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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함을 사랑하기
이창현(코유) 지음 / 고유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창현(코유) <애매함을 사랑하기> 서평, 두부 같은 삶이 좋다는 사람의 다정한 고백
표지부터 좀 애매한 책이에요.
짙은 코발트빛 바탕 위로 하얀 선 하나가 끊기지 않고 흘러가면서 얼굴을 그리고 있는데, 어디까지가 눈썹이고 어디서부터 코인지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불안한 우리, 애매한 나에게, 그럼에도 붙이는, 다정한 한마디"라는 글귀가 군데군데 숨어 있습니다. 제목은 <애매함을 사랑하기>. 애매함을 사랑하라니, 요즘 제 인생에서 제일 선명한 건 뱃살 하나뿐인데 말이죠.

저자는 이창현, 필명은 코유입니다. 작가 소개가 재밌는데요, 춤을 못 춰서 마땅한 표현 방법을 찾다가 글을 고른 사람이고, 시력은 좋지 않지만 책 볼 시력 정도는 있는 사람이래요. 그러다 읽고 쓰는 일이 본업이 돼서 지금은 고유출판사와 상수동 고유아지트, 연남동 고유라운지를 꾸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소개만 봐도 한 줄로 반듯하게 요약되는 분은 아닌 거 같아서, 제목이랑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매함을 사랑하기>는 시작, 애매함, 시도, 잡음, 축적, 사이, 끝까지 일곱 갈래로 나뉘고, 그 안에 짧은 산문들이 촘촘하게 들어 있어요. 두께도 손에 쥐기 편한 정도라 부담이 없고요. 재미있는 건 글 하나 안에 존 키츠와 장자가 나란히 나오고, 바로 옆에서 도라에몽이 주머니를 뒤적인다는 점입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니체 같은 만만치 않은 이름들이 배스킨라빈스 메뉴, 영화관 좌석 얘기랑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요. 어려운 말을 빌려 오면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철학책 펼칠 때처럼 긴장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첫 글부터 좀 의외였어요. 삶이 본래 의미 없다고 생각한 뒤로 생일을 챙기지 않게 됐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거든요. 몇 달 전부터 생일 주간을 준비하는 친구를 처음엔 요란하다고 여겼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자격지심이었다고 털어놓는 대목에선 웃음이 나면서도 뜨끔했습니다. 자기 삶을 당연히 소중하게 대하는 그 자신감이 부러웠다는 말이, 나이 들수록 생일 케이크 앞에서 쑥스러워지는 아재한테도 해당되는 얘기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허무가 저자를 오히려 대담하게 만들었다고 해요. 부동산에 들어간 지 10분 만에 사무실을 계약하고, 거절당하면 뭐 어떠냐 싶어 제안 메일을 돌려 프로젝트를 따내고, 탁구가 재밌다는 이유로 새 사무실을 얻어 탁구대를 들여놓았다고요. 결재 서류 하나 올리는 데도 몇 번씩 고쳐 쓰는 직장인 입장에선 부럽다 못해 살짝 어지러운 속도더라고요.
첫 글은 이렇게 끝나요.
"허무함을 핑계로 숨지 않고, 무기로 들고 나아가기. 같은."
마지막에 덧붙인 "같은."이 꼭 말끝을 흐리는 사람 같아서, 그게 또 이 책다웠어요.
"나는 키가 크지 않다"로 시작하는 표제작 (애매함을 사랑하기)는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얼굴이 빼어나지도, 공부를 썩 잘하지도, 특별한 재능이 있지도 않은 자신을 저자는 서랍 제일 아래 칸 안쪽에 접혀 있는 옷가지에 빗대요. 자주 꺼내 입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버려질 옷더미에 들어 있지도 않은 옷. 너무 정확한 비유라 피식 웃음이 나더군요. 세상은 누구나 자기만의 대표 메뉴 하나쯤은 들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정작 자기 주머니에서는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만 나왔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회사에서 "그래서 본인 강점이 뭡니까" 하는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사람, 아마 저만은 아닐 거예요. 꽤 오래 일했는데도 한 문장으로 저를 요약해 보라고 하면 아직도 말끝이 길어지니까요.
저자는 거기서 존 키츠가 말한, 불확실함과 의심 속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을 꺼내 오고, 장자의 시선을 빌려 애매함을 다시 정의합니다. 한 방향으로 굳지 않은 상태, 그래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라고요. 그리고 이 문장이 나와요.
"애매함은 정의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진중하다고, 누군가는 다정하다고, 또 누군가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앞 문장까지 같이 읽으면 마음이 한결 풀리는 거 같아요. 삶은 바로 그 '기타 등등' 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괜히 좋았고요. 바로 뒤에 붙은 짧은 글 (낮에 빛나는 별)도 결이 비슷합니다. 낮에도 별은 있는데 태양이 밝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얘기요. "나를 너무 일찍 버려선 안 된다"는 한 줄이 짧아서 오히려 세게 들어오더라고요.

<애매함을 사랑하기>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아무리 해도 제자리걸음 하는 것 같을 때)였어요. "사무실, 집, 헬스장, 집, 카페, 그리고 다시 집." 첫 줄부터 남의 하루 같지가 않았거든요. 동선만 조금 바꾸면 그대로 제 일주일이니까요. 집은 조용한데 머릿속만 시끄러운 밤이라는 묘사도 그렇고요.
그런데 그 무거운 밤의 결론이 웃깁니다. 추상적인 질문과 공허한 답 사이를 떠돌다가, 결국 이 모든 게 점심을 과하게 먹고 퍼질러 잔 낮잠 탓이겠거니 하고 낮잠 금지령을 내린다는 거예요. 진지하게 따라가다가 여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저자는 거기서 시선을 우주까지 밀어 올려요.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돌고, 초신성 잔해에서 새 별이 태어나는 것까지 다 반복인데, 한낱 인간이 어떻게 반복을 피하겠느냐고요. 서동욱 교수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에서 '반복은 새로움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을 빌려 오고, 매번 같은 길을 걸어야 새로 생긴 가게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예를 듭니다. 매일 같은 지하철, 같은 엘리베이터, 같은 자리. 지겹기만 하던 그 반복이 이 대목을 지나고 나니 조금은 다르게 보일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매일 반복하는 일상을 보낸다는 말은 매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과 같다."
글은 니체가 던진 영원회귀 질문에 "그러하다"고 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삶은 충분하다는 말로 맺어요. 쳇바퀴 도는 중년 직장인한테 이만한 위로가 또 있을까 싶더군요.
(벚꽃 같은 삶은 싫다)는 합정역에서 걸어서 5분, 가로등이 약해 밤이면 으스스한 거리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벚꽃 필 때만 이상하리만치 다정한 움직임으로 가득 찬다는 그 거리요. 저자는 만개한 벚꽃을 보면서도 비 한 번에 우수수 떨어질 걸 먼저 생각하고, 불꽃놀이 앞에서도 끝난 뒤의 검은 하늘과 밟혀 구겨진 종이컵부터 떠올리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떡볶이처럼 맵고 달고 강렬한 삶 대신 두부 같은 삶이 좋다고 해요.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요란하게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제 역할을 해내는 것.

하루 종일 비슷한 온도로 이어지는 날이 좋다는 대목도 있어요. 아침엔 차갑고 낮엔 덥고 밤엔 다시 서늘해지는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몸과 마음을 갈아입어야 해서 피곤하다는 문장인데, 아침엔 두꺼운 외투가 생각나고 한낮엔 겉옷을 벗어 들게 되는 10월 끝자락이라 그런지 딱 지금 날씨 얘기 같았습니다.
솔직히 마음에 걸렸던 건 그다음 고백이에요. 감정을 드러내면 더 커질 것 같아서 모르는 척, 별일 아닌 척, 지나가는 일인 척 가라앉히는 쪽을 택한다는 얘기. 건강한 방식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마음을 지키는 데엔 도움이 된다고 저자가 덧붙이는데, 그 문장 앞에서 좀 찔렸어요. 회사에서 "괜찮습니다"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중년이라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이번 벚꽃 필 때 보러 갈 거고, 사진도 찍을 거고, 몇 장은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들여다볼지도 모른다고 슬쩍 덧붙이는 솔직함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두부처럼, 물처럼. 글을 닫는 이 두 마디가 참 이 사람답다는 느낌이 들어요.
(겨울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는 계절이 계절이라 더 반갑게 읽혔어요. 호주 시드니에 사는 한 교민이 고국에서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 앞마당에 심었는데, 잎은 무성해지는데 해가 바뀌어도 노란 꽃은 피지 않더라는 이야기예요. 일정 기간 차가운 온도를 지나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는 것, 춘화 현상이라는 말을 이 글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아직 피지 않았다고 해서, 내 안에 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곧 겨울인데, 이 문장 하나 들고 들어가면 좀 덜 추울 거 같아요.
책의 마지막 묶음에 실린 (도망치다 보니 낙원에 도착했다)에서 저자는 "나는 지금까지 도망쳐 왔다"고 대뜸 털어놓습니다. 싸움을 못 해서 잘 웃는 걸 연습했고, 누군가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취업 대신 창업을 택했고, 일하기 싫은 날엔 책으로, 글쓰기로, 헬스장으로 도망쳤다고요. 그에게 도망은 숨 쉬기 어려운 곳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이래요. 길을 잘못 들어서야 골목 귀퉁이의 빈티지숍도 만나고 지름길도 찾게 된다는 얘기와 함께.
그러고는 그렇게 알게 된 자기 취향을 줄줄이 꺼내 놓는데, 이게 참 좋더라고요. 고수를 싫어하고, 배스킨라빈스에서 민트 초코와 레인보우 샤베트를 싫어하고, 영화관에선 E 좌석을 고른다는 것.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검정치마의 (기다린 만큼, 더)와 (한시오분)을 좋아한다는 것. 책 내내 들었던 목소리가 갑자기 옆자리 사람처럼 가까워지는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책은 (나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로 끝을 맺습니다. 앞의 글들이 비교적 담담한 결이었다면, 이 글에는 저자가 가장 깊숙이 넣어 두었을 법한 가족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받기만 하며 자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꽤 아프게 돌아보고, 그 사람들에게 사과를 건넵니다. 자세한 사정은 책으로 만나시는 게 좋을 거 같고, 마지막 문장은 이랬어요.
"이번에도 이기적으로 그대들 덕분에 한결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사과로 끝나는 문장인데 고개를 숙이기만 하지는 않는, 그 솔직한 어정쩡함까지 끝까지 제목다웠습니다.
<애매함을 사랑하기>는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도 좋지만, 아무 데나 펼쳐서 한 편만 읽어도 하루치 위로로는 충분한 책이에요. 짧은 글이 많아서 책장에 꽂아 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꺼내 보기 좋겠더라고요. 제목만 보고는 진로 앞에서 마음 졸이는 이십 대한테나 어울릴 책인 줄 알았는데, 막상 더 자주 고개를 끄덕인 건 마흔 후반인 제 쪽이었어요.
10월도 이제 이틀 남은 목요일입니다. 주말을 하루 앞두고 버티는 요일인데,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서 겨울 문턱이 코앞인 게 느껴지네요. 다가오는 겨울엔 저도 시드니 개나리처럼 춘화 현상이나 한번 기대해 볼까 해요. 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정수리에 머리카락이라도 좀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애매한 채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을 <애매함을 사랑하기>한테 들은 거 같아서, 마음 한쪽이 가지런해진 기분이에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흐뭇합니다.
아직 선명하지 않은 나를 너무 일찍 실패라고 부르지 말자는, 서툰 채로 계속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다정한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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