 낯선 일을 맡아 허둥대는 직장인한테도 그대로 건네고 싶은 말 같더군요.


둘째는 참 귀여운 아이예요. 말은 느려도 "난 이제 형아니까" 하며 씩씩하게 엄마 손을 잡고, 시소 위에서 "더 높이 엄마!!" 하고 소리치는 장면에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더라고요. 누나 주주도 자꾸 눈에 밟혀요. 낯선 섬에서 동생 손을 꼭 잡고 같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말없이 든든한 구석이 있거든요. 그리고 엄마. 작가는 자기를 멋지게 포장하는 편은 아닌 거 같아요. 불안해서 울고, 맘카페를 들락거리고, 상처받고 돌아와 혼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솔직히 읽다가 제일 걸렸던 건 예비초등 학원 상담 대목이에요. 7세 때 설렘을 안고 찾아간 학원에서 원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발달도 느린데 지금까지 엄마는 아무것도 안 시키고 뭐 하셨어요?" 언어치료도 감통치료도 다니고 여행하며 경험도 쌓아줬던 시간이, 그 한마디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고요. 읽는 제가 다 욱하더군요. 일 년 내내 뛰어다닌 걸 숫자 한 줄로 평가받으며 "그래서 뭐 했어요?" 소리를 듣는 기분이랑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엄마는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아이가 더 주눅 들까 봐 한마디도 못 하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엄마 나 학원 못 다녀?" 하고 묻는 아이에게 웃으며 "그냥 여기보다 더 멋진 학원 가자 우리" 하고 말해요.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인지 알 것 같아서, 그 컷은 오래 들여다봤어요.

"아이의 느림보다 더 힘든 건 어쩌면 아이의 느림을 마치 평균 낙오처럼 판단해버리는 세상의 시선이었다." 놀이터에서 "너는 가" 소리를 듣고 고개 숙인 아이, 자기보다 어린 아이한테 "애기야 너 몇 살이야?" 소리를 듣는 아이가 그 문장 앞에 차례로 놓여 있어요. 작가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니 아이의 마음을 조금 더 단단하게 길러주기로 합니다. "세상이 아이를 작게 보더라도 아이만큼은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지 않도록." 알록달록한 말풍선들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가운데, 엄마가 아이를 꼭 끌어안고 웅크린 그림 위에 이 문장이 얹혀 있어요.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는 치료실을 깎아내리지도, 정답을 내밀지도 않아요.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자기도 치료실을 다녔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치료실 밖에도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 하고 싶었다고요. 그 균형이 읽는 내내 편안했습니다.


에필로그의 이 문장은 느린 아이를 키우며 혼자 속 끓이는 분이라면 꼭 한번 소리 내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엄마, 당신이 유난인 게 아니에요. 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니까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가장 많이 사랑하니까 가장 오래 불안했을 뿐이에요."


그림이 넉넉해서 술술 넘어가고, 두께도 보통 에세이 정도라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가볍게 넘어간다고 가볍게 남는 책은 아닌 거 같습니다.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는 아이 키우는 집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아이가 자란 뒤 같이 펼쳐봐도 좋을 것 같아요.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언젠가 아이가 이 책을 읽게 될 날을 이야기하는데, 그날이 오면 이 책은 그대로 엄마의 편지가 되겠더라고요. 주변에 조급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있다면, 말 대신 슬쩍 건네기에도 좋겠고요.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래지는 11월 초입이에요. 해가 부쩍 짧아져서 퇴근길엔 벌써 표지 같은 노을이 걸리더군요. 다들 토끼처럼 뛰어야 할 것 같은 화요일이지만, 이번 주는 이 책 제목을 주문처럼 한 번 외우고 거북이 걸음으로 가보려고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 한쪽이 따뜻해진 기분입니다.


느린 아이의 걸음에 발맞추며 엄마도 함께 자라는, 울면서 건넌 바다 끝에서 웃게 되는 그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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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생존전략 Z - 250 NEXT 50, 시대정신을 직시하고, 7% 역방향 무빙워크의 함정을 돌파하라!
김유진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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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월급은 그 자체로 인생이다, <자본주의 생존전략 Z> 읽고 국밥값부터 계산하게 된 아재 서평


남색 바탕 위에 무지갯빛으로 번쩍이는 커다란 Z 하나.

처음 받아 들었을 때는 무슨 SF 소설인가 싶었어요. 그런데 뒤에 깔린 점선 막대들이 영락없는 주식 차트 모양이고, 그 위에 큼직하게 박힌 제목이 <자본주의 생존전략 Z>입니다. Z라길래 Z세대 책인가 보다, 저는 '지친 세대'라 해당 사항이 없겠구나 했는데 웬걸요. 프롤로그부터 제 월급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자 폴라리스 유진은 2004년생이에요. 고등학교 때 온라인 쇼핑몰을 시작해서 지금은 7년 차 생계형 자영업자이고, 구독자 5만 명의 유튜브 채널도 운영합니다. 회사로 치면 막내 사원보다도 어린 나이인데, 그런 사람이 1776년부터 2026년까지 250년 자본주의를 다룬다고 하니 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어요.


프롤로그는 인스타 피드에서 시작해요. 조명 아래 예쁘게 놓인 오마카세, 수백만 원짜리 가방, 한 박스에 수십만 원 하는 디저트. 어른들은 "요즘 애들은 절약을 몰라"라며 혀를 차는데, 이 대목에서 살짝 뜨끔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말을 속으로 해본 적이 있는 거 같거든요. 저자는 그 화려한 사진 한 꺼풀 밑에 있는 게 "지독한 허무함"에 가깝다고 말해요. 한 달에 200씩 모아도 서울에 번듯한 집 한 채 사려면 몇십 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끝나는 순간, 저축은 "그냥 플라시보"가 된다고요.


"위로라는 이름의 사치, 역전이라는 이름의 도박."

요즘 젊은 친구들이 서 있는 자리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는 거 같았어요. 오마카세 영수증으로 스스로를 달래거나, 밈 코인에 인생 한 방을 걸거나 하는 양쪽 끝.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진단이 꽤 아프게 들리더군요.


아무리 걸어도 뒤로 밀리는 역방향 무빙워크.

부제에도 들어간 이 표현이 프롤로그에서 처음 나오는데,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싶었습니다. 부지런히 걷고는 있는데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밀려나는 느낌은 직장 생활 오래 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테니까요.

<자본주의 생존전략 Z>가 출발점으로 잡은 해가 하필 올해, 2026년이에요. 정확히 250년 전인 1776년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미국 독립선언이 같은 해에 나왔고, 그 250년을 떠받쳐 온 룰이 지금 통째로 흔들리며 리셋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책은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순서로 흘러갑니다. 저자는 "예전의 테크트리와 앞으로의 테크트리는 분명히 다르다"고 하는데, 게임 용어로 경제를 풀어주니까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제6장 '융합'에서는 250년 번영의 비밀을 자유와 소유라는 두 기둥으로 정리해요. "자유가 없는 재산권은 약탈의 대상이고, 재산권 없는 자유는 빈털터리의 공허함일 뿐이다." 문장 리듬이 좋아서 소리 내 읽어보고 싶어지는 대목이었어요.

제 또래 직장인이라면 제5장 '저항'에서 고개를 몇 번은 끄덕일 거 같아요. 몇 년 전만 해도 7,000원이면 든든하던 국밥 한 그릇이 이제 1만 원을 훌쩍 넘는 곳이 흔하다는 얘기로 시작하는데, 이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잖아요. 연봉이 조금 올랐다고 기뻐했는데 물가가 그보다 더 빨리 올랐다면 정말 부자가 된 거냐고 묻는 대목에서는 웃음 반, 한숨 반이었습니다.


저자는 인플레이션을 "이 시대의 가장 조용한 세금"이라고 불러요. 하루 14시간씩 버텨 모은 자영업자의 돈, 평범한 직장인이 매일의 모멸감을 견디며 모은 월급의 가치가 "스마트폰 액정 위에서 소리 없이 증발하고 있다"는 표현은 좀 서늘하게 읽혔어요. 대부분은 마트 영수증을 보며 물가가 올랐다고 말하지만, 시장을 읽는 사람은 그걸 내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해석한다는 설명도 기억에 남고요.


1773년 보스턴 차 사건도 나옵니다. 앞바다에 던질 홍차 상자조차 없는 지금은 사람들이 비트코인과 주식으로 눈을 돌린다면서, 저자는 그걸 '21세기형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다고 뭘 사라고 등을 떠미는 책은 또 아니었어요. 이런 자산들에도 저마다 위험과 변동성이 따른다고 분명히 선을 그어 둬서 마음 편히 읽혔습니다.


이 책에서 독특했던 건 장과 장 사이에 들어 있는 'Break Chapter'예요. 지면 색부터 연한 하늘색으로 바뀌어서 펼치면 바로 티가 나요. 쉬어 가는 코너인가 했더니 알맹이가 더 진하더라고요. Break Chapter 1의 제목은 숫자 하나, 876,000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자본주의 1호 교과서"라는 조병학 작가의 <돈의 비밀>을 인용해요.

"돈은 내 인생을 조각내 팔아 맞바꾼 대가이다. (중략) 월급은 그 자체로 우리 인생이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이 바로 여기였어요. 아침 일찍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가 땀 흘려 번 월급이 그 귀한 시간을 잘게 잘라 돈과 바꾼 결과라는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월급 명세서 숫자가 조금 다르게 보이더군요. 거기 찍힌 게 전부 제 인생의 조각이라니.


저자는 한동안 [시간=돈]이라고 믿었다가 장사를 하면서 [시간>돈]을 깨달았다고 해요. 돈은 잃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흘려보낸 한 시간은 억만금을 줘도 다시 살 수 없다는 거죠. 그러고는 계산을 하나 내놓습니다. 1일 24시간, 1년 8,760시간, 100년이면 876,000시간. 파란 글씨로 따로 박힌 이 숫자를 보고 있으면 억만장자에게도, 막 장사를 시작한 자영업자에게도 하루 24시간은 똑같이 흐른다는 말이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구나 싶어요.


이 Break Chapter에는 저자 아버지 이야기도 들어 있어요. 외환위기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아빠가 어린 저자에게 해준 말이라고 합니다.

"불평불만 하지 마라. 남들과 비교도 하지 마라.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다. 그냥 주어진 현실과 조건을 받아들이고 빨리 출발하면 된다."

그때는 서럽고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해준 고마운 조언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IMF를 또렷이 기억하는 나이라 외환위기라는 단어가 저한테는 남다르게 들려요. 그 시절 어느 집 아버지가 자식에게 저런 말을 건넸을 모습을 떠올리니, 뒤에 붙은 문장도 다르게 읽혔습니다. 세상을 탓한다고 해서 내 삶이 "단 1센티미터라도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말이요.


헬조선을 다루는 9장은 부제부터 세요. '헬조선은 거짓말이다.' 국가 멸망, 경제 파탄, 원화 붕괴 같은 썸네일이 넘쳐 나면서 공포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 상품이 됐다는데요, 그런 콘텐츠가 대중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준다는 대목은 퇴근하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끌려다니다 잠들던 예전의 저한테 하는 말 같았어요. 재미있는 건 UBS 글로벌 웰스 리포트 2025를 들고 와서 한국 성인 1인당 자산이 평균도 중간값도 세계 20위라는 수치를 내민 다음, "평균의 함정이다!"라는 반론을 저자가 먼저 꺼낸다는 점이에요. 충분히 가능한 지적이라고 받아주고 넘어가는 그 태도가 좋았습니다.


제21장 '각성'은 정치 이야기가 제법 나와서 조심스럽게 읽히는데, "AI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반도체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른다"는 문장 하나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되는 거 같아요. 진영 싸움에 쓰는 시간과 감정을 내 성장과 미래를 준비하는 데 쓰자는 쪽이거든요.

40대 후반인 저는 같은 장에서 부동산을 다루는 대목에 특히 귀가 쫑긋했어요. 저자는 부동산을 "거대한 중력"이라고 부르면서도, 혹독한 시대를 맨몸으로 견딘 기성세대에게 그 단단한 콘크리트는 "삶의 훈장이자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고 먼저 인정해 줘요. 콘크리트 신화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신화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요. 2004년생이 부모 세대의 공식을 이렇게 예의 바르게 다루니 듣는 아재 입장에서도 서운할 틈이 없더라고요. 그다음 이야기는 세계적인 혁신 기업의 "주주이자 동업자"가 되자는 쪽으로 이어집니다.


제22장 '본질'에서 무릎을 쳤던 건 사전 정의를 비교하는 대목이에요. 표준국어대사전은 자본주의를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위해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체제라고 하고, 얼마 전까지 네이버 지식백과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라고 설명했대요.


보장과 지배.

같은 대상을 두고 단어 하나 차이인데 인상이 이렇게까지 달라지나 싶었어요. 저자는 우리가 '보장'이라는 말에 익숙해지면서, 국가와 시장이 평범한 개인의 노동과 삶을 지켜줄 거라는 기대를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건 아닌지 묻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단어도 하나 있어요. 저자는 아날로그 노동력에만 기대어 돈을 버는 걸 '현금 채굴'이라고 부르는데, 월급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처음엔 좀 서운하더라고요. 그런데 바로 뒤에 19세기 러다이트 운동과 영국의 적기조례가 나오고,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면서 임금 인상도 복지도 요구하지 않는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얘기까지 이어지니 반박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각주도 꽤 성실한 편이에요. 닉슨 쇼크, 밀턴 프리드먼, 린치핀 같은 용어마다 설명이 꼼꼼하게 붙어 있고, 적기조례 각주에는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증기차 앞을 걸어가는 삽화까지 들어 있어요. 깃발 든 사람이 자동차 55m 앞에서 걸어가야 했다니 지금 보면 웃음부터 나오는데, 그 법이 1896년에야 폐지되는 사이 영국 자동차 산업이 프랑스와 독일에 뒤처졌다는 설명을 읽고 나면 웃을 일만은 아니더군요.


에필로그는 저자가 자기 얘기를 가장 솔직하게 꺼내는 자리예요. 지금도 원가와 비용을 계산하며 하루하루 버티는 자영업자가 250년 자본주의를 논하는 일이라, 시작부터 "도대체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책을 쓰냐?"는 비아냥을 각오했다고 해요. 10대 끝자락과 20대의 시작을 팬데믹 속 '코로나 세대'로 보내면서 세상과 사람과 돈을 온라인으로 배웠다는 고백도 나오고요.


그러고는 인생의 항로를 바꿔 놓은 세 명의 스승을 소개하는데, 셋 다 사람이 아닙니다. <돈의 비밀>, 비트코인, 그리고 유튜브. Break Chapter에서 만났던 '내 인생을 조각내 팔아 맞바꾼 대가'라는 말이 여기서 다시 돌아오는 걸 보고, 책 한 권을 꿰는 실 같은 문장이었구나 싶었어요.

유튜브 댓글 창에서 "고졸 주제에~"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는 대목은 담담하게 쓰여 있어서 오히려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걸 견디며 5만 구독자와 함께 지나온 시간을 저자는 '멘탈 훈련소'라고 불러요. 저 같은 사람이 화면 이쪽에서 영상을 넘기는 동안, 반대편에서는 누군가 이렇게 버티고 있었던 거죠.


책 전체가 "우리 2030"을 부르며 말을 거는 방식이라, 40대 후반 독자는 가끔 옆 테이블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엿들을 가치는 충분한 얘기였습니다. 2030 자녀를 둔 집이라면 <자본주의 생존전략 Z>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를 나눠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보통 경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인데, 중간중간 하늘색 Break Chapter가 숨 돌릴 틈을 줘서 지루할 새가 없었어요. 국밥값, 연봉, 콘크리트, 876,000시간처럼 일상의 언어로 붙잡아 둔 장면이 많아서 경제 용어가 낯선 분들도 따라가기 수월할 거 같고요.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 물가 뉴스가 나올 때마다 다시 꺼내 보게 될 책입니다.


10월도 끝자락이라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요. 찬바람이 불면 뜨끈한 국밥 한 그릇부터 생각나는데, 이제는 숟가락 들기 전에 구매력부터 계산하게 생겼습니다. 주말을 하루 앞둔 목요일, <자본주의 생존전략 Z> 덕분에 제 시간과 월급이 어디쯤 놓여 있는지 한 번 둘러보게 됐네요. 좋은 책 만나서 든든한 늦가을입니다.


국밥값에서 876,000시간까지, 2004년생 자영업자가 월급쟁이 아재에게 건넨 250년 자본주의 생존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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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함을 사랑하기
이창현(코유) 지음 / 고유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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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창현(코유) <애매함을 사랑하기> 서평, 두부 같은 삶이 좋다는 사람의 다정한 고백


표지부터 좀 애매한 책이에요.

짙은 코발트빛 바탕 위로 하얀 선 하나가 끊기지 않고 흘러가면서 얼굴을 그리고 있는데, 어디까지가 눈썹이고 어디서부터 코인지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불안한 우리, 애매한 나에게, 그럼에도 붙이는, 다정한 한마디"라는 글귀가 군데군데 숨어 있습니다. 제목은 <애매함을 사랑하기>. 애매함을 사랑하라니, 요즘 제 인생에서 제일 선명한 건 뱃살 하나뿐인데 말이죠.


저자는 이창현, 필명은 코유입니다. 작가 소개가 재밌는데요, 춤을 못 춰서 마땅한 표현 방법을 찾다가 글을 고른 사람이고, 시력은 좋지 않지만 책 볼 시력 정도는 있는 사람이래요. 그러다 읽고 쓰는 일이 본업이 돼서 지금은 고유출판사와 상수동 고유아지트, 연남동 고유라운지를 꾸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소개만 봐도 한 줄로 반듯하게 요약되는 분은 아닌 거 같아서, 제목이랑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매함을 사랑하기>는 시작, 애매함, 시도, 잡음, 축적, 사이, 끝까지 일곱 갈래로 나뉘고, 그 안에 짧은 산문들이 촘촘하게 들어 있어요. 두께도 손에 쥐기 편한 정도라 부담이 없고요. 재미있는 건 글 하나 안에 존 키츠와 장자가 나란히 나오고, 바로 옆에서 도라에몽이 주머니를 뒤적인다는 점입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니체 같은 만만치 않은 이름들이 배스킨라빈스 메뉴, 영화관 좌석 얘기랑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요. 어려운 말을 빌려 오면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철학책 펼칠 때처럼 긴장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첫 글부터 좀 의외였어요. 삶이 본래 의미 없다고 생각한 뒤로 생일을 챙기지 않게 됐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거든요. 몇 달 전부터 생일 주간을 준비하는 친구를 처음엔 요란하다고 여겼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자격지심이었다고 털어놓는 대목에선 웃음이 나면서도 뜨끔했습니다. 자기 삶을 당연히 소중하게 대하는 그 자신감이 부러웠다는 말이, 나이 들수록 생일 케이크 앞에서 쑥스러워지는 아재한테도 해당되는 얘기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허무가 저자를 오히려 대담하게 만들었다고 해요. 부동산에 들어간 지 10분 만에 사무실을 계약하고, 거절당하면 뭐 어떠냐 싶어 제안 메일을 돌려 프로젝트를 따내고, 탁구가 재밌다는 이유로 새 사무실을 얻어 탁구대를 들여놓았다고요. 결재 서류 하나 올리는 데도 몇 번씩 고쳐 쓰는 직장인 입장에선 부럽다 못해 살짝 어지러운 속도더라고요.


첫 글은 이렇게 끝나요.

"허무함을 핑계로 숨지 않고, 무기로 들고 나아가기. 같은."

마지막에 덧붙인 "같은."이 꼭 말끝을 흐리는 사람 같아서, 그게 또 이 책다웠어요.

"나는 키가 크지 않다"로 시작하는 표제작 (애매함을 사랑하기)는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얼굴이 빼어나지도, 공부를 썩 잘하지도, 특별한 재능이 있지도 않은 자신을 저자는 서랍 제일 아래 칸 안쪽에 접혀 있는 옷가지에 빗대요. 자주 꺼내 입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버려질 옷더미에 들어 있지도 않은 옷. 너무 정확한 비유라 피식 웃음이 나더군요. 세상은 누구나 자기만의 대표 메뉴 하나쯤은 들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정작 자기 주머니에서는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만 나왔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회사에서 "그래서 본인 강점이 뭡니까" 하는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사람, 아마 저만은 아닐 거예요. 꽤 오래 일했는데도 한 문장으로 저를 요약해 보라고 하면 아직도 말끝이 길어지니까요.


저자는 거기서 존 키츠가 말한, 불확실함과 의심 속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을 꺼내 오고, 장자의 시선을 빌려 애매함을 다시 정의합니다. 한 방향으로 굳지 않은 상태, 그래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라고요. 그리고 이 문장이 나와요.

"애매함은 정의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진중하다고, 누군가는 다정하다고, 또 누군가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앞 문장까지 같이 읽으면 마음이 한결 풀리는 거 같아요. 삶은 바로 그 '기타 등등' 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괜히 좋았고요. 바로 뒤에 붙은 짧은 글 (낮에 빛나는 별)도 결이 비슷합니다. 낮에도 별은 있는데 태양이 밝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얘기요. "나를 너무 일찍 버려선 안 된다"는 한 줄이 짧아서 오히려 세게 들어오더라고요.


<애매함을 사랑하기>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아무리 해도 제자리걸음 하는 것 같을 때)였어요. "사무실, 집, 헬스장, 집, 카페, 그리고 다시 집." 첫 줄부터 남의 하루 같지가 않았거든요. 동선만 조금 바꾸면 그대로 제 일주일이니까요. 집은 조용한데 머릿속만 시끄러운 밤이라는 묘사도 그렇고요.


그런데 그 무거운 밤의 결론이 웃깁니다. 추상적인 질문과 공허한 답 사이를 떠돌다가, 결국 이 모든 게 점심을 과하게 먹고 퍼질러 잔 낮잠 탓이겠거니 하고 낮잠 금지령을 내린다는 거예요. 진지하게 따라가다가 여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저자는 거기서 시선을 우주까지 밀어 올려요.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돌고, 초신성 잔해에서 새 별이 태어나는 것까지 다 반복인데, 한낱 인간이 어떻게 반복을 피하겠느냐고요. 서동욱 교수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에서 '반복은 새로움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을 빌려 오고, 매번 같은 길을 걸어야 새로 생긴 가게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예를 듭니다. 매일 같은 지하철, 같은 엘리베이터, 같은 자리. 지겹기만 하던 그 반복이 이 대목을 지나고 나니 조금은 다르게 보일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매일 반복하는 일상을 보낸다는 말은 매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과 같다."

글은 니체가 던진 영원회귀 질문에 "그러하다"고 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삶은 충분하다는 말로 맺어요. 쳇바퀴 도는 중년 직장인한테 이만한 위로가 또 있을까 싶더군요.


(벚꽃 같은 삶은 싫다)는 합정역에서 걸어서 5분, 가로등이 약해 밤이면 으스스한 거리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벚꽃 필 때만 이상하리만치 다정한 움직임으로 가득 찬다는 그 거리요. 저자는 만개한 벚꽃을 보면서도 비 한 번에 우수수 떨어질 걸 먼저 생각하고, 불꽃놀이 앞에서도 끝난 뒤의 검은 하늘과 밟혀 구겨진 종이컵부터 떠올리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떡볶이처럼 맵고 달고 강렬한 삶 대신 두부 같은 삶이 좋다고 해요.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요란하게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제 역할을 해내는 것.


하루 종일 비슷한 온도로 이어지는 날이 좋다는 대목도 있어요. 아침엔 차갑고 낮엔 덥고 밤엔 다시 서늘해지는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몸과 마음을 갈아입어야 해서 피곤하다는 문장인데, 아침엔 두꺼운 외투가 생각나고 한낮엔 겉옷을 벗어 들게 되는 10월 끝자락이라 그런지 딱 지금 날씨 얘기 같았습니다.


솔직히 마음에 걸렸던 건 그다음 고백이에요. 감정을 드러내면 더 커질 것 같아서 모르는 척, 별일 아닌 척, 지나가는 일인 척 가라앉히는 쪽을 택한다는 얘기. 건강한 방식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마음을 지키는 데엔 도움이 된다고 저자가 덧붙이는데, 그 문장 앞에서 좀 찔렸어요. 회사에서 "괜찮습니다"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중년이라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이번 벚꽃 필 때 보러 갈 거고, 사진도 찍을 거고, 몇 장은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들여다볼지도 모른다고 슬쩍 덧붙이는 솔직함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두부처럼, 물처럼. 글을 닫는 이 두 마디가 참 이 사람답다는 느낌이 들어요.


(겨울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는 계절이 계절이라 더 반갑게 읽혔어요. 호주 시드니에 사는 한 교민이 고국에서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 앞마당에 심었는데, 잎은 무성해지는데 해가 바뀌어도 노란 꽃은 피지 않더라는 이야기예요. 일정 기간 차가운 온도를 지나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는 것, 춘화 현상이라는 말을 이 글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아직 피지 않았다고 해서, 내 안에 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곧 겨울인데, 이 문장 하나 들고 들어가면 좀 덜 추울 거 같아요.

책의 마지막 묶음에 실린 (도망치다 보니 낙원에 도착했다)에서 저자는 "나는 지금까지 도망쳐 왔다"고 대뜸 털어놓습니다. 싸움을 못 해서 잘 웃는 걸 연습했고, 누군가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취업 대신 창업을 택했고, 일하기 싫은 날엔 책으로, 글쓰기로, 헬스장으로 도망쳤다고요. 그에게 도망은 숨 쉬기 어려운 곳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이래요. 길을 잘못 들어서야 골목 귀퉁이의 빈티지숍도 만나고 지름길도 찾게 된다는 얘기와 함께.


그러고는 그렇게 알게 된 자기 취향을 줄줄이 꺼내 놓는데, 이게 참 좋더라고요. 고수를 싫어하고, 배스킨라빈스에서 민트 초코와 레인보우 샤베트를 싫어하고, 영화관에선 E 좌석을 고른다는 것.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검정치마의 (기다린 만큼, 더)와 (한시오분)을 좋아한다는 것. 책 내내 들었던 목소리가 갑자기 옆자리 사람처럼 가까워지는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책은 (나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로 끝을 맺습니다. 앞의 글들이 비교적 담담한 결이었다면, 이 글에는 저자가 가장 깊숙이 넣어 두었을 법한 가족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받기만 하며 자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꽤 아프게 돌아보고, 그 사람들에게 사과를 건넵니다. 자세한 사정은 책으로 만나시는 게 좋을 거 같고, 마지막 문장은 이랬어요.


"이번에도 이기적으로 그대들 덕분에 한결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사과로 끝나는 문장인데 고개를 숙이기만 하지는 않는, 그 솔직한 어정쩡함까지 끝까지 제목다웠습니다.

<애매함을 사랑하기>는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도 좋지만, 아무 데나 펼쳐서 한 편만 읽어도 하루치 위로로는 충분한 책이에요. 짧은 글이 많아서 책장에 꽂아 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꺼내 보기 좋겠더라고요. 제목만 보고는 진로 앞에서 마음 졸이는 이십 대한테나 어울릴 책인 줄 알았는데, 막상 더 자주 고개를 끄덕인 건 마흔 후반인 제 쪽이었어요.


10월도 이제 이틀 남은 목요일입니다. 주말을 하루 앞두고 버티는 요일인데,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서 겨울 문턱이 코앞인 게 느껴지네요. 다가오는 겨울엔 저도 시드니 개나리처럼 춘화 현상이나 한번 기대해 볼까 해요. 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정수리에 머리카락이라도 좀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애매한 채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을 <애매함을 사랑하기>한테 들은 거 같아서, 마음 한쪽이 가지런해진 기분이에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흐뭇합니다.


아직 선명하지 않은 나를 너무 일찍 실패라고 부르지 말자는, 서툰 채로 계속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다정한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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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와 일상을 혁신하는 새로운 방법 노션 AI - 업무 효율 200% 올리는 노션 AI 워크스페이스 구축하기
전시진 지음 / 제이펍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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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늘 피곤한 직장인에게 노션 AI가 건네는 칼퇴 비법, 전시진 <노션 AI> 서평


표지 한가운데에서 헤드셋을 낀 캐릭터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고 있는데요, 꼭 "그 보고서, 아직도 일일이 손으로 쓰세요?" 하고 묻는 얼굴 같았어요. 회의록 정리하고, 주간 보고 양식 채우고, 같은 내용을 메일로 또 옮겨 적고. 하루 일과에서 이런 일이 차지하는 몫이 생각보다 크다는 거, 직장 생활 좀 해 보신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업무와 일상을 혁신하는 새로운 방법 노션 AI>는 바로 그 몫을 노션 AI한테 넘겨 보자고 말을 걸어오는 책입니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땐 노션을 '노 선(No Sun)'으로 잘못 읽을 뻔했어요. 요즘 해가 워낙 짧아져서 그런가 봅니다.

10월도 끝자락이라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갑습니다. 월요일 한 번 넘기고 맞는 화요일은 이상하게 쌓인 일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 날이기도 하고요. 예전 같으면 이런 실용서는 목차만 훑고 책장에 꽂아 뒀을 텐데, 서평단 하면서 책 읽는 재미가 붙고 나니 IT 책도 소설 펼치듯 설레면서 열게 되더라고요.


저자 전시진 님은 '시리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노션 공식 컨설턴트예요. 머리말을 보니 2018년부터 프로, 챔피언, 파트너, 앰배서더, 공식 컨설턴트, 공식 컨설팅 파트너까지 노션의 국내 타이틀을 전부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재밌는 건 처음부터 노션 AI 예찬론자는 아니었다는 고백이에요. 2022년 11월 노션 AI가 처음 나왔을 때는 크게 놀라지 않았고, 챗GPT에 비하면 덜 다듬어진 부가 기능 같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그러다 2025년 9월 노션 AI 3.0을 써 보고는 장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책을 내기로 했답니다.

머리말 끝에는 주말마다 방에 틀어박혀 원고와 씨름하는 넉 달 동안, 시간 좀 내 달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참아 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인사가 실려 있어요. 실무서 머리말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니 저자가 한결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이 책만의 색깔은 머리말에서 이미 드러나는 것 같아요. 한때는 프롬프트를 잘 쓰는 법이 가장 뜨거운 주제였는데, AI가 프롬프트까지 써 주는 시대에는 내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데이터를 쌓아 두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는 얘기예요. 그래서인지 <업무와 일상을 혁신하는 새로운 방법 노션 AI>는 노션 AI를 똑똑한 챗봇 정도로 소개하지 않더라고요. 저자는 노션 AI를 부사수이자 에이전트, 그리고 두 번째 뇌라고 부릅니다. 부사수라는 단어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요즘 회사에서 손발 잘 맞는 부사수 한 명 만나기가 어디 쉽나요.


Chapter 02에서 챗GPT와 노션 AI를 비교하는 대목도 기억에 남아요. "챗GPT는 세상의 지식을 알고 있지만 내 상황을 모르고, 노션 AI는 내 상황을 알고 있지만 세상 전체의 지식을 직접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정리가 깔끔하더라고요. 그 차이를 만드는 게 맥락이라는 설명인데,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잖아요. 이름난 외부 전문가도 좋지만, 급할 땐 우리 팀 사정 훤히 아는 동료 한 명이 더 든든할 때가 있으니까요.


노션 AI가 하는 일은 검색, 생성, 분석, 실행 네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는데, 분석 쪽 예시 하나에서 괜히 뜨끔했습니다. 프로젝트 데이터베이스를 보고 "현재 업무가 가장 많이 몰린 팀원이 누구야?"라고 묻는 장면이에요. 일 나눠 주는 자리에 앉아 보면 늘 감으로 짐작하던 걸 데이터를 읽고 답해 준다는 거죠. 실행 단계로 가면 "마감일이 지난 모든 작업의 상태를 지연으로 변경해 줘" 한마디에 수백 개 항목이 한꺼번에 바뀐다고 하니, 하나하나 클릭하던 손목이 먼저 반응하는 느낌이에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Chapter 03의 OICES 프롬프팅이었어요. Order, Information, Constraints, Example, Style의 앞 글자를 딴 건데, 저자는 이걸 울타리를 겹겹이 세워 범위를 좁혀 가는 과정에 빗대요. 바깥 울타리부터 하나씩 세울수록 AI가 제멋대로 판단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설명이고, 울타리 그림까지 실려 있어서 머리에 쏙 들어오더라고요. 그렇다고 꼭 외워야 할 공식처럼 내밀지는 않습니다. 요청하기 전에 빠뜨린 건 없는지 빠르게 점검하는 사고 틀 정도로 받아들이라고 하더군요.

맛보기로 하나만 소개하면 이래요. 노션 AI에게 아무 맥락 없이 "신제품 출시 이메일 써 줘"라고만 하면 핵심 효익 1, 2, 3이 빈칸처럼 늘어선 초안이 나옵니다. 저자는 이걸 두고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나 쓸 수 있는, 반대로 말하면 어디에도 딱 맞지 않는 내용"이라고 해요.


어디에나 쓸 수 있는 글. 그러니까 어디에도 맞지 않는 글.

다섯 요소를 채워서 다시 요청하자 결과물은 "안녕하세요, [이름]님. 매일 반복되는 문서 작업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에는 손도 못 대고 계시진 않나요?"로 시작합니다. 첫 줄부터 받는 사람의 고민을 건드리는 메일이 나오더군요. 수정이 필요하더라도 방향을 갈아엎을 일 없이 표현만 다듬으면 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상사한테 "다시 해 와" 소리 듣는 것보다 "여기 표현만 좀 바꾸자"가 백번 나은 거, 우리 다 알잖아요.


이 장에서 저자의 얼굴이 제일 잘 보였던 건 '한 걸음 더' 박스였어요. 제목부터 '시리얼이 자주 쓰는 출력 조건 통제 프롬프트'인데, "**를 제거해 줘", "결과물 이외에 설명 글은 제거해 줘", "MUJI의 제품명처럼 명확하게 작성해 줘" 같은 문장이 줄줄이 나옵니다. 모든 지침을 적용한 다음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한 번 더 검증하고 결과물을 내 달라는 문구도 있고요. 강의 쉬는 시간에 강사님이 슬쩍 다가와 "이거 제가 자주 쓰는 건데요" 하고 알려 주는 꿀팁 같은 느낌이라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업무와 일상을 혁신하는 새로운 방법 노션 AI>의 뒤쪽 Chapter 05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노션 AI, 일반 에이전트, 커스텀 에이전트를 표 하나로 정리해 주는데 예시가 간단해서 좋았어요. "이 문서를 요약해 줘"가 노션 AI라면, "이 내용으로 새 페이지를 만들어 줘"는 일반 에이전트, "새 항목이 추가되면 자동으로 분류해 줘"는 커스텀 에이전트의 몫이라고요. 커스텀 에이전트는 사용자가 잠든 사이에도, 휴가 중에도 멈추지 않는다는데, 휴가 가서도 메신저 알림을 들여다보는 중년 직장인한테 이만큼 반가운 문장이 또 있을까 싶더라고요.


반복 업무를 다루는 대목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읽혔어요. 반복 업무가 부담스러운 건 매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자체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바쁜 날엔 깜빡하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고, 담당자가 바뀌면 품질이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리고 커스텀 에이전트가 해 주는 일을 "사람이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줄어드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늘 피곤했던 게 일의 양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실습으로는 프로젝트 팀의 주간 업무 보고를 자동으로 만드는 에이전트가 나와요. 매주 월요일 오전 9시에 실행되도록 트리거를 걸고, PROJECT DB와 TASK DB를 참조하라는 지침을 넣고, 완성된 보고서를 Slack 채널로 보내도록 권한까지 주는 흐름이에요. 단계마다 화면 캡처가 붙어 있어서 겁먹을 틈이 별로 없겠더라고요. 마지막에 지난주 완료 업무, 현재 진행 중인 업무, 이번 주 예정 업무로 정리된 보고서 화면을 보니 월요일 아침마다 양식을 붙들고 있던 시간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같은 장의 '한 걸음 더'에서는 주간 보고서를 바탕으로 회의록 초안을 만드는 에이전트를 따로 두라고 권해요. 에이전트는 한 번에 하나의 역할에 집중할수록 결과가 안정적이라서요. 한 사람한테 이 일 저 일 몰아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남 얘기 같지 않았고요.


솔직히 살짝 걸렸던 건 커스텀 에이전트가 비즈니스와 엔터프라이즈 요금제에서만 쓸 수 있고, 별도로 노션 크레딧이 든다는 점이었어요. 크레딧 1,000개에 10달러, 노션 공식 문서 기준으로 에이전트를 45~90회쯤 돌릴 수 있고, 쓰지 않은 크레딧은 다음 달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네요. 회사 계정이면 모를까, 개인으로 맛보려는 입장에서는 계산기를 한 번 두드려 보게 됩니다. 그래도 크레딧 사용 현황을 확인하는 메뉴 위치까지 알려 줘서, 모르고 쓰다가 놀랄 일은 없겠다 싶었어요.


판형도 큼직하고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책상 한쪽에 세워 두면 지나가던 부장님이 "요즘 공부하나 봐?" 하실 만한 존재감이라, 들고 다니기보다는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펼쳐 보는 용도로 딱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전작 <업무와 일상을 정리하는 새로운 방법 노션>이 수학의 정석처럼 노션 기본기를 다지는 책이었다면 이번 책은 노션 AI의 정석이라고 소개하더라고요. Chapter 01에서 블록과 데이터베이스 같은 기본기를 먼저 잡아 주니까 노션이 아직 낯선 분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노션에 정리해 둔 내용을 굳이 복사해서 챗GPT 창에 붙여 넣고 계셨다면 <업무와 일상을 혁신하는 새로운 방법 노션 AI>를 펼치자마자 "아, 이걸 여기서 바로 할 수 있었구나" 하실 거고요. 팀에 노션을 들여 볼까 고민 중인 분 책상 위에 올려 두기에도 좋겠더라고요.


길가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랗게 물드는 10월 끝자락입니다. 연말로 갈수록 보고서도 회의도 늘어나는 시기라 지금 이 책을 만난 게 타이밍이 기가 막힌 것 같아요. 올겨울엔 노션 AI 부사수 하나 들여서 저도 칼퇴 한번 노려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책 만나서 화요일부터 마음이 든든합니다.


반복 업무에 지친 직장인에게 노션 AI라는 든든한 부사수를 소개해 주는, 따라 하는 맛이 있는 실무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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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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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항의 전화 마흔여섯 통으로 시작하는 경찰 미스터리 <지지 않는 벚꽃> 서평


오전 11시 반까지 걸려 온 항의 전화가 마흔여섯 통.

<지지 않는 벚꽃>은 이 숫자와 함께 문을 엽니다. 요네자키현 경찰청 홍보과 사무실에서는 전화기 여덟 대가 쉬지 않고 울리고, 스물일곱 살 막내 모리구치 이즈미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매뉴얼에 나온 사과를 되풀이해요. "이 세금 도둑!" 소리와 함께 상대가 수화기를 쾅 내려놓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더라고요. 회사 밥을 이십 년 넘게 먹은 사람한테 저 전화벨 소리는 남 얘기 같지가 않거든요.

오늘이 10월 27일 화요일이에요. 단풍이 산 아래까지 내려오는 늦가을에 벚꽃 이야기를 꺼내려니 철이 좀 안 맞는 거 같긴 한데, 제목이 <지지 않는 벚꽃>이니 봄에 피든 가을에 펴든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히라이시의 여대생 나가a오카 아이리가 오랫동안 스토킹을 당하다 결국 목숨을 잃어요. 부모가 몇 번이나 경찰서를 찾아가도 꿈쩍하지 않다가,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신고서를 받기로 했는데, 그 접수마저 일주일을 미뤘더군요. 경찰은 다른 사건으로 바빴다고 했지만 실제 이유는 담당 부서 직원 열한 명이 간 워크숍이었고요. 아이리는 신고서가 수리되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 대목에서는 화가 안 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정작 사무실 공기는 또 다른 쪽으로 흘러가요. 도가시 과장은 신문을 책상 위에 내던지며 "이게 다 이 망할 놈의 신문 때문이야!"라고 하고, 옆에서 다카하시 과장대리는 "아무리 그래도 워크숍은 아니지" 하고 혼잣말을 해요. 과장이 진짜 신경 쓰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신고를 언제 받았느냐보다 워크숍 얘기가 어디서 샜느냐는 거죠. 일이 터지면 누가 말을 흘렸는지부터 찾고 보는 회의실 분위기는 직장 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 보셨을 거 같아요. 씁쓸하게 웃으면서 읽었네요.


그 말을 듣는 이즈미의 등에 땀이 배어나는데, 소설은 창으로 스며든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슬쩍 덧붙여요. 이 한 문장에서 이야기가 확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워크숍 이야기는 이즈미가 고등학교 동창이자 지역 신문 기자인 쓰무라 지카와 밥을 먹다가 무심코 꺼낸 말이었거든요. 지카는 기사로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틀 뒤 단독 보도가 나와 버린 거예요.


지카는 자기가 쓴 기사가 아니라고 했어요. 이즈미는 그 말을 믿지 못했고요. 그리고 일주일 뒤, 지카는 강 하류에서 발견됩니다.

여기까지는 책 소개에도 나와 있는 출발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이즈미가 친구의 마지막 일주일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른 경찰 미스터리와 결이 다르게 느껴졌던 건 주인공이 서 있는 자리 때문이었어요. 이즈미는 수사권도 수갑도 없는 홍보과 사무직원이거든요. 책에도 자신이 형사였다면 사건 해결을 최우선으로 여겼을 거라는 문장이 나오고, 바로 뒤에 "그러나 이즈미는 형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이어져요. 그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아가는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경찰 조직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바깥 사람처럼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이라, 읽는 쪽도 덩달아 경찰서 안을 낯설게 보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 소개를 보니 유즈키 유코는 주로 뜨겁고 치열하게 사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써 온 작가라고 하더군요. 그런 작가가 스물일곱 살 여성 사무직원을 앞세웠다는 점부터 흥미로웠어요. 해설에서는 이즈미가 홍보과 직원이라는 제삼자의 시선과 친구를 잃은 당사자의 시선을 함께 지녔다고 설명하는데, 3장에 들어서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3장은 공기부터 달라요.

퇴근하자마자 지카네 집으로 간 이즈미가 고등학생 때 이후 10년 만에 그 집 거실에 앉는 장면인데요. 빛바랜 다다미와 자리를 옮긴 화분 말고는 다 그대로라서, 당장이라도 고등학생 지카가 2층에서 내려올 것 같다는 묘사가 나와요. 불단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작은 탁자에는 지카가 좋아하던 헝겊 인형 캐릭터와 스낵이 놓여 있고요.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머니 마사코는 10년은 더 늙어 보인다고 합니다.


이즈미가 현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마사코가 짧은 침묵 끝에 묻습니다. 이즈미 네가 보기에 우리 지카는 어떤 애였냐고요.


"지카는 정말 다정다감한 애였어요. 그리고,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는 착실한 애였어요."

약속.

1장에서 이즈미가 믿어 주지 못했던 바로 그 단어를 이번엔 이즈미가 직접 꺼내는 거예요. 그 대답이 나오기까지 이즈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문장에 쓰이지 않은 것들이 더 크게 느껴지는 장면이었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그 뒤에 마사코가 지카의 어린 시절을 꺼내는 대목이에요. 지카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아버지 참관 수업이 있었는데, 아빠들 사이에 엄마가 대신 섞여 서 있었대요. 평소엔 참관 수업 때마다 적극적으로 발표하던 아이가 그날은 손을 한 번도 들지 않았고요. 집에 와서 외롭지 않냐고 물었더니 지카는 활짝 웃으면서 엄마가 있어서 외롭지 않다고 했답니다. 마사코는 그런 딸을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엄마도 똑같아. 우리 지카가 있어서 외롭지 않아. 너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이를 먹으니 이런 장면은 아무래도 부모 자리에서 읽히는 거 같아요. 손을 들지 않은 아이의 마음도 알 것 같고, 그걸 눈치챈 엄마의 마음은 더 알 것 같아서요.

마사코가 "어째서 그렇게 착한 애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니?"라며 절규에 가깝게 쏟아낼 때, 이즈미는 눈물을 닦고 등을 곧게 펴요. 그러고는 "형사도 아닌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지카를 위해서 뭐라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죠. 1장에서 매뉴얼대로 고개만 숙이던 막내가 여기서는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사무실 쪽 인물로는 이즈미의 선배 아라이 미사코가 기억에 남아요. 이즈미가 모르는 게 있으면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믿음직한 서른다섯 살 선배예요. 안색이 안 좋은 채 돌아온 미사코에게 도가시 과장이 "오늘 조퇴는 안 돼"라고 못부터 박는데, 미사코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기자 클럽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소식을 꺼내요. 어느 회사에나 한 명쯤 있는, 막내가 기댈 언덕 같은 사람이죠. 솔직히 초반엔 홍보과 사람들 이름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데다 미사코와 마사코 이름까지 비슷해서 잠깐 헷갈렸는데, 한 사람은 사무실에, 한 사람은 지카네 거실에 있으니 금방 정리되더군요.


마음 한쪽에 계속 걸려 있던 건 이야기가 너무 현실 같다는 점이었어요. 신고를 미룬 이유가 워크숍이라는 설정은 지어낸 얘기로만 넘기기엔 어디선가 뉴스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해설에도 실제 사건이 떠오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래서인지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마냥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표지에 적힌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국가의 안녕이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도 같은 결로 읽히고요. 범인 한 명 찾고 끝나는 이야기려니 하고 들어갔다가는 생각보다 훨씬 먼 곳까지 걸어가게 되는 책이에요.


<지지 않는 벚꽃>은 일본에서 50만 부 넘게 팔렸고 영상으로도 만들어졌어요. 도쿠마문고대상 대상도 받았다고 하니 현지 독자들이 먼저 알아본 셈이죠. 김지연 님의 번역도 매끄러워서 문장이 술술 넘어가는 편이었어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들고 다니면 팔 운동은 덤이니, 이번 달 헬스장은 이 책으로 대신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첫 장부터 속도가 붙어서 두께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트렌치코트 뒷모습, 그 위로 흩날리는 벚꽃잎, 벽에 길게 드리운 사람들 그림자. <지지 않는 벚꽃>의 표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꾸 다시 들여다보게 돼요.


찬 바람 불기 시작하는 10월 끝자락에 봄꽃 이름을 단 책 한 권으로 마음이 꽉 찼네요. 좋은 이야기 제대로 만난 것 같아 든든한 화요일입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책 이야기 들고 또 오겠습니다.



친구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경찰 홍보과 막내가 그 친구의 마지막 일주일을 거슬러 오르는 사회파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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