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염증
김슬기 지음 / 서사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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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처음 봤을 때 시선이 먼저 붙은 곳은 붉은 테이프였어요. 회색 바탕 위에 옥수수와 감자, 사과가 놓여 있고 그 위로 굵은 가위표가 그어져 있습니다. 몸에 좋다고 배운 것들이 줄줄이 금지 표시를 받은 그림이죠. 옆에는 기름이 흘러내리는 나무 숟가락과 고구마가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어서, 이 도서가 어느 쪽으로 걸어갈지 표지만으로도 짐작이 됩니다. 하단 붉은 띠에 적힌 "병원에 가기 전에 식탁부터 바꿔라!"라는 문구는 그 태도를 한 번 더 확인시켜 주고요.


손에 쥐어 보니 크기도 두께도 부담이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건강서는 각오를 하고 펼쳐야 할 때가 많은데, 이 한 권은 앉은 자리에서 몇 장씩 넘기며 읽어 나갈 만했어요. 지은이 김슬기 님은 미국 FxNA 공인 기능영양 카운슬러로, 20대에 알코올 중독과 거식증, 폭식증을 비롯한 여러 질병을 안고 살았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표준 영양학 지침을 성실히 따랐는데도 몸이 나아지지 않았던 시간에서 출발해 10년 넘게 식단을 파고들었다는 이력이 서문에 먼저 놓여 있어서, 뒤에 이어지는 단호한 주장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짚어가며 읽게 됩니다.


1부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만성적인 문제라면 매일 반복하는 행위를 들여다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하는 행위는 먹는 것이니, 위염이나 관절염, 설명되지 않는 피로감이 있다면 냉장고와 팬트리를 점검해야 한다고 하죠. 그러고는 사무실 탕비실과 책상 서랍까지 덧붙입니다. 이 한 줄이 의외로 정확해서 웃음이 났어요. 집 주방은 그래도 신경 써서 관리하는데, 정작 오후 세 시쯤 손이 가는 서랍 속 간식은 점검 대상에서 늘 빠져 있잖아요.


인슐린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대목은 비유가 촘촘합니다. 세포벽의 인슐린 수용체를 열쇠와 자물쇠로, 세포 안 미토콘드리아를 에너지 생성 공장으로 놓고 시작해요. 하루 세 번 혈당을 크게 올리는 음식이 들어오면 간과 근육이 받을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고, 남은 당은 글리코겐으로, 그러고도 남으면 중성지방으로 저장된다는 흐름입니다. 이 설명의 끝에 놓인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당신을 토실토실 살찌워서라도 혈당 수치만큼은 정상을 유지하려는 것이 당신 몸의 간절한 바람이다."


체중이 늘어나는 일을 의지의 문제로만 읽어 온 사람에게는 시선을 바꿔 주는 말입니다. 몸이 저를 방치한 게 아니라 위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공복 혈당이 당뇨병 진단에서 가장 마지막에 오르는 지표라는 지적이 나오는데, 해마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보는 입장에서는 이쪽이 가장 실용적인 정보였습니다. 공복 혈당 한 줄이 정상 범위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혈당 조절 능력까지 안심해 버리는 습관을 짚어 주고, 공복 인슐린 수치를 함께 확인하라고 권합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갸웃해지는 지점도 있었어요. 검사해 보자고 권한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럴 필요조차 없다며 고탄수화물 식사를 그만두면 된다고 맺습니다. 권유의 힘은 세지는데, 방금 세워 둔 수치라는 근거를 스스로 치워 버리는 셈이라 조금 아쉬웠습니다. 같은 쪽 각주에서 인슐린 저항성은 간접 지표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유병률을 내기 어렵다고 신중하게 적어 둔 것과 비교하면, 본문의 온도가 한참 높아요. 이 책은 전반적으로 각주가 성실한 편인데, 본문의 목소리는 그보다 늘 반걸음쯤 앞서 나가는 인상입니다.


2부에서 눈길이 오래 머문 곳은 저속노화를 다룬 챕터입니다. 요즘 이 말이 워낙 널리 쓰이니 더 궁금해서 읽었어요. 고기를 먹으면 빨리 늙는다는 주장의 근거를 따라가면 mTOR라는 단백질이 나오고, 그 이름은 1970년대 남태평양 이스터섬 토양에서 발견된 물질로 만든 라파마이신이라는 약물에서 왔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동물 실험에서 수명이 연장된 이유가 이 약물의 mTOR 억제 작용이었고, 거기서 mTOR가 많으면 늙는다는 단순한 공식이 생겨났다는 거죠. 반론을 펴기 전에 상대편 근거를 정확히 소개하는 순서라 따라가기가 편했습니다.


저자의 반박에서 마음이 움직인 부분은 근육 이야기였어요. mTOR가 지나치게 억제되면 면역 기능과 조직, 근육 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나이가 들수록 근육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서술입니다. mTOR를 노화와 곧바로 등치시키는 해석은 젊고 건강한 생리적 활성과 늙고 병드는 만성 과활성화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는 정리도 설득력이 있었고요. 고기의 류신 같은 필수 아미노산이 이 경로를 자극하는 건 사실이지만, 근육 단백질 합성과 회복에 바로 그 경로가 필요하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mTOR가 문제라면 그것을 만성적으로 자극하는 잦은 혈당 스파이크와 고인슐린혈증은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죠.


다만 이 챕터 중간에 mTOR와 노화와 고기를 잇는 등식을 말하는 전문가라면 그 사람의 말은 흘려들어도 좋다는 식의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조금 멈칫했습니다. 근거를 꼼꼼히 붙여 온 글이 갑자기 상대의 자격을 재단하는 쪽으로 기울면 오히려 논지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아서요. 독자 입장에서는 판단을 맡겨 주는 편이 더 반갑습니다.


3부에서는 칼로리를 신경 쓰지 말라는 원칙이 오래 남았어요. 모든 칼로리가 동일하지 않다는 명제를 세우고, 통밀빵 한 장과 같은 칼로리의 소고기가 혈당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다르다는 비교를 붙입니다. 통밀빵에는 탄수화물 함량만 높은 반면 소고기에는 필수 아미노산과 철분, 아연, 비타민B군이 들어 있다는 설명으로 영양 밀도라는 기준을 꺼내 놓고요. 그 끝에 놓인 문장이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하게 읽혔습니다.


"그저 당신의 몸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는 양만큼 먹으면 된다."


숫자를 세는 일에서 놓여나라는 권유인데, 20대에 하루 1,000kcal 미만으로 먹으며 매일 달렸다는 저자의 과거와 겹쳐 읽으면 결이 달라집니다. 거식증과 폭식증을 지나온 사람이 오랜 시간 끝에 도달한 자리라고 생각하면, 이 원칙은 식단 지침보다 회복의 기록에 가깝게 들립니다. 근거로 든 경험담이 본인의 이야기 하나뿐이어서 논증으로는 헐거운 면이 있지만, 그 헐거움을 감수하고라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던 마음은 전해집니다.


책 전체의 주장이 저탄고지와 카니보어 쪽으로 뚜렷하게 기울어 있으니,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폭은 다를 거예요. 저는 다섯 가지 원칙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보다, 매일 반복하는 것부터 점검하라는 태도를 가져오는 쪽이 현실적이라고 봤습니다. 오래 믿어 온 상식을 한 번쯤 뒤집어 보고 싶은 사람,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해마다 무거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검진 결과지에 정상이라고 적혀 있으니 그냥 넘겨 온 사람이라면 얻어 갈 문장이 여러 개 있을 겁니다. 정보의 밀도는 높지만 술술 읽힌다는 조한경 님의 추천사, 다루는 범위가 넓어 의료인이나 영양 전문가가 읽어도 생각해 볼 지점이 많다는 송승현 님의 평이 과장은 아니었어요. 참고 문헌과 관련 연구가 곳곳에 안내되어 있어서 더 파고들고 싶은 대목을 따라갈 수 있는 구조라는 점도 미덥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무언가를 고쳐야 할 것 같은 부담만 남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한 권은 조금 달랐어요. 무엇을 끊으라는 말보다, 내 몸이 보내던 신호를 잘못 읽어 왔을 수 있다는 관점을 먼저 건네줍니다.


9월 중순인데 낮에는 아직 늦더위가 남아 있고, 아침저녁으로만 바람의 결이 바뀌었습니다. 여름 동안 헐거워진 식습관을 정리하기에 적당한 시기이고, 겨울 오기 전에 몸의 기준을 한 번 다시 세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이 책이 그 점검의 출발점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먹지 말라는 목록보다, 매일 반복하는 식탁을 의심해 보라는 관점을 남기는 건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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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0세에 다시 태어났다
정솜결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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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면 가볍습니다. 핸드북 판형에 두께도 얇아서 종이 뒷면 글자가 희미하게 비칠 정도인데, 들고 다니며 짬짬이 넘기기에는 이만한 물성이 없더군요.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데 판형은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독자가 부담 없이 첫 장을 열도록 배려한 선택처럼 보였어요.


표지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습니다. 연보라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살구빛으로 풀리고, 가운데에 금빛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길이 오래 가는 쪽은 왼쪽 위였어요. 마른 가지에 아직 열리지 않은 번데기가 그대로 매달려 있습니다. 날아오른 형태와 갇혀 있던 형태를 한 화면에 나란히 둔 구성이라, 표지가 이미 이 한 권의 성격을 말해 주는 셈이죠. 표지 아래쪽에 적힌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 당신의 50대는 새로운 시작점입니다"라는 문구는 조금 뜨겁게 느껴졌는데, 본문의 온도는 그보다 한참 낮고 차분합니다.


이야기는 거울에서 시작합니다. 저자는 일흔이 넘은 친정어머니보다 기력 없어 보이는 자신을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나서려니 발목을 잡은 것은 무릎이나 숨이 아니었어요. 사람들 시선이었습니다. 초췌해 보인다는 눈빛을 받을 것 같아 망설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헬스장 등록비가 부담스러워 돈 안 드는 운동을 검색하다가 떠올린 것이 아파트 계단이었고, 비용도 거리도 눈치도 필요 없는 공간이라는 판단이 뒤따릅니다. 그렇게 18층까지 올라가자고 다짐한 첫날, 2층에서 숨이 막혔고 결국 두 시간이 걸려 집 앞에 닿습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다 눈물이 쏟아졌다는 대목 바로 다음이 이 도서의 결을 보여 줍니다.


"눈물을 훔치고 집에 들어가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설거지를 시작했습니다."


울음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싱크대 앞으로 갑니다. 이런 문장이 어떤 성공담의 절정보다 오래 남습니다.


다음 날의 선택이 더 마음에 걸렸어요. 새벽 네 시에 일어난 까닭이 의지나 자기관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운동을 끝내고 싶었고, 힘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복을 막 시작한 자리에서도 남의 눈을 먼저 살피는 습관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이 짧은 고백이 뒤쪽 장들을 미리 설명해 줍니다. 계단도 한 번에 오르지 않고 새벽과 오전, 정오와 저녁 준비 전으로 네 번에 쪼갰는데, 그 시각표가 남편 출근과 식사 준비를 기준으로 짜여 있다는 점도 함께 눈에 들어옵니다.


블로그를 시작하는 장면도 비슷한 온도로 흘러갑니다. 계정을 찾아보니 10년 전 둘째 아들이 만들어 둔 아이디가 이미 있었고, 글쓰기 버튼 앞에서 오래 망설이다 첫 글을 올립니다.


"오늘부터 블로그를 쓰기 시작합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작해야 제 인생이 바뀔 것 같아서 한 줄이라도 쓰고 갑니다."


발행 버튼을 누른 직후에 밀려온 감정이 후회였다는 서술이 이어집니다.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 건지, 누가 볼지, 창피하지 않을지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고 해요. 시작의 순간을 근사하게 포장하지 않는 정직함이 책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글감이 없어 남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는 대목은 이 기록에서 가장 실용적인 발견처럼 읽혔습니다. 다투다 말고 오늘 당신이 한 말로 글을 쓴다고 알리면 남편이 엄지를 들며 웃어넘겼고, 그러면서 대화가 늘고 다툼은 줄었다고 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빼면 쓸 게 없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된 남편의 변화를 저자는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글쓰기가 감정을 한 번 걸러 주는 장치로 작동한 셈이죠. 부부가 다시 말을 트는 과정을 이만큼 소박하게 남긴 글은 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반을 넘기면 숫자가 등장합니다. 다섯 달 만에 이웃 5천 명, 103명이 신청한 첫 무료강의, 4개월 만에 1,000명이 모인 오픈채팅방, 그리고 월 100만 원. 오픈채팅방 개설과 운영, 무료강의 설계, 요일별 일정으로 기대감을 만드는 방식까지 단계별로 정리되어 있어 실용서로 읽어도 손해는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장면보다 그 앞뒤의 작은 서술이 더 선명했어요. 몇 년 전만 해도 남편 카드로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것도 눈치를 봤다는 문장, 처음 번 돈으로 친정어머니께 건강식품을 보내고 비싼 걸 왜 샀느냐는 핀잔을 들으며 뿌듯했다는 대목입니다. 회복의 크기가 통장 액수보다 그 돈을 어디에 쓸 수 있게 되었는지에서 드러납니다.


목표를 채운 뒤에 찾아온 감정도 숨기지 않습니다.


"마치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정작 그곳이 제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요."


이 비유가 4장의 중심입니다. 이후 저자는 의미를 느낀 순간들이 하나같이 돈과 무관한 때였다고 정리해요. 수강생의 성장을 지켜볼 때,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줄 때. 그리고 그 금액의 의미를 다르게 짚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집안 살림을 맡아 온 사람에게 이 문장이 어떻게 읽힐지는 짐작이 갑니다.


읽다가 걸린 곳도 있습니다. 4장에서는 100만 원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는 결론이 몇 쪽 사이에 거의 같은 어휘로 세 번쯤 되풀이됩니다. 블로그 글의 호흡이 종이로 그대로 옮겨 온 편집이라 그렇게 됐나 싶었는데, 한 번만 말해도 독자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 같아요. 소절 끝마다 기성 격언을 한 줄씩 붙이는 방식도 사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책에서 오래 남는 말은 늘 저자 자신의 문장이었으니까요.


뒷부분으로 가면서 무게가 옮겨 갑니다. 자기수용을 다룬 장에서 이 한 권이 완성된다고 봅니다. 반세기 동안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큰딸이니 모범이 되어야 했고, 결혼한 뒤로는 완벽한 아내와 며느리가 되어야 했다는 이력이 나오는데, 앞 장에서 자신의 주특기라고 적었던 끈기의 출처와 정확히 같은 자리입니다. 버티게 해 준 힘과 스스로를 몰아세운 힘이 하나였다는 뜻이죠. 이 연결을 알고 나서 앞쪽을 다시 넘겨 봤습니다.


일화 하나를 더 옮기고 싶습니다. 강의 중 화면 공유를 잘못해 개인 메모장이 노출되는데, 거기 적혀 있던 것이 "긴장하지 말자", "천천히 말하자" 같은 다짐이었어요. 당황해서 사과하자 사람들은 귀엽다고,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감추려던 것이 드러난 순간에 관계가 오히려 가까워지는 과정을 설명 하나 없이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아쉬움을 하나 덧붙이면, 자기수용을 말하는 장에서도 그 증거가 대체로 타인의 반응으로 제시됩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니 사람들이 편하게 다가와 주었고, 수강생들도 따라 변했고,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다는 순서입니다. 스스로를 받아들인 근거를 다시 바깥에서 구하는 구조인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평생을 남의 기준에 맞춰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순서가 가장 현실적인 경로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남의 눈을 통해서라도 자기 자리를 확인하고, 그러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데까지 가는 과정. 그 자기 대화가 끝난 일로 적혀 있지 않고 지금도 진행 중인 일로 남아 있다는 점이 오히려 신뢰를 줬습니다.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이 하루아침에 되지 않았고 여전히 가끔 그 생각이 든다고 인정하는 문장도 그렇고요.


제목만 보면 오십 줄에 들어선 여성 독자를 향한 안내서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읽어 보면 범위가 좀 더 넓어요. 어딘가에서 한 번 멈춰 서 본 사람이라면 나이와 무관하게 걸리는 문장이 있을 테고, 사십 대 후반에 이 기록을 펼치면 몇 걸음 앞서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미리 살펴보는 일이 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정보가 빼곡한 책보다 사람의 목소리가 남는 책이 더 오래 기억됩니다. 이 한 권은 뒤쪽에 가까웠어요. 채팅방 운영 노하우는 검색으로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지만, 2층에서 숨이 막혔던 사람이 다음 날 다시 계단으로 나서는 마음은 다른 데서 구할 수가 없으니까요.


표지의 번데기를 다시 봤습니다. 날아오른 모습만 남기지 않고 그 전의 형태를 굳이 같은 화면에 둔 선택이 이 책의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아침저녁 바람이 달라지고 낮의 열기가 한 겹씩 벗겨지는 시기예요. 여름을 지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에 이만한 계절도 없고, 가벼운 판형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조금씩 넘기기에도 잘 맞습니다.


2층에서 멈춰 선 사람의 기록이자, 나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한 번 물러서 본 이들에게 건네는 담백한 회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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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투자학개론
한정수(세상학개론) 지음 / 토네이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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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 위쪽은 거의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갈색입니다. 그 어두운 면 위로 흰 선이 왼쪽에서 계단처럼 내려오고, 붉은 곡선 하나가 비슷한 자리에서 출발해 오른쪽 위로 휘어 올라갑니다. 같은 구간을 두 개의 선으로 그려 둔 셈이에요. 읽다 보면 이 구성이 장식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앞부분에 엔비디아 주가 그래프가 실려 있는데, 60배 넘게 오르는 동안 30퍼센트 이상의 하락을 네 번 겪었고 그중 한 번은 65퍼센트가 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붉은 곡선인데, 그 안에는 흰 계단이 네 번이나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죠. 판형과 두께는 평범한 편이라 들고 읽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인생을 바꾸는 투자학개론>은 종목을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첫 장의 제목이 '우리는 투자를 잘못 알고 있다'인데, 저자는 성과가 좋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를 기법에서 찾지 않고 기대 설정에서 찾습니다. 잘못된 기대가 잘못된 판단을 만들고, 그 판단이 손실로 이어진다는 순서예요. 그러면서 착각 세 가지를 차례로 걷어냅니다. 노력 없이 벌 수 있다는 착각, 변동성 없이 벌 수 있다는 착각, 그리고 성실하게 공부하면 시장이 보상해 줄 거라는 착각.


첫 번째 착각을 무너뜨리는 문장이 꽤 단단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투자는 불로소득보다는 감정노동에 가깝다." 공포를 이겨내는 일, 수익이 난 자산을 팔지 않고 버티는 일, 확신이 흔들릴 때 원칙을 지키는 일이 전부 감정과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몸을 쓰지 않을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어떤 직업 못지않게 고되다고 덧붙입니다. 월급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투자라는 말이 어쩐지 떳떳하지 않게 느껄질 때가 있는데, 그 불편함을 눌러 두는 쪽이 아니라 성격을 바꿔 설명해 주는 방식이라 오히려 편했습니다.


세 번째 착각은 가장 아팠습니다. 노력에 결과가 따른다는 사고방식은 학창 시절부터 몸에 익은 것이지만 시장은 학교도 시험도 아니고, 누가 더 열심히 공부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때그때 시장이 중요하게 보는 과목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공부에 의미가 생긴다고요. 시험 과목이 바뀐 줄 모르고 엉뚱한 과목만 파는 학생 이야기가 뒤에 붙습니다. 세상이 먼저 움직이고 공부는 그다음이라는 순서가 책 안에 적혀 있는데, 이걸 받아들이는 데 몇 페이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독자를 몰아붙이다가 스스로 속도를 줄입니다. 감정노동이고, 변동성을 견뎌야 하고, 성실함만으로는 안 되고, 책임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늘어놓은 뒤에 이렇게 적어 둡니다. 투자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꼧다면, 그 느낌이 맞다고요.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이미 큰 걸음이라고 이어집니다. 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투자의 어려움을 존중해야 투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어렵게 느끼는 감각을 틀린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가, 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 장에서 가장 오래 붙들린 건 장기 투자를 다룬 챕터였습니다. 제목이 '가장 큰 리스크는 상승을 놓치는 것이다'인데, JP모건이 이십 년 가까운 기간을 놓고 조사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수에 계속 머문 사람과 가장 크게 오른 상위 열흘만 빠진 사람을 비교하니 후자의 자산이 반 토막 이하로 떨어졌고, 상위 육십 일을 놓친 경우에는 계속 머문 쪽의 7퍼센트 수준에 그쳤다는 내용이에요. 여기서 저자가 짚는 핵심은 급격한 상승이 늘 급격한 하락장 속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2020년 3월의 코스피가 예로 나옵니다. 사상 최대 낙폭을 기록한 다음 날 7퍼센트 넘게 반등하고, 그다음 주 월요일엔 다시 5퍼센트 넘게 빠졌다가, 연준의 발표 이후 역대 두 번째 상승률이 나왔던 며칠이요. 그해 3월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숫자보다 그 공기를 먼저 떠올릴 겁니다.


그 구간을 설명하는 문장이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락의 끝과 상승의 시작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붙어 있다." 그래서 바닥 근처에서 겁을 먹고 정리한 사람은 바로 그다음부터의 반등을 놓치게 된다고 해요. 저자는 호가창 이야기까지 끌고 들어옵니다. 공포가 극에 달하면 싸게 사려던 쪽은 현금을 다 쓰고 팔려던 쪽은 이미 다 팔아서 주문이 양쪽으로 말라 버리는데, 그렇게 호가창이 얇아질수록 오히려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라는 겁니다. 지면에 촘촘한 호가창과 듬성한 호가창을 나란히 놓은 도해가 있어서 이해가 쉬웠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는 한 전량 매도는 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비중은 줄일 수 있고 일부는 현금화할 수 있지만, 1퍼센트라도 들고 있는 것과 0퍼센트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요. 이유가 꽤 인간적이었습니다. 사람은 간사해서 돈을 다 빼면 시장에 대한 관심도 함께 사라지고, 이해관계가 없는 것에 꾸준히 마음을 쓸 여유는 없다는 것. 공부를 이어 가기 위해서라도 정찰병과 보초병 역할을 하는 자산은 남겨 둬야 감각이 유지된다는 조언이 나옵니다. 시장을 완전히 떠난 사람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거나 하락만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관찰은, 주변에서 한두 번은 본 모습이라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네 번째 장에서 저자는 자기 책의 한계를 직접 그어 둡니다. 세계관과 행동 원칙까지는 책으로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지만 실전 근육은 다르다고, 대신 투자를 해 줄 수도 없고 남의 경험을 그대로 갖다 붙일 수도 없다고 말해요. 백 미터는 누구나 뛰어 볼 수 있지만 사십이 킬로미터는 훈련한 사람도 힘들어하는데, 투자 시장에서는 경험 없이 오래 들고만 있으면 장기 투자자가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이어집니다. 선반영을 설명하는 대목도 좋았습니다. 이론은 이미 반영된 정보에 시장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깔끔하게 정리하지만, 실제로 몇 퍼센트가 반영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비율은 조용히 계속 움직인다고요. 시장의 변수는 스위치가 아니라 농담의 문제에 가깝다는 표현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같은 장에서 남의 하락과 제 계좌의 하락은 다른 일이라고 못 박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날 5퍼센트, 다음 날 7퍼센트, 그다음 날 11퍼센트씩 빠지는 걸 보고 있으면 잔고를 확인하는 일 자체가 두려워지고, 가만히 있는 게 바보처럼 느껄져서 하루만 피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요. 그 순간이 곧 계절을 버리고 날씨를 맞히려 드는 시작이라는 연결이 앞 장의 비유와 맞물립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끝까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감각은 직접 겪어야만 생긴다고 여러 번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이 책을 처음 펼친 사람은 결국 얼마쯤을 수업료로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뒤로 미뤄져 있어요. 정찰병 자산을 남겨 두라는 원칙이 부분적인 힌트처럼 읽히긴 하지만,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 규모를 어떻게 정하라는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자가 경험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었기 때문에 생긴 빈칸일 텐데, 그래서 이 책은 읽고 끝내는 종류가 아니라 옆에 두고 몇 년을 같이 가는 종류라고 이해했습니다.


그 이해를 거들어 준 건 저자 본인의 제안이었습니다. 다 읽은 뒤 책장에 꽂아 두지 말고 아끼는 친구에게 잠시 빌려주라고, 반년이나 한 해쯤 지나 돌려받아 다시 읽으면 그동안 쌓인 경험 덕분에 같은 문장이 다르게 읽힐 거라고 적어 두었어요. 자기 글의 수명을 독자의 시간에 맡기는 문장입니다. 장의 끝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빌려옵니다. 폭풍은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을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는다는 이야기죠. 두려움의 세부는 흐려지더라도 다음에 비슷한 강도의 폭풍이 오면 몸이 먼저 다르게 반응한다고, 그것이 투자 근육이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폭락장에서 여전히 심장이 쫄깃해진다고 먼저 인정한 사람의 말이라 신뢰가 갔습니다.


읽고 나니 이 도서가 겨누는 독자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종목 이름을 얻으려고 펼친 분에게는 아마 심심할 겁니다. 반대로 몇 해째 사고팔기를 반복했는데 계좌는 제자리라고 느끄는 사람, 자녀 교육비와 노후 사이에서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본 적 있는 사람에게는 읽는 속도가 느려지는 대목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저는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부록으로 실린 산업 분석 프롬프트는 AI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감이 없는 사람에게 실용적인 출발점이 되겠고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책인데, 그동안 읽어 온 책들 가운데 태도를 먼저 교정하려 드는 쪽은 드물었습니다. 마음을 달래는 문장이 많은 책은 아니지만, 어렵다고 느끼는 감각이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해 주는 한 문단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는 종류입니다.


여름이 물러가고 아침저녁 공기가 달라진 9월입니다. 계절은 이렇게 바뀔 줄 알면서도 내일 비가 올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이 책은 그 둘을 구별하라고 말합니다. 날씨를 맞히는 데 쓰던 마음을 계절 쪽으로 조금 옮겨 두는 것, 그 정도가 한 권을 덮고 남은 숙제예요. 붉은 곡선을 부러워하기 전에 흰 계단을 먼저 보게 된 것만으로도, 올가을 서가에 오래 남을 도서입니다.


종목을 고르는 법이 아니라 흔들리는 구간을 견디는 관점을 세워 주는 투자 기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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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 마인드셋 - 인생을 바꾸는 10분의 기적
윤수정 지음 / 바이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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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한 사람의 성공담을 기대하고 펼쳤다가, 무언가를 접어버린 시간을 먼저 읽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27년 차 초등교사이자 세 아이를 키워온 저자 윤수정의 <모닝 마인드셋>은 새벽 기상을 다루면서도 출발점을 바닥에 두고 있어요. 제자리걸음만 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해서, 어렵게 딴 박사학위마저 휴짓조각 같았다고 씁니다. 결국 계획했던 일을 다 접었고, 그 상태를 저자는 이렇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적당히'를 외치며 '편안함'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포기를 게으름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문장입니다. 더 다칠 여지를 없애려고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 어떤 시기에는 생존에 가깝다는 것을, 저자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적어 놓았어요. 그 뒤로 6년이 흐르고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든 생각도 담담합니다. 특별히 불행한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 마흔을 넘긴 독자라면 이 서술에서 걸음을 늦추게 될 겁니다.


책의 처방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정한 시각에 못 일어나면 하루를 망친 기분이었다는 저자가 찾아낸 방법은 미라클 모닝을 미라클 데이로 옮기는 것이었어요. 힘들고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냥 뭐라도 하는 겁니다. 글쓰기라면 메모장에 끄적이고, 독서라면 타이머 맞춰 10분 읽고, 청소라면 청소기부터 꺼내는 식이죠.


"그냥 하다 보면 그다음 할 일이 떠오른다."


기분이 나아진 다음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고 나서 기분이 따라온다는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새벽 기상이 몇 시냐의 경쟁으로 흐르지 않도록 저자가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어 둔 대목이라 신뢰가 갔어요.


중반부에서 루틴과 리추얼을 갈라 설명하는 부분은 이 도서에서 가장 실용적인 자리였습니다. 두 개념을 나누는 기준은 목적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요. 효율을 위해 지켜내려 애쓰는 것이 루틴이라면, 리추얼의 핵심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데 있습니다. 조건도 구체적입니다. 1~2분 안에 끝나는 간단한 일이어야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치우는 쪽도 포함됩니다. 아침 커피를 그냥 마시면 습관이지만 그 시간을 마음 정리하는 자리로 삼으면 성격이 달라진다는 예시 하나로 설명이 끝나요. 저자 자신은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마시고 풍경을 사진에 담는 일을 그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뒷부분의 아티스트 데이트는 이 책에서 가장 낯설고, 동시에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개념이었습니다. 줄리아 카메론의 책에서 가져온 말로, 내면의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고 소개됩니다. 저자가 이걸 붙잡은 이유가 솔직해요. 두 권의 책을 낸 뒤에 오히려 글쓰기가 두려워졌고, 자기 경험을 박박 긁어모아 이미 써버렸다고 느꼈다는 겁니다. 자판을 두들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노트북을 접어버렸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해법은 더 읽거나 더 짜내는 쪽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정해 무조건 밖으로 나갔고, 5년째 사는 동네인데도 어떤 곳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고 해요. 카페 한 곳을 점찍어 사장님과 인사하는 사이가 되고, 유리창 너머 사람과 불빛을 바라보다 잊고 지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고 씁니다. 맨발로 공원을 걷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촉촉한 흙과 거칠거칠한 모래알, 물기를 잔뜩 머금은 질퍽한 땅을 하나하나 구분해 적어 둔 대목이 좋았습니다.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조심조심 걸으면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그날은 잠도 깊었다고 해요. 새벽에 가뿐히 일어난 것이 의지 덕이라기보다 전날 저녁의 결과였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이 챕터의 결론은 커피 종류와 음악을 바꿔 보는 정도의 작은 변수로 하루의 질감이 달라졌다는 관찰이고, 저자는 그 이유를 자기 쪽에서 찾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린 지점도 있습니다. 아티스트 데이트의 조건을 저자는 분명히 '혼자'로 못 박아 두었는데, 맨발 걷기를 지속하다 보니 오가며 인사하는 사람이 생기고 건강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고 적어요. 혼자 하는 탐험이 관계로 번지는 흐름인데, 앞서 세운 정의와는 어긋납니다. 실천이 개념을 밀고 나간 결과라 오히려 미덥게 읽히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이 시간이 왜 꼭 혼자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조금 더 있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곳곳에 인용이 촘촘한 것도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대목입니다. 저는 인용된 유명인의 일화보다 저자가 자기 실패를 적어 놓은 자리가 훨씬 힘이 있었어요.


표지를 다시 봅니다. 짙은 보라 속에 방 하나가 있고, 블라인드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번져 있고, 책상 위에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어요. 시계 눈금이 그 방을 둥글게 감싸는데 스탠드 목과 책상 선이 그대로 시곗바늘처럼 읽힙니다. 아래쪽 문장은 "우리 함께 새벽 기상을 시작해 볼까요?"입니다. 해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청유형인 게 이 책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판형과 두께도 평범해서 들고 다니며 읽기에 부담이 없었고, 문장도 막히는 데 없이 넘어갔습니다.


여러 책을 받아 읽어오지만, 읽는 동안 지난 한 주에서 저를 위해 쓴 시간이 몇 분이었는지 세어 보게 만드는 경우는 드물었어요. 자신을 위한 시간이 단 몇 분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 새해 계획을 크게 세웠다가 며칠 만에 접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안내서에서 가져갈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9월 중순으로 들어서니 낮의 열기는 남아 있는데 동트기 전 공기는 먼저 서늘해졌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신호를 가장 이른 시각에 먼저 알아채게 되는 때예요. 길이로 재지 않는 시간, 저자가 카이로스라 부르는 것도 아마 이런 결일 겁니다. 올해가 아직 넉 달 가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 계절에 확인해 두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새벽형 인간이 되라고 몰아세우지 않고, 1~2분과 10분이라는 가장 낮은 문턱을 내주는 조용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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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주역은 60대
우메즈 유키에 지음, 신현암 옮김 / 세이코리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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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정 바탕에 흰 글자로 눌러 쓴 제목을 보면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표지에서 이미 끝납니다.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부터 박아두는 방식이고, 위쪽에는 마지막 블루오션이라는 문구가, 아래쪽에는 경영자와 마케터의 필독서라는 띠지 문구가 자리를 잡았어요. 양옆을 받친 황토빛 세로 띠 덕분에 인상은 꽤 단단한데, 막상 손에 들면 판형도 두께도 부담이 없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아 며칠에 나눠 편하게 읽었습니다.


지은이 우메즈 유키에는 일본 시니어 여성 매체 하루메쿠의 '생활 방식 연구소' 소장입니다. 매달 도착하는 독자 엽서와 해마다 900명 가까운 인터뷰에서 건져 올린 자료를 다섯 장에 나눠 담았고, 번역은 신현암이 맡았습니다. 앞머리에 나오는 일본 60대 여성의 1년 지출 순위부터 통념을 흔듭니다. 1위가 손주에게 쓰는 돈, 2위가 덕질이고, 의약품과 의료용품은 그 다섯 분의 일에도 못 미칩니다. 덕질 지출은 50대보다 60대가, 60대보다 70대 이상이 더 크다는 숫자까지 나오면 시니어 소비를 병원비와 건강기능식품으로 그려온 머릿속 그림이 한 번 지워집니다.


이 책이 진짜 붙들고 있는 주제는 소비가 아니라 어긋남입니다. 마음은 젊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 저자는 이것을 인생 전환기의 특징이라고 부릅니다. 60대 여성들의 목소리가 네 개 실려 있는데 구조가 똑같아요. 손주는 귀엽지만 온종일 돌보는 일은 솔직히 힘들다는 말,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간병은 체력적으로 버겁다는 말,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잊어버리니 끝이 없다는 말. 그중 저를 오래 붙든 건 이 문장이었습니다.


"계속 일하고 싶지만 쉽게 피로해져서 예전만큼의 활력이 나지 않아요."


돌봄, 간병, 노동, 학습. 일본 이야기라고 밀어두기에는 한국의 50대와 60대가 놓인 자리와 너무 닮았습니다. 아직 역할이 남아 있는 세대라서 그 어긋남이 더 크게 벌어진다는 설명도 수긍이 갔고요.


기업이 이 간극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주는 세 가지 사례가 2장의 중심입니다. 백발 관리 제품을 소개할 때 백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플래티넘 그레이라고 부릅니다. 백발을 숨기며 염색하는 것이 아니라 백발을 살린다는 발상이죠. 청력을 보완하는 기기로는 보청기 대신 넥밴드형 집음기를 고릅니다. 이어폰처럼 생겨서, 청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세상 소리가 작을 뿐이라고 둘러댈 여지를 남겨준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고객에게는 보행 보조기 대신 여행 가방처럼 생긴 캐리어를 권하는데, 이유가 분명합니다. 연배 있는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손잡이를 잡고 걷는 모습 자체가 노인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것.


읽으면서 걸린 지점도 여기입니다. 하루메쿠는 보행 보조기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걸 알면서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미지가 걸린다는 이유로요. 그 판단이 배려인지, 필요한 사람에게서 선택지를 하나 치워버리는 일인지 책은 끝까지 정리해주지 않습니다. 4장에 나오는 '인생의 카운트다운 소비'도 비슷하게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저자는 세일 종료 타이머 같은 광고 기법을 설명한 뒤, 그 시간의 잣대를 체력의 한계로 치환한 것이 이 세대를 움직인다고 짚습니다. 논리는 정확한데, 남은 시간을 세어보는 사람의 마음이 판매 기법과 나란히 놓이는 순간 어딘가 서늘해집니다. 저자도 그걸 아는지 곧바로 일일일생이라는 격언을 끌어와 기업이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톤을 정돈하는데, 배치가 남긴 인상까지 지워지지는 않더군요. 시니어 비즈니스 실무서라는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오래 남는 건 숫자 사이사이에 사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2024년에 시작하고 싶은 일을 물은 조사에서 50대와 60대, 70대 이상 모두 1위가 정리정돈이었습니다. 절약이나 저축은 상위 스무 개 안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고, 투자와 자산 운용은 올라왔어요. 일과 투자가 나이에 따라 쑥 빠지는 자리를 스마트폰과 SNS 공부, 수공예와 나홀로 여행이 채우는 흐름도 눈에 들어옵니다. 응답을 관통하는 조건은 하나였습니다. 건강할 때, 체력이 있을 때, 갈 수 있을 때.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고 답한 61세 여성의 셈법이 특히 그랬습니다.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15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요즘은 자연재해가 많아 좋은 계절을 따지다 보니 먼 곳은 매년 한 번 정도밖에 기회가 없더라고요."


앞으로 몇 년이 아니라 앞으로 몇 번이라는 단위로 계산하는 마음. 마흔 후반이면 아직 먼 이야기일 법한데, 읽는 동안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책의 끝자락은 뜻밖에 개인적입니다. 저자는 환갑을 맞은 남편이 자신을 신인류 시니어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로 마지막 글을 엽니다. 오키나와 여행에서 배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뜻의 방언, 라이온 킹에서 따온 문제없다는 뜻의 노랫말을 남편이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고 적어두었어요. 워크숍에서 그 말을 닉네임으로 삼은 60대 초반 여성 이야기도 함께 나옵니다. 그러고는 노후의 불안과 불편도 그 정신으로 건너가기를 바란다고 씁니다. 마케팅서로 출발한 책이 세대를 이해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로 닫히는데, 60대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 질문과 시선은 어느 연령대에나 공통된다는 마지막 문장이 이 책을 비즈니스 서가 바깥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실무 지침서는 읽는 동안만 유용하고 덮으면 흐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도서는 조금 달랐습니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기획하는 사람에게 쓸모 있는 자료인 건 분명하지만, 부모 세대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고 싶은 마음으로 펼쳐도 충분히 값을 합니다. 저처럼 곧 그 나이대에 진입할 사람이라면, 마케팅 사례집이라기보다 몇 년 앞을 미리 읽는 안내서에 가깝게 읽힐 거예요.


9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계절이 넘어가는 자리에서 이런 한 권을 읽으면, 나이 드는 일을 대비의 대상으로만 두었던 시선이 조금 느슨해집니다.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괜찮다는 마지막 인사가,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60대의 지갑을 분석한 책인데, 읽고 나면 나이 드는 마음을 이해하는 쪽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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