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항의 전화 마흔여섯 통으로 시작하는 경찰 미스터리 <지지 않는 벚꽃> 서평


오전 11시 반까지 걸려 온 항의 전화가 마흔여섯 통.

<지지 않는 벚꽃>은 이 숫자와 함께 문을 엽니다. 요네자키현 경찰청 홍보과 사무실에서는 전화기 여덟 대가 쉬지 않고 울리고, 스물일곱 살 막내 모리구치 이즈미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매뉴얼에 나온 사과를 되풀이해요. "이 세금 도둑!" 소리와 함께 상대가 수화기를 쾅 내려놓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더라고요. 회사 밥을 이십 년 넘게 먹은 사람한테 저 전화벨 소리는 남 얘기 같지가 않거든요.

오늘이 10월 27일 화요일이에요. 단풍이 산 아래까지 내려오는 늦가을에 벚꽃 이야기를 꺼내려니 철이 좀 안 맞는 거 같긴 한데, 제목이 <지지 않는 벚꽃>이니 봄에 피든 가을에 펴든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히라이시의 여대생 나가a오카 아이리가 오랫동안 스토킹을 당하다 결국 목숨을 잃어요. 부모가 몇 번이나 경찰서를 찾아가도 꿈쩍하지 않다가,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신고서를 받기로 했는데, 그 접수마저 일주일을 미뤘더군요. 경찰은 다른 사건으로 바빴다고 했지만 실제 이유는 담당 부서 직원 열한 명이 간 워크숍이었고요. 아이리는 신고서가 수리되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 대목에서는 화가 안 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정작 사무실 공기는 또 다른 쪽으로 흘러가요. 도가시 과장은 신문을 책상 위에 내던지며 "이게 다 이 망할 놈의 신문 때문이야!"라고 하고, 옆에서 다카하시 과장대리는 "아무리 그래도 워크숍은 아니지" 하고 혼잣말을 해요. 과장이 진짜 신경 쓰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신고를 언제 받았느냐보다 워크숍 얘기가 어디서 샜느냐는 거죠. 일이 터지면 누가 말을 흘렸는지부터 찾고 보는 회의실 분위기는 직장 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 보셨을 거 같아요. 씁쓸하게 웃으면서 읽었네요.


그 말을 듣는 이즈미의 등에 땀이 배어나는데, 소설은 창으로 스며든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슬쩍 덧붙여요. 이 한 문장에서 이야기가 확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워크숍 이야기는 이즈미가 고등학교 동창이자 지역 신문 기자인 쓰무라 지카와 밥을 먹다가 무심코 꺼낸 말이었거든요. 지카는 기사로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틀 뒤 단독 보도가 나와 버린 거예요.


지카는 자기가 쓴 기사가 아니라고 했어요. 이즈미는 그 말을 믿지 못했고요. 그리고 일주일 뒤, 지카는 강 하류에서 발견됩니다.

여기까지는 책 소개에도 나와 있는 출발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이즈미가 친구의 마지막 일주일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른 경찰 미스터리와 결이 다르게 느껴졌던 건 주인공이 서 있는 자리 때문이었어요. 이즈미는 수사권도 수갑도 없는 홍보과 사무직원이거든요. 책에도 자신이 형사였다면 사건 해결을 최우선으로 여겼을 거라는 문장이 나오고, 바로 뒤에 "그러나 이즈미는 형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이어져요. 그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아가는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경찰 조직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바깥 사람처럼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이라, 읽는 쪽도 덩달아 경찰서 안을 낯설게 보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 소개를 보니 유즈키 유코는 주로 뜨겁고 치열하게 사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써 온 작가라고 하더군요. 그런 작가가 스물일곱 살 여성 사무직원을 앞세웠다는 점부터 흥미로웠어요. 해설에서는 이즈미가 홍보과 직원이라는 제삼자의 시선과 친구를 잃은 당사자의 시선을 함께 지녔다고 설명하는데, 3장에 들어서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3장은 공기부터 달라요.

퇴근하자마자 지카네 집으로 간 이즈미가 고등학생 때 이후 10년 만에 그 집 거실에 앉는 장면인데요. 빛바랜 다다미와 자리를 옮긴 화분 말고는 다 그대로라서, 당장이라도 고등학생 지카가 2층에서 내려올 것 같다는 묘사가 나와요. 불단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작은 탁자에는 지카가 좋아하던 헝겊 인형 캐릭터와 스낵이 놓여 있고요.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머니 마사코는 10년은 더 늙어 보인다고 합니다.


이즈미가 현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마사코가 짧은 침묵 끝에 묻습니다. 이즈미 네가 보기에 우리 지카는 어떤 애였냐고요.


"지카는 정말 다정다감한 애였어요. 그리고,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는 착실한 애였어요."

약속.

1장에서 이즈미가 믿어 주지 못했던 바로 그 단어를 이번엔 이즈미가 직접 꺼내는 거예요. 그 대답이 나오기까지 이즈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문장에 쓰이지 않은 것들이 더 크게 느껴지는 장면이었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그 뒤에 마사코가 지카의 어린 시절을 꺼내는 대목이에요. 지카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아버지 참관 수업이 있었는데, 아빠들 사이에 엄마가 대신 섞여 서 있었대요. 평소엔 참관 수업 때마다 적극적으로 발표하던 아이가 그날은 손을 한 번도 들지 않았고요. 집에 와서 외롭지 않냐고 물었더니 지카는 활짝 웃으면서 엄마가 있어서 외롭지 않다고 했답니다. 마사코는 그런 딸을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엄마도 똑같아. 우리 지카가 있어서 외롭지 않아. 너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이를 먹으니 이런 장면은 아무래도 부모 자리에서 읽히는 거 같아요. 손을 들지 않은 아이의 마음도 알 것 같고, 그걸 눈치챈 엄마의 마음은 더 알 것 같아서요.

마사코가 "어째서 그렇게 착한 애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니?"라며 절규에 가깝게 쏟아낼 때, 이즈미는 눈물을 닦고 등을 곧게 펴요. 그러고는 "형사도 아닌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지카를 위해서 뭐라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죠. 1장에서 매뉴얼대로 고개만 숙이던 막내가 여기서는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사무실 쪽 인물로는 이즈미의 선배 아라이 미사코가 기억에 남아요. 이즈미가 모르는 게 있으면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믿음직한 서른다섯 살 선배예요. 안색이 안 좋은 채 돌아온 미사코에게 도가시 과장이 "오늘 조퇴는 안 돼"라고 못부터 박는데, 미사코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기자 클럽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소식을 꺼내요. 어느 회사에나 한 명쯤 있는, 막내가 기댈 언덕 같은 사람이죠. 솔직히 초반엔 홍보과 사람들 이름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데다 미사코와 마사코 이름까지 비슷해서 잠깐 헷갈렸는데, 한 사람은 사무실에, 한 사람은 지카네 거실에 있으니 금방 정리되더군요.


마음 한쪽에 계속 걸려 있던 건 이야기가 너무 현실 같다는 점이었어요. 신고를 미룬 이유가 워크숍이라는 설정은 지어낸 얘기로만 넘기기엔 어디선가 뉴스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해설에도 실제 사건이 떠오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래서인지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마냥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표지에 적힌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국가의 안녕이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도 같은 결로 읽히고요. 범인 한 명 찾고 끝나는 이야기려니 하고 들어갔다가는 생각보다 훨씬 먼 곳까지 걸어가게 되는 책이에요.


<지지 않는 벚꽃>은 일본에서 50만 부 넘게 팔렸고 영상으로도 만들어졌어요. 도쿠마문고대상 대상도 받았다고 하니 현지 독자들이 먼저 알아본 셈이죠. 김지연 님의 번역도 매끄러워서 문장이 술술 넘어가는 편이었어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들고 다니면 팔 운동은 덤이니, 이번 달 헬스장은 이 책으로 대신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첫 장부터 속도가 붙어서 두께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트렌치코트 뒷모습, 그 위로 흩날리는 벚꽃잎, 벽에 길게 드리운 사람들 그림자. <지지 않는 벚꽃>의 표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꾸 다시 들여다보게 돼요.


찬 바람 불기 시작하는 10월 끝자락에 봄꽃 이름을 단 책 한 권으로 마음이 꽉 찼네요. 좋은 이야기 제대로 만난 것 같아 든든한 화요일입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책 이야기 들고 또 오겠습니다.



친구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경찰 홍보과 막내가 그 친구의 마지막 일주일을 거슬러 오르는 사회파 미스터리



#지지않는벚꽃 #유즈키유코 #김지연옮김 #문예춘추사 #일본미스터리 #사회파미스터리 #경찰소설 #일본소설추천 #미스터리소설추천 #도쿠마문고대상 #영상화원작 #소설추천 #책추천 #가을책추천 #서평 #책리뷰 #신간소설 #북스타그램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