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 - 너는 느리게 걷는 아이, 나는 발맞춰 걷는 엄마
구하라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1월 첫 화요일이에요. 월요일은 어찌어찌 넘겼는데, 화요일은 이름부터 화끈하게 피곤한 날이라더군요.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첫째는 9개월에 걸었고 18개월에 첫 문장을 말했대요. 3년 뒤에 태어난 둘째는 16개월이 되어서야 겨우 첫걸음을 뗐고, 세 돌이 지나도록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고 하고요.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는 엄마의 그 혼잣말에서 출발하는 책입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주주맘'이라는 이름으로 인스타툰을 그리는 구하라 작가가, 말도 걸음도 느린 둘째를 키우며 지나온 시간을 만화와 글로 엮었어요. 표지에는 노을 지는 강변길을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걷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 한 장이 책 전체의 걸음걸이를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았어요.
첫 장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첫째를 키울 때 작가는 아이 발달을 걱정하는 엄마들한테 "곧 하겠죠, 기다리면 다~해요" 하고 웃으며 말해줬대요. 그리고 몇 년 뒤, 그 말을 둘째 앞에서 고스란히 되돌려 받습니다. 주변에서는 "엄마가 걸음마 연습 안 시켜주는 거 아냐?" 하고 수군거리고요. 회사에서도 남 일일 땐 "다 그렇게 배우는 거야" 소리가 참 쉽게 나오잖아요. 그 말이 내 일이 되는 순간의 온도 차가 그림 몇 컷에 다 들어 있더라고요.

맛보기로 하나 꺼내면 바나나 컷이에요. 엄마가 바나나를 까 들고 "엄마 따라해봐, 바.나.나~" 하는데, 아이 말풍선에는 말줄임표만 덩그러니 있어요. 그 아래 컷에서 엄마는 매일 밤 맘카페를 드나들고, 초록창에 '16개월에 첫걸음', '40개월 언어지연'을 쳐 넣습니다. 검색할수록 남는 건 커져가는 불안뿐이었고,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고요. 휴대폰을 툭 떨군 채 이마를 짚고 누운 엄마 그림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어요.
밤마다 검색창 붙잡아 본 사람이라면 그 컷이 남 얘기 같지 않을 거예요.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만의 재미난 점은 만화 사이사이에 실제 사진이 섞여 있다는 거예요. 코타키나발루의 진짜 바다와 진짜 야자수 위에 만화로 그린 아이 얼굴이 쏙 얹혀 있는 식입니다. 처음엔 좀 신기하다 싶었는데, 보다 보니 이게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컷마다 슬쩍 일러주는 느낌이 들어요. 구명조끼를 입고 "바들.." 떨고 있는 사진 속 아이 위에 얹힌 만화 얼굴은 귀여우면서도 짠했어요.
작가는 치료실 책상 대신 짐을 싸서 두 아이와 한 달 살기를 떠납니다. 프롤로그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달 살기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게 그 시간은 여행이라기보다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해보고 싶었던 간절한 시도였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사피섬으로 건너가는 통통배 장면이에요.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빠른 속도도, 크게 흔들리는 것도, 갑자기 몸이 튀는 느낌도 무서워했대요. 선착장에서 기다리는 엄마 머릿속엔 "괜찮을까?", "너무 울면 어떡하지?", "중간에 내릴 수도 없는데.." 같은 말풍선이 줄줄이 떠 있고요. 배가 출발하자마자 아이 얼굴이 굳더니 이내 울음이 터집니다.

그다음 컷이 좋았어요.
얼굴은 하나도 안 나오고, 엄마의 주황색 옷자락을 꽉 움켜쥔 작은 손과 그 등을 쓸어내리는 큰 손만 클로즈업돼 있거든요. "그렇게 우리는 울음소리와 모터 소리 사이에서 바다를 건넜다." 들리는 거라곤 "괜찮아 괜찮아.." 하는 엄마 목소리와 "으아아앙" 하는 울음뿐인데, 이 한 컷에 책이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울면서 건넌 바다 끝. 섬에 내리자 전혀 다른 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울던 아이는 울음을 멈춘 채 천천히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다 눈앞으로 대왕도마뱀이 어슬렁 지나가는데, 누나는 "악어?!!", 둘째는 "고..공룡?" 하고 굳어버려요. 여기선 소리 내 웃었습니다. 도마뱀 입장에선 졸지에 쥬라기 공원 주연으로 캐스팅된 셈이니까요.
엄마는 그 모습을 보며 "무서운 경험이 꼭 실패로 끝나는 건 아니구나", "울면서 지나온 길 끝에도 아이를 기다리는 새로운 세상이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마흔 넘어 낯선 일을 맡아 허둥대는 직장인한테도 그대로 건네고 싶은 말 같더군요.
둘째는 참 귀여운 아이예요. 말은 느려도 "난 이제 형아니까" 하며 씩씩하게 엄마 손을 잡고, 시소 위에서 "더 높이 엄마!!" 하고 소리치는 장면에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더라고요. 누나 주주도 자꾸 눈에 밟혀요. 낯선 섬에서 동생 손을 꼭 잡고 같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말없이 든든한 구석이 있거든요. 그리고 엄마. 작가는 자기를 멋지게 포장하는 편은 아닌 거 같아요. 불안해서 울고, 맘카페를 들락거리고, 상처받고 돌아와 혼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솔직히 읽다가 제일 걸렸던 건 예비초등 학원 상담 대목이에요. 7세 때 설렘을 안고 찾아간 학원에서 원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발달도 느린데 지금까지 엄마는 아무것도 안 시키고 뭐 하셨어요?" 언어치료도 감통치료도 다니고 여행하며 경험도 쌓아줬던 시간이, 그 한마디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고요. 읽는 제가 다 욱하더군요. 일 년 내내 뛰어다닌 걸 숫자 한 줄로 평가받으며 "그래서 뭐 했어요?" 소리를 듣는 기분이랑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엄마는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아이가 더 주눅 들까 봐 한마디도 못 하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엄마 나 학원 못 다녀?" 하고 묻는 아이에게 웃으며 "그냥 여기보다 더 멋진 학원 가자 우리" 하고 말해요.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인지 알 것 같아서, 그 컷은 오래 들여다봤어요.
"아이의 느림보다 더 힘든 건 어쩌면 아이의 느림을 마치 평균 낙오처럼 판단해버리는 세상의 시선이었다." 놀이터에서 "너는 가" 소리를 듣고 고개 숙인 아이, 자기보다 어린 아이한테 "애기야 너 몇 살이야?" 소리를 듣는 아이가 그 문장 앞에 차례로 놓여 있어요. 작가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니 아이의 마음을 조금 더 단단하게 길러주기로 합니다. "세상이 아이를 작게 보더라도 아이만큼은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지 않도록." 알록달록한 말풍선들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가운데, 엄마가 아이를 꼭 끌어안고 웅크린 그림 위에 이 문장이 얹혀 있어요.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는 치료실을 깎아내리지도, 정답을 내밀지도 않아요.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자기도 치료실을 다녔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치료실 밖에도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 하고 싶었다고요. 그 균형이 읽는 내내 편안했습니다.
에필로그의 이 문장은 느린 아이를 키우며 혼자 속 끓이는 분이라면 꼭 한번 소리 내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엄마, 당신이 유난인 게 아니에요. 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니까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가장 많이 사랑하니까 가장 오래 불안했을 뿐이에요."

그림이 넉넉해서 술술 넘어가고, 두께도 보통 에세이 정도라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가볍게 넘어간다고 가볍게 남는 책은 아닌 거 같습니다.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는 아이 키우는 집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아이가 자란 뒤 같이 펼쳐봐도 좋을 것 같아요.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언젠가 아이가 이 책을 읽게 될 날을 이야기하는데, 그날이 오면 이 책은 그대로 엄마의 편지가 되겠더라고요. 주변에 조급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있다면, 말 대신 슬쩍 건네기에도 좋겠고요.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래지는 11월 초입이에요. 해가 부쩍 짧아져서 퇴근길엔 벌써 표지 같은 노을이 걸리더군요. 다들 토끼처럼 뛰어야 할 것 같은 화요일이지만, 이번 주는 이 책 제목을 주문처럼 한 번 외우고 거북이 걸음으로 가보려고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 한쪽이 따뜻해진 기분입니다.
느린 아이의 걸음에 발맞추며 엄마도 함께 자라는, 울면서 건넌 바다 끝에서 웃게 되는 그림 에세이
#조금천천히자라도괜찮아 #구하라 #주주맘 #모티브 #육아에세이 #그림에세이 #인스타툰 #느린아이 #언어지연 #발달지연 #코타키나발루 #한달살기 #에세이추천 #신간에세이 #책추천 #서평 #북스타그램 #BOOKULOVE #11월책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